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썬더곰의 벤쿠버 이야기 | 서쪽으로 [1] 미국 서부 오레곤 주의 해안을 가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6-07-29 13:17
조회
615
Going West [1] 미국 서부 오레곤 주의 해안을 가다

 

08543451b368559c84e020e36ecc2f8b_1469602
08543451b368559c84e020e36ecc2f8b_1469602
08543451b368559c84e020e36ecc2f8b_1469602

 

벤쿠버는 태평양의 서쪽 해안가에 붙어 있는 도시입니다. 미국 국경까지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아서, 씨애틀이 있는 워싱턴 주와 그 아래쪽에 붙은 오래곤 주는 벤쿠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가까운(?) 여행지입니다. 저희는 이번에 길고 긴 해변으로 유명한 오레곤 주의 바닷가를 3박 4일 여정으로 다녀왔습니다. 무서운 미국 영화를 많이 보아서인지, 총기 소지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인지 두 어린이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이 좀 많이 긴장되었습니다. 허나,

기가 막힌

금요일인데다 휴가철이 겹쳐서인지 미국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어마무짠한 교통체증을 만났습니다. 첫날 저희가 묵기로 한 소도시 켈소(Kelso)는 국경 통과를 포함한 기본 운전 시간을 대략 6시간으로 예상한 곳인데요. 집에서 나와 호텔이 도착하기 까지 딱 12시간이 걸렸습니다. 대도시 씨애틀을 들어가고 나가는 차량들이야 원래 많다지만, 서쪽으로 내둥 워싱턴 주를 다 내려가기까지 길이 모두 주차장으로 변신할 줄이야! 땅 넓은 나라라더니 찻길은 미어터지고 있었습니다. ‘아, 오늘이 추석인가? 아, 여기는 경부고속도로 서울 입구인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고, 스릴넘치던 나라 미국은 지루답답한 아메리카로 변신해버렸습니다. 길 위에서 가만히 앉아, 창 밖 농장의 말이 풀을 뜯고, 똥을 누고, 다시 풀을 뜯는 슬로우 무비를 몇 편이나 보았던지요.

아메리카의 변신은 거기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차막힘 + 막대한 이동 거리 때문에, 저희는 날마다 9시간을 차 안에서 보내야 했어요. 하지만, 잠시도 졸지 못했는데요. 미국이라는 낯선 공간이 주는 긴장 때문이었습니다. 지루하기는 한데, 긴장을 놓을 수는 없고, 뒤에서 아이들은 빽빽 거리며 난동을 부리는 통에 두 번째 날, 급기야 저는 아메리카에 있는 것인지 화성에 있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Going to Mars! 4시간을 길 위에 있었는데 휴게소도 식당도 만나지 못해 점심마저 굶게 되자 차 안에서는 온갖 외계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마지막 날 국경을 넘기 전에는 길에서 소형 자동차가 완전히 불에 타는 장면까지 목격했습니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처럼 차 전체에서 시뻘건 불꽃이 튀고, 시꺼먼 연기가 치솟고, 그 주변 들판으로 불똥이 팍팍 튀어 불길이 번지기까지 했어요. 막 불이 난 직후에 저희 차가 지나갔기 때문에 일단 무사 통과는 했지만, 꽉 막혀 있던 차들 위로 불똥이 떨어질까봐 그 길 위의 모두가 벌벌 떨었답니다. 운전자는 차 밖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고, 저 멀리서 소방차 오는 소리가 들렸으니 모두 무사하셨으리라. 심장을 쓸어 내리면서 캐나다 국경을 넘었습니다. 차야 막혔지만 살아서 돌아가는 게 어디냐. . . @.@;;

신비로운

사실 여행의 맛이야, 떠나기 직전에 극대화되는 법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르셀은 기차역에 나가 출도착 시간표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기쁨을 다 맛보곤 했었습니다.(마르셀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하지만, 마르셀은 실제 그 장소에 가서는 큰 실망을 맛보지요. 안내 책자에 실려있는 설명, 여행 엽서에 실려있는 각종 사진을 통해 그 장소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정작 도착했을 때에는 시근퉁해진 겁니다. 계획과 예상이 없이는 출발도 어렵지만, 바로 그 예측이야말로 여행 최대의 난관인지도 모릅니다.

