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7.27 수업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7-30 16:08
조회
589
이번 주에는 『안티 오이디푸스』 3장의 9절 ‘문명 자본주의 기계’와 10절 ‘자본주의적 재현’, 그리고 11절 ‘마침내 오이디푸스’ 까지를 읽고 수업을 들었습니다.

우선 채운쌤은 ‘욕망-기계’와 ‘욕망하는 생산’이, 욕망이 배치에 의해 작동하는 것임을 함의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여기서 선험적인 것, 원래 주어진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영토 기계와 전제군주 기계를 분석하는 것도 다른 사회체에서의 욕망의 배치를 보기 위함이었겠습니다.

-문명 자본주의 기계, 흐름의 잉여가치와 공리계.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체에서 욕망은 어떤 배치들 속에 작동하고 있을까요? 9절 ‘문명 자본주의 기계’에서 들뢰즈·가타리는 본격적으로 문명 자본주의 기계 분석을 시작합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화폐가 자기증식을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화폐는 있었고, 시장도 있었으며, 임금을 지불받는 노동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일반화된 탈코드화로서의 자본주의는 자본에서 잉여가치가 나온다는 전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맑스의 (저만 모르는)유명한 공식 “M-C-M’”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이제 자본은 혈연자본이 되고 가치는 화폐로부터 생산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변화를 코드의 잉여가치에서 흐름의 잉여가치로의 전환으로 보았습니다.

전제군주 기계를 예로 들었을 때, 전제군주는 사, 농, 공, 상과 같은 신분제도라는 코드로부터 잉여가치를 획득합니다. 신분제도라는 코드의 작동을 통해 세금을 걷고 잉여가치를 획득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반대로 일반화된 탈코드화 위에서 흐름들로부터 가치를 획득합니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된 것들을 다시 코드화하지 않고 탈코드를 일반화하며, 이러한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우발적인 결합을 통해 설립되고 기능합니다.

자본주의는 화폐의 탄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화폐의 탈코드화와 관련됩니다. 자본주의의 화폐는 다른 시대의 화폐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고대에 화폐는 코드화된 것이었습니다. 금, 은, 조개 등의 화폐는 서로 다른 코드를 지니고 있어서 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은으로 살 수 있는 것, 조개로 살 수 있는 것이 각각 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화폐는 탈코드화된 것으로,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역으로 다른 모든 것들의 가치를 매깁니다. 이때 부富는 탈코드화 되어 화폐로 환원됩니다. 이전에는 땅을 많이 가진 사람, 가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비단을 많이 가진 사람 등 다양한 코드를 지닌 부자가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논을 많이 가진 사람의 부와 많은 음원의 저작권을 가진 사람의 부는 교환가치에 의해 환산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화폐의 탈코드화와 함께 노동력의 탈코드화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신분제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이뤄졌지요. 기존의 백성들이 어찌되었든 땅에 붙어서 먹고살 수 있었다면, 신분해방이 가져다 준 자유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합니다. 맹자는 노인, 여성, 아이들을 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 왕도정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들을 평등하게 대우하죠. 이제 이들은 모두 땅으로부터 탈영토화되고, 신분으로부터 탈코드화 되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새롭게 탄생합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을 인물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의 흐름으로서 다룹니다. 자본은 노동자의 인격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몇 명을 고용한 것인지, 기계를 쓸 것인지 인간을 쓸 것인지와 같은 것들을 문제 삼을 뿐입니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체가 수행했던 역할은 서로 관련 없는 것들을 연결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코드화에서 잉여가치를 획득했습니다. 이에 비해 자본주의의 잉여가치는 흐름들로부터 생산되며, 흐름 자체가 생산에 복귀하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기계 역시 하나의 사회체인 만큼 흐름들을 관리합니다. 그러나 이전의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푸코는 이것을 ‘생명권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개별자들이 아닌 전체 인구의 흐름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전제군주 기계의 작동방식을 공포로 자본주의 기계를 냉소로 규정한 것과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제군주 사회체가 호화로운 형벌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백성들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과시하면서 이들을 코드화했다면, 자본주의에 와서 개인들에 대한 통치나 관리는 비가시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훨씬 더 미세하고 세밀한 것이 되었죠. 군주의 법을 모독한 악랄한 범죄자를 광장에서 처벌하는 방식에서 이제는 흐름에서 이탈하는 것을 가두고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인구의 흐름이 더 큰 생산성으로 복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가 흐름에 규칙을 부여하는 방식을 ‘공리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체에는 화폐에 의한 추상량들이 흘러 다니는데, 이 추상량들을 가로지르는 규칙이 공리계입니다. 가령 먹고 살기 위해서는 노동을 팔아야 한다거나 어떤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흐름들이 자율적으로 관리되도록 하는 최소한의 아웃라인,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일한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와 유일한 욕망인 자본의 욕망

