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강좌

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 <1강> 니체'와' 철학하기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9-22 16:10
조회
728
드디어 기다리던 니체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상외로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요, 채운쌤의 틈새시장 공략(월요일에는 보통 강좌를 잘 열지 않는다고 합니다.)은 성공적(!)이었네요. 그리고 놀랐던 것은 개강 당일에 신청하신 분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인데요, 이 놀라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오신 분들 모두 끝까지 함께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첫 날인 만큼 채운쌤은 주로 니체의 연보를 따라가면서 니체가 누구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와 만나야 할 것인지에 관해 강의하셨습니다. 우선 채운쌤은 니체가 주는 ‘불편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소개 중에 수정쌤도 말씀하셨지만 니체의 글은 우리를 편안하게 놓아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니체의 글이 어렵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채운쌤에 따르면 니체는 설득하는 글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독자를 설득하려는 의지는 없습니다. 니체는 칼 푹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편을 드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으며, 그러한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낯선 식물을 대할 때 갖게 되는 어느 정도의 호기심과 비판적 저항,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나를 평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자세이다.”-1888. 카를 푹스에게 보낸 편지

니체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독자에게 자기편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가장 혐오한 것이 바로 편을 짓고 ‘우리’이기를 강요하는 무리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니체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니체는 고귀한 사람은 존경할 만한 사람만을 적으로 용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까이 하는 것들만큼이나 적으로 삼는 것들 역시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들을 드러내 줍니다. 우리는 우리와 무관한 어떤 것을 우리의 진정한 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시골 성직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 ‘꼬마목사’라고 까지 불렸던 니체는, 그랬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강하게 기독교적인 정신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자신이 진정 적으로 삼은 것에 대한 비판은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며,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에 진정으로 직면하는 것은 곧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해체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니체가 편을 짓는 자들을 혐오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적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그러니까 그것을 적으로 삼고 있는 자기 자신에 직면하는 것을 무리 속에 숨는 방식으로 회피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니체와 만날 때만큼은 니체가 주는 불편함을, 불편함을 느끼는 자신을 회피하지 않고 바라봐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니체의 적이 되던지 친구가 되던지 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니체의 삶은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과정이었습니다. 니체는 가장 강하게 자신을 끌어당겼던 것들과 결별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니체는 우선 기독교도로서의 자신으로부터 떠납니다. 당시 니체에게 기독교를 버린다는 것은 곧 세계를 바꾸는 문제였을 것이라고 채운쌤은 말씀하셨습니다. 이후에 청년 니체는 비스마르크에 감동을 받고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만나며 ‘독일적인 것’에 심취합니다. 그리고 곧 그것과도 결별하죠. 그리고 1879년부터 죽기까지 니체는 병으로 인해 요양지를 찾아다니는 방랑생활을 하게 됩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낙타-사자-어린아이로 이어지는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서 말하는데, 채운쌤은 들뢰즈를 인용하시며 “이 세 변신은 무엇보다 니체 자신의 저작들이 변환되는 계기이자, 니체의 삶과 건강의 단계들을 의미한다”(채운쌤 강의안 2쪽)고 하셨습니다.

낙타는 스스로 짐을 짊어지는 정신을 나타냅니다. 낙타는 “해야 한다”에 지배되는 정신입니다. 그는 온갖 당위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스스로 짐을 짊어집니다. 즉 외부의 척도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가 낙타인 것이지요. 채운쌤은 낙타의 짐이란 사실 다른 누군가가 낙타에게 부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낙타가 자신의 일부로 달고 있는 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낙타와 같은, 당위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올바르고 정의로운 것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당위를 욕망하게 된 것일 뿐이지요. 사람들이 도덕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습관적으로 반복되어 그것을 욕망하게 될 때입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도덕이 공리에 의해서 생겨난 자명한 개념이 아니며, 최초에 폭력이었던 것이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어 원래 있었던 것처럼 될 때 도덕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임을 밝힙니다.

