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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생] 앨리스 먼로

작성자
선민
작성일
2016-08-20 17:14
조회
1003

[길 위의 생] 앨리스 먼로


  1. 터널 밖의 엘리스


쌍둥이를 낳고 폭풍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루하루가 이 입에서 저 입으로, 이 똥에서 저 똥으로, 이 잠에서 저 잠으로 숨 차게 돌아갔고, 책 읽고 세미나 하던 저는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너는 어쩌다 나에게 와서 내 모든 걸 잃게 하는구나!!”(『밀회』의 김희애 대사) 날마다 아이들이 저를 먹어치우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분명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이지만, 제 두 손에 달린 생존의 무게가 제 자존을 짓누르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루하루가 끝도 없이 검다” 이런 말을 일기장에 적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 터널이 저 만치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만 바라보던 두 아이는 어느새 많은 것을 스스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햇빛 속에 나와 있는 것만 같습니다.

자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소설가 프루스트가 자신의 인물들을 묘사했던 것처럼, 아이들의 얼굴 위로 모계와 부계의 혈육들 흔적이 펼쳐졌다 모이고, 흩어졌다 뭉쳐집니다. 프루스트의 말대로 인간은 시간이 만드는 예술품입니다. 이런 고상한 생각이 떠오르는 밤이면 채 털리지 않은 욕심 한 덩이가 불쑥 마음에서 튀어 나옵니다. 육아란 뭔가? 가사 노동이란 뭔가? 이런 문제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는 암울했던 시간을 복구하기 위해 허둥지둥 인터넷을 뒤지며 인생의 의미를 찾습니다.

앨리스 먼로(1931~)라는 작가와는 그렇게 만났습니다. 201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 캐나다 작가는 20살에 첫 아이를 낳은 뒤 세 아이를 기르고, 책방을 운영하고, 집안을 돌보면서도 글쓰기를 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글을 써야지 마음먹던 십대 시절부터 단 한 순간도 펜을 놓지 않았다고 하니, 일신의 문제(두 번의 결혼 생활과 네 번의 출산, 세 명의 아이들)나 사회적이고 세계사적인 분위기(여성의 불평등, 2차 세계대전 등) 속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또 그녀의 삶은 어떻게 문학이 되었는지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2. 친애하는 삶이여 

먼저 《파리 리뷰》에 실린 앨리스 먼로의 인터뷰(1994년)를 읽었습니다.(http://www.theparisreview.org/interviews/1791/the-art-of-fiction-no-137-alice-munro) 이 인터뷰는 『작가란 무엇인가 3』(다른, 2015)에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60대 초반의 먼로는 인터뷰 내내 명랑하고 당당했습니다. 대중에게 얼굴을 잘 내비치지 않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작품에 대해서나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 주저함없이 명쾌하게 답했습니다. 단편 소설 각각에 대한 설명은 읽어본 작품이 없어서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두 가지는 확실했습니다. 첫째, 먼로는 자신이 썼던 작품보다는 자신이 쓰고 있는 작업 방식에 더 의미를 부여합니다. 일주일에 7일, 매일 아침 8시부터 11시까지 글을 쓰고, 만약 쓸 수 없는 날이 예고된다면 미리 보충해서 글을 써 놓는다고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단편이라지만, 개별 작품 사이에는 잠시의 휴지도 두지 않았습니다. 날마다의 일과가 ‘쓰기’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뭘 그렇게 썼을까요? “난 저 사람을 모르지만,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어 죽을 지경이예요.” 인터뷰를 하러 뉴욕에서 온타리오의 시골마을까지 찾아온 사람들에게 먼로가 한 말입니다. 비가 오나 해가 뜨나, 여러 고양이에 둘러싸여서 타자기를 끼고 있는 동네 사람을 가리키며 말이지요. 대문을 열기만 하면 마주치게 되는 동네 사람들, 지방지 사회면에 실린 그렇고 그런 사연들, 산책길의 익숙한 풍경이 된 작은 가게들, 언제나 시야 앞을 어른거리는 언덕 위의 집들. 먼로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썼다고 합니다. 그것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상태에서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둘째는 먼로가 글감을 찾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저는 평범한 나날 그 어디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기로 했습니다. 매일같이 소설을 쓰는 데 왜 꼭 단편밖에 쓰지 않는지 그것도 궁금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작품집 『Dear Life』의 제일 마지막 편, 「Dear Life」를 손에 들었습니다. 먼로는 이 작품이 자전적 이야기라고도 했습니다. 작품 속 화자는 파킨슨 병을 앓았던 어머니, 자신을 심하게 때리면서 모욕 주었던 아버지, 매춘부의 딸이었던 유년 시절의 친구, 가족들이 살던 집에 얽힌 동네의 비화를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에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는 것도 잠깐 언급하고요. 하지만 화자는 이 단편적인 사건들 때문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지도, 최후의 교훈을 얻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 화자가 어떤 인간인지를, 즉 앨리스 먼로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도 못 찾았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딱히 관련도 없는 사건을, 누구나가 주변에서 겪고 있는 일을 통과해야지만 작가가 된단 말일까요? 저는 이 친애하는 인생(Dear Life) 앞에서 당황했습니다.