허나, 아무리 상상해도 그 이상의 것이 여행에는 있는 법! 출발 직후의 차막힘이 그러했고, 도착 한 오레곤 주의 서해안이 딱 그랬습니다. 그곳에서는 해변이 끝도 없다는 말로는, 그 정경을 담은 사진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대기 때문이었습니다. 뜨거운 여름 햇살과 차갑고 강렬한 태평양의 바람이 만드는 뿌여잡잡한 바닷가의 분위기라니! 제가 상상했던 바다의 이미지를 깨는 압도적인 스케일이 거센 바람 속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분명 휴가지일 텐데 한 없이 이어지는 해변에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저희 모두는 이 신비로운 서해 바다 풍경에 빠져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차를 잘 타고 다녔냐구요? 진흙놀이, 소꿉놀이, 그림 그리기 놀이, 만화 영화 보기, 그리고 최후로 두 팔로 풍차를 돌리며 치고받기까지! 다채로운 놀이, 낮잠, 다툼으로 계속 바빴습니다. 그래도 자동차 여행의 피로를 순식간에 날려버린 사건이 있었어요. 바로 바다사자!! 저희는 바다사자가 둥지를 튼 동굴에 내려가 보았답니다. 저는 포효 하면 사자나 호랑이를 생각하곤 했는데, 바다사자도 역시 사자였습니다. 동굴 안이 쩌렁쩌렁할 정도로 울림이 큰 쇳소리를 내시더이다. 관광객들이 아주 멀리서 지켜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였기 때문에 망원경으로 관찰했지만, 현서 은서는 바다사자의 위용에 정말 놀랬답니다. 그리고 반했죠! 매끄러워 보이는 털빛! 이 큰 바다를 자기 집으로 삼는 대단함! 이토록 근사한 바다사자를 만나려면 이렇게까지 차를 많이 타야하는구나. . .라는 깨달음까지 얻었답니다. 흑돔 고래도 많이 만났는데 물을 뿜는 등짝만 겨우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바다사자의 감동에는 못 미쳤던 것 같아요.

놀랄만한

미국 국경을 통과할 때의 일입니다. 국경을 통과하기가 워낙 어려웠던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도 잔뜩 긴장을 했는데요. 근엄한 표정으로 저희 여권을 심사하는 심사관 앞에 갑자기 은서 현서가 두 손을 높이 들더니, 억지 눈웃음을 잔뜩 짓기 시작했습니다. 옆 창구에서 여권에 뭔가를 빵빵 찍고 있는 그들 모습을 관찰한 뒤, 둘이서 쑥덕쑥덕 의논하더니 자기들도 도장을 받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습니다. 황당해하는 심사관과 그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저희. 약 10초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결국, 심사관은 절대 웃지 않으려고 작심한 표정으로 “Okey!”라고 한 뒤, 네 손등에 입국 도장을 꾹! 꾹! 꾹! 꾹! @.@ 국경을 통과하는 방법 중에 ‘애교’가 있다니, 오!!

사실 국경 심사처는 그리 유쾌한 장소는 아닙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둘 혹은 세 사람의 심사관이 바쁠 것 하나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여권을 뜯어보고 있는 걸 지켜보자면, 그냥 만사 억울하고 피곤해집니다. 게다가 벤쿠버 쪽에서 미국으로 입국하는 이 국경 검문소에는 화장실이 남녀 통털어 하나 밖에 없고요. 심사를 위한 긴 줄, 심사료를 내기 위한 긴 줄, 그보다 더한 화장실 줄. 그런데 이 화장실 앞에서 귀인을 만났습니다. 춤 추고 떠드는 은서 현서를 귀엽게 여긴, 한 중년 부인이 저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어요. 한국에서 왔다, 벤쿠버에 살다가 곧 돌아간다, 아이들은 쌍둥인데 춤추는 걸 좋아한다 등등 이야기하다가, 그럼 당신은 어디서 오셨어요? 여쭤보니까, 스위스에서 오셨다는 군요. 제가 딱 지난 주에 스위스 출신으로 독일어로 작품을 쓴 로베르트 발저의 짧은 글을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요.(http://qmun.org/?page_id=534&uid=1503&mod=document) 제가 발저를 좋아하고,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읽었다니까 눈이 탁구공만큼 커지시는 거예요.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라며 반색을 하시는 겁니다.

그때부터 화장실 앞에서 로베르트 발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힘들게 글을 쓰며 살았던 것과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마지막에 야곱 폰 군텐이라는 주인공이 사막으로 나아간 결말의 흥미로움, 그리고 발저가 눈밭에서 객사하기까지의 고생담도요. 제가 번역한 글은 발저가 반 고흐에 대해 썼던 감상문이었는데요. 이 부인은 그 글도 알고 계셨습니다. 발저가 태어난 고장 스위스 비엘(Biel)의 풍경 묘사에서부터, 당신도 고흐의 그림을 보러 다녔다는 이야기까지. 저는 미국 국경 화장실 앞에서 발저의 친구를 만난 듯 했습니다. 발저에게는 길이야말로, 산책이야말로 글쓰기의 원천이었는데요. 발저와 함께 국경을 넘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들러 2000km 대장정을 마치고 벤쿠버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벤쿠버도 시원한데 어딜가~’ '낯선 곳이라니 이 아이들을 데리고?' 하고 있었는데요. 신비로운 이 해안을 보고 난 뒤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곳이, 몰랐던 일이, 많고도 많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이 글의 제목을 Going West [1] 이라고 붙여봅니다. ^^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