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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생] (번역) 로베르트 발저, 「반 고흐, <아를의 여인>(1888)에 대한 메모」

작성자
선민
작성일
2016-07-19 15:26
조회
4332


로베르트 발저,「반 고흐, <아를의 여인>(1888)에 대한 메모(Robert Walser, ‘A Note on Van Gogh’s L’Arlésienne’)

이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온갖 생각이 든다. 이 그림에 푹 빠진 어떤 사람에게 갖가지 질문이 일어나는 것인데, 질문들은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이상하고, 너무나 당혹스러워서 대답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수많은 질문은 최고로 훌륭하고, 더할나위 없이 절묘하고, 극도로 정교한 의미를 발견한다. 예를 들면, 사랑에 빠진 한 사나이가 자신의 여인에게 “제가 계속해서 희망을 가져도 되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더라도, 때로는 이 대답의 부재가 온전한 긍정을 뜻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모든 것, 위대한 모든 것과 이 작품이 함께 하는 방식이다. 여기 이 그림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고, 위대함으로 넘쳐나며, 깊이 있고 아름다운 질문들로 충만하면서,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심도있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온갖 답들로 풍요롭다. 그림은 경이로워서, 어떤 이는 19세기의 인간이 그렇게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왜냐하면 이 그림이 마치 초기 기독교 시대의 장인이 붓질을 한 듯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만큼 웅장하고, 고요한 만큼 흥미롭고, 기막히게 아름다운 만큼 초라하다. 딱 그렇게 아를에 사는 여인,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고 서두르지 않으면서 다가서려는 한 사람의 탄원자, 그녀의 초상화인 것이다. “말해주세요. 당신은 깊은 고통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 작품은 잠깐 동안 그런 여인의 초상화였다가, 다시 화가의 모델, 그의 모델이 된 여성의 모습을 띄고 있는, 인생이 지닌 잔혹한 수수께끼에 대한 그림이 된다.

이 작품에 있는 모든 것이 엄숙한 카톨릭주의와 똑같은 것으로, 한결같은 신의, 성심, 소박한 사랑과 다름없는 것으로 채색되어 있다. 소매는 머리 장식과 다름없고, 의자는 빨갛게 테를 두른 여인의 눈에 다름없고, 손은 이목구비와 다름없는데, 불가사의하면서도 힘찬 획과 그 붓질의 화려함은 전부가 사자 같아서, 우리는 너무나 거대하고 막아설 수 없는 어떤 것 앞에서, 느끼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를 찾을 수가 없다. 이 그림이 단지 일상 속 한 여인의 초상화에 지나지 않음에도, 당신을 움켜쥐고 뒤흔드는 이 위엄이야말로 이 작품의 신비로운 품격을 만든다. 불운의 필연성 그 자체는 이 그림의 배경인 듯하다. 여기에는 한 인간이 정확히 그가 살고, 숨쉬고, 필연성인 듯 오래 전에 익숙해져 버려 아무도 모르게 자신 안에 담아두어야만 했던 여러 감정을 지닌 채로 그려져 있는데, 아마도 그녀는 견뎌내야 했고, 한쪽 곁에 밀쳐두기도 했었으며, 극복하기도 했던 그 모든 것을 절반 정도는 잊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그녀의 두 뺨을, 오랫동안 고통받은 이 여인을 어루만지려고 한다. 심장이 그에게 이 그림 앞에서 자신의 모자를 벗고, 아무것도 덮여있지 않은 거기에 서서, 마치 교회의 성스러운 아치 회랑으로 들어섰을 때처럼 있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아니 정말 이상하지 않지, 않은가? 어째서 그토록 고통받았던 화가가 오래 고통받았던 이 여인을 그리게 되었는가? 그녀는 즉시, 경계 없이 화가에게 호소했었으리라, 그리고 나서 그가 그녀를 그렸던 것이다. 이 존재, 세상과 운명이 무참히 다루었고, 이제는 아마 스스로 잔인해져버린 이 존재는 화가에게 급작스럽고도, 막대하게, 그 영혼을 통해 겪게 되는 어떤 모험으로 체험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가 그녀를 몇 번이나 그렸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었다.    (1912년 6월)

◌ 로베르트 발저(1878~1956)는 스위스 태생으로 독일어로 작품을 썼던 작가입니다. 『벤야멘타 하인학교 : 야곱 폰 군텐 이야기』를 썼고 ‘복종’이나 ‘산책’을 키워드로 수많은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헤르만 헤세는 “만약 십만 명이 로베르트 발저를 읽게 된다면, 이 세계는 더 나은 곳이 될텐데”라고 칭송했다지요. 발저는 위의 노트를 쓰기 몇 해 전, 어느 회화 전시회에서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1988)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둘러 딴 그림들도 보고 와야지 마음먹었지만 어쩐지 결국 「아를의 여인」앞으로 돌아와 한 참을 서 있게 됩니다. ‘나는 왜 이 그림에 매료된단 말인가?’ 이것이 그가 팔짱을 끼고 한참동안 작품을 응시한 이유였습니다. 아름답지도 않고 조금은 늙은 데다 뭔가에 골몰해 있는 이 평범한 인간의 초상을? 내가? 그리고 발저는 서서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이 여인의 불행과 인고를 단번에 알아차린 그 화가, 화가의 고통과 슬픈 운명에 전율하면서 말이지요. ‘나는 왜 이 그림에 매료되는가?’ 바로 발저 그 자신의 회한에 찬, 어쩔 수 없는 그 운명이 아를의 여인과 반 고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발저는 그날, 반 고흐로부터 가혹한 운명을 뛰어 넘는 한결같은 신의, 성심, 소박한 사랑의 위대함, 예술의 엄숙함을 배웠습니다.

◌《짭쪼롬한 영어의 맛: 이 글의 번역은 쉬운 듯 어려운 듯 했습니다. 발저는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들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발저가 경이로움과 기쁨에 빠져 쓰고 있는 finest, subtle, delicate를 훌륭하다든가, 절묘하다든가, 정교하다고 옮기는 것이 최선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solemn”은 이 글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인데요. 엄숙하다로 충분한 걸까요? 발저가 쓴 뜨거운 글이 저의 번역과 함께 차갑게 식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 저는 아마 발저처럼 팔짱을 끼고 한참 동안을 「아를의 여인」을 보고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위의 글은 Robert Walser, Speaking to the Rose : Writings, 1912-1932에 실려 있습니다. 독일어의 영어 번역본을 다시 한국어로 중역 했습니다.

  • 로베르트 발저가 선구적인 아트 블로거라는 기사도 있습니다. ^.^ 그의 책 Looking at Pictures 소개예요. (http://lithub.com/robert-walser-original-art-blogger/)

  • 발저가 고흐를 만나게 된 경위는 Looking at Pictures에 나와 있는데요, 아래의 페이지에서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https://talkingpicturesblog.com/2016/01/14/walser-on-van-go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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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19 21:48
    로베르트 발저는 독일어로 썼겠지. ㅋㅋ 어쨌든 그 와중에 수고하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