그렇다면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자본주의 기계의 배치 속에서 어떤 욕망이 생산되고 있을까요?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체에는 단 하나의 계급만이 존재합니다. 바로 자기 향유와 아무관련도 없는 목적들을 위해 잉여가치를 흡수하고 재생산하는 부르주아 계급이죠. 부르주아의 욕망은 곧 자기증식을 향해가는 자본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기계가 생산해내는 욕망은 자본의 욕망이며, 이러한 욕망이 자본을 끊임없이 증식시키면서 자본주의 기계를 매순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적어도 두 개의 계급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 공리계의 관점에서는 오직 하나의 계급만이, 보편주의적 소명을 지닌 부르주아계급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부르주아를 “가장 천한 노예보다 더 천한 노예”, “굶주린 기계의 우두머리 종”, “자본을 재생산하는 짐승”, “무한 부채의 내면화”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건희 성매매 사건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그런 지점입니다. 이건희의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욕망에 대한 어떤 윤리적 역량도 갖지 못한 부르주아의 천박함이며 노예성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프롤레타리아는 어떨까요? 프롤레타리아는 ‘이해관계’라는 애매한 차원에서 부르주아와 대립하지만 공리계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부르주아와 같은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리계를 벗어나지 않은 채, 부도덕한 자본가를 비판하거나 자본의 공정한 분배를 말하는 것으로는 욕망의 차원에서의 대립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체의 계급은 자본의 재생산에 복무하는 노예-부르주아 하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주인조차 없으며, 지금은 다만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하는 노예들만 있을 뿐”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론적 대립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자본가와 분열자 사이에 있다고 말합니다.

자본의 충만한 몸 위에서 계급의 공리계에 들어가는 그런 탈코드화된 흐름들과, 전제군주 기표에서 못지않게 이 공리계에서도 해방되며, 이 벽과 이 벽의 벽을 가로지르고, 기관 없는 충만한 몸 위를 흘러가는 탈코드화된 흐름들 사이에 이론적 대립이 있다. 이론적 대립은 계급과 계급-바깥에 있는 자들 사이에 있다. (중략)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자본가들과 분열자들 사이에 이론적 대립이 있다고. 이 둘은 탈코드화의 층위에서는 근본적으로 친밀하지만, 공리계의 층위에서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다.”(안티 오이디푸스, 430)

채운쌤은 이와 관련해서 ‘어떻게 권력의 탈환이 아닌 방식으로 혁명을 말할 수 있을지’그리고 ‘어떻게 공리계 바깥을 상상할 수 있을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오이디푸스

자본주의 기계에서 드디어 오이디푸스는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전 수업에서 계속 확인했던 것처럼 원시영토 기계는 인칭 이전의 사회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끌어내는 것은 엄청난 무리수였습니다. 이때의 근친상간 금지는 결연과 확장 혈연을 통해 코드화를 지속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었죠. 또 전제군주 기계에서 근친상간 금지는 금지인 동시에 전제군주의 특권이었습니다. 전제군주가 초코드화된, 기표의 사슬에서 이탈한 기표가 되기 위해서는 근친상간을 통해 직접혈연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에도 근친상간은 욕망되고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마침내 문명 자본주의 기계에서 오이디푸스는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라고 명명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가족의 사유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푸코는 19세기 부르주아가 형성되는 과정에 몇 가지 캠페인이 있었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푸코는 이러한 캠페인이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부르주아적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그 과정에는 정신분석의 담론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습니다. 그 캠페인 중 하나는 아이들의 신체에 대한 부모들의 감시였습니다. 이불을 들춰서 수음을 하는지 확인하는 등의 방식으로 아이들의 신체와 성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정신분석이 이런 방식으로 아이와 부모의 신체를 지나치게 밀접해지게 만들고, 그것을 전도하고 날조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정립했다고 푸코는 보았습니다. 여기서도 근친상간이 본래적인 욕망이 아니며, 부르주아적 가족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죠.

들뢰즈·가타리도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동하게 되는 과정에는 가족이 사회장으로부터 탈영토화 되는 과정이 전제된다고 보았습니다. 사회장과 가족의 외연이 같을 때, 가족은 그저 하나의 요소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회장으로부터의 탈영토화는 사회장 전체가 가족에 적용될 수 있을 조건이 됩니다. 이때 노동은 사회적 노동이 아니며 가족 내부로 이행하게 됩니다.

언뜻 보인 크고 넓은 것 대신, 더러운 작은 비밀뿐. 욕망의 파생물 대신, 가족주의적 복귀뿐. 탈코드화된 큰 흐름들 대신, 엄마의 침대에서 재코드화된 작은 개울들뿐. 바깥과의 새로운 관계 대신, 내면성 뿐.”(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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