    3. 인생, 스컹크가 출몰하는 길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영어로 읽어서 그랬겠지요. 즉시 전자책 『디어 라이프』(문학동네, 2013)을 구입했습니다. 세상에!「일본에 가 닿기를」,「아문센」,「메이벌리를 떠나며」,「자갈」,「안식처」,「자존심」까지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역시 영어가 문제였던 겁니다.  「디어 라이프」보다는 주인공의 개성이 더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사건들을 겪는 인물들의 상황을 상상할 때마다 신선했습니다. 앨리스 먼로가 날마다 작품을 썼듯이, 날마다 그의 작품을 읽어도 질리지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 어째서일까요?

앨리스 먼로는 아무리 애써도 장편 소설을 쓸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단편들, 바로 여기에 앨리스 먼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작품 하나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자존심」입니다. 처음에는 이 작품을 성격과 운명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소설로 읽었습니다. 소도시의 부유한 은행장 얀첸은 사기를 당하고 횡령을 하고 쫄딱 망한 뒤, 집에서 한참 떨어진 작은 은행의 장으로 직장을 옮깁니다. 그의 딸 오네이다는 뜻하지 않게 자신의 대저택을 임대업자에게 넘기게 되고, 그가 저택 대신에 지어올린 아파트에 세입자로 들어갑니다. 화자는 오네이다의 청혼을 거절하자마자 그녀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얀첸이 굳이 일 없는 지방은행의 은행장직을 수락한 동기, 오네이다가 자신의 저택이 밀리고 아파트가 서는 것에 반대를 하지 못한 까닭, 화자가 오네이다의 청혼이 싫은 이유. 그것은 밝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목을 따라 이들의 ‘자존심’이 문제였다고 추정했습니다. 얀첸은 명예롭게 출퇴근하던 자신의 옛생활을 벗어던지지 못해, 오네이다는 여전히 상류층인양  따지거나 흥정하는 일에는 손을 안대려고, 화자는 비뚤어진 입 때문에 위축되곤 하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행간을 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딱히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었습니다. 「자존심」은 짧기는 해도 요약이 잘 안되는 작품입니다. 요약을 하려면 각 인물들의 상황을 추상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프루스트는 숨막히게 길고 복잡한 소설을 일생동안 썼지만, 그 작품은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얀첸, 오네이다, 화자가 서로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근거는 딱히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 사람의 인생을 소개하는 화자의 심중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듯 합니다. 사건들은 특정한 방향을 그리지 않고 서로 부딪치면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인물들은  서로에게 뜻밖의 손님인 듯 보입니다. 이 작품에는 세 사람을 한 시점에서 조망하고 묶어주는 시선(전지적 작가 시점)이 없는 것입니다. 글에도 온도가 있다면 「자존심」은 ‘미적지근하다’ 하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자전적 소설도 미지근했습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장면은 ‘자존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마지막 대목인지도 모릅니다. 오네이다와 화자는 쑥스러운 이별의 순간에 갑자기 스컹크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탁 놓고 한참을 웃습니다. 여기서 작품의 온도는 조금 따뜻해 집니다. 스컹크도 이들에게 손님처럼 다녀가는 거지요.  자존심과 운명 사이에는 스컹크도 있는 것입니다.

앨리스 먼로가 단편 밖에 쓸 수 없었던 것은 ‘인생’에 대한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읽은 몇 편의 단편에서는 아내의 배신, 형제의 죽음과 같은 충격적인 과거가 나오고 그것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기는 합니다. 그래도 현재는 늘 예고없이 찾아올 또다른 일들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먼로는 중심 사건을 세우고, 그 주변으로 인과의 사슬을 촘촘히 엮어야만 쌓아 올릴 수 있는 장편 소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단편만을 쓰고, 단편 하나하나 사이에 아무런 휴지도 두지 않았던 것은 인생을 수많은 일들이 중단없이 오고가는 길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생은 스컹크도 출몰하는 길입니다.

*

앨리스 먼로가 살면서 가장 좋았던 일로 꼽는 것 중 하나는 캐나다 동쪽 끝 빅토리아 섬, 빅토리아 시에서 첫 남편과 함께 서점을 운영했던 일이라고 합니다. 동네의 온갖 미친 사람과 여행객들이 하는 별의 별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어서 라고요. 내 성격, 내 의지, 내 꿈을 밀치고 들어오는 것들을 방어하려다 보면 몸을 웅크리게 됩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귀도 닫고 보면 세상이 깜깜해지는 거지요. 그렇게 터널 속에 갇히게 되나 봅니다. 앨리스 먼로가 일주일에 7일을 꼬박 작업한 이유는 자신의 인생에 더 많은 사건들이 들고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글쓰기란 자신과 세상을 딱 맞닿게 하는 방법이었고, 씀으로써 그는 자신을 더 열어나갔으리라 상상합니다.

** http://www.munrobooks.com/; 이 서점은 지금도 빅토리아 시내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도 손꼽힌다고 하고요. 아이들 책 코너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가 보고 싶습니다.

    **** 코너 안의 코너! 《짭쪼름한 영어의 맛》

제일 문제가 되는 단어는 Dear였습니다. Dear Life라니요? 저는 영어로 편지를 쓸 때 “친애하는 하동 선생님께”처럼 서두에 수신인을 향해 붙이는 말로 해석했습니다. ‘친애하는 삶이여’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니 형용사로 ‘값비싼’, ‘고귀한’의 뜻도 있었습니다. 『디어 라이프』를 번역하신 정연희 선생님 말씀으로는 ‘소중한 삶’, ‘값비싼 대가를 치루는 삶’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합니다.(역자 후기) 책 본문에서는 딱 한번 나온다고 하는데, 다행히 제가 읽었던 딱 그 한번이었습니다. ‘Just after my mother had grabbed me up, as she said, for dear life’(어머니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죽기 살기로 나를 낚아챈 직후에.)(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전자책, 186쪽)

오늘은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봅니다. ‘Skunk is one of my dearest friends.’(스컹크는 내 소중한 친구들 중 하나다)

전체 2

  • 2016-08-22 21:41
    얼마전에 모 출판사로부터 안팔리는 재고 도서를 학교 도서실에 기증받았답니다. 그 중에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이라는 제목의 앨리스 먼로의 책이 있었는데, 저자 이름을 보고는 '먼로라니~~풋'했던 기억이~~ㅋ. 그나저나 그 할머니 자글자글한 잔주름이며 보일락말락 미소가 정말 친애할 만하군요. 찾아서 열심히 읽어봐야겠어요~~^^

  • 2016-08-20 19:03
    1.뭔가 넉넉하고 여유 있는 글+_+ 2.캐나다 갔을 때 원서로 구입하려 했더니 번역된 걸로나 잘 읽으라는 누군가의 말씀에 그만 제자리에 꽂아두었던, 그 앨리스 먼로로군요. 3.확실히 영미권 단편소설들은 명확하게 서로 포개지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듯. 그런 중에도 그 작가의 특징적 테마를 살펴보는 일은 재밌는 작업일 듯해요. 4.친애하는 하동 선생님이라니...풋- 5."스컹크는 내 소중한 친구들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