낙타는 실상 당위란 자신이 스스로가 원해서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임을 인식할 때 사자로 변신합니다. 사자는 “해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원한다”라고 말하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사자는 이러한 선택지 앞에서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정신이 아닙니다. 사자는 이러한 선택지 자체를 부정합니다. 하도록 강제된 것과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의 구분 자체가 허위라는 것이죠. 사자는 어떤 끔찍한 상황이나 결과도 자신이 원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함을 지닌 정신입니다. 채운쌤은 니체가 사자를 말하며 선택지 앞의 삶을 거부할 때 ‘우리는 정말 자유를 원하는가?’라는 들뢰즈와 스피노자의 질문과 공명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자유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예속 안에서, 무리 속에서 불화하지 않는 삶을 원하고 욕망하는지도 모릅니다.

채운쌤은 사자가 ‘부정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자는 낙타가 짊어진 가치규범들을 파괴하고, 그러한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를 ‘강탈’합니다. 사자는 아직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사자의 파괴와 강탈이 필요합니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한 개인이 진정한 고유명을 얻는 것은, 가장 엄격한 몰개성화가 실행되고 난 후에 개인을 관통해서 지나가는 다양체들에 개인이 열릴 때”(<천개의 고원> 80쪽)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낙타가 스스로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낙타의 짐 벗기는 자기화한 가치규범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기극복, 자기해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감이 오지만 항상 이 다음이 어렵습니다. 니체는 사자 다음에 오는 어린아이로서의 정신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를 획득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거룩한 긍정은 또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계속해서 붙들고 가야 할 질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 변신이 니체의 삶, 그리고 니체의 저작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청년기의 니체는 낙타와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당시의 그는 국가와 문화를 동일시하고 독일적인 것에 심취합니다. 니체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멀리하고 생리학 화학 등 새로운 학문들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여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을 쓰며 낙타로서의 정신으로부터 떠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변화가 그의 글쓰기의 변화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글에서 다루는 내용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니체에게 글의 형식은 내용을 담는 단순한 틀이 아닙니다. 그의 사유가 변하면 그의 문체도 변합니다. 바그너와 결별한 니체는 아포리즘이라는 새로운 문체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변화와 동시에 두통과 위통, 시각장애, 언어장애 등으로 고통 받기 시작하는데 병은 니체의 변신의 핵심적인 원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채운쌤은 니체의 병을 흔히 생각하는 ‘철학적 영감의 원천’같은 것으로 나이브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철학자를 떠올릴 때 병들고 나약한 신체에 깃든 날카롭고 예민한 정신을 상상하는데 이것은 신체와 정신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낡은 사고에 의해 생겨난 표상일 것입니다. 니체는 병을 통해 건강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습니다. 니체에게 병이 하나의 선물이었다면 그것은 병이 기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관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채운쌤은 건강이란 병이 없으면 체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체는 병을 통해 새로운 건강을 획득하는데, 이것은 ‘건강’이라는 동일한 표준에 맞추는 우리의 건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니체는 병을 겪으며 건강함과 병듦은 모두 하나의 경험이며 그러한 상태를 경유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건강임을 인식합니다. 신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평생 건강하게 살아온 신체는 자신의 건강을 재생산하는 것들 밖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한 신체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병든 니체의 신체는 건강한 상태와 병든 상태 모두를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더욱 유능한 신체인 것이죠.

그러므로 어떤 통찰이라는 것은 어떤 경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채운쌤은 무언가를 했을 때 알 수 있는 게 있고, 그것을 하지 않았을 때 알 수 있는 게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동등한 것이죠. 통찰은 경험 자체에서가 아니라 다른 경험들을 횡단하고 경유할 때 얻게 되는 것이겠죠. 채운쌤은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완벽한 나를 만들고 그것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떠나고 다시 만나는 과정 속에서 나‘들’을 만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주에는 나눠드린 채운쌤 강의안의 다루지 못한 부분을 마저 하고, <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 고찰>을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강의 끝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지는 관계로 다음 주 부터는 7시 30분이 아니라 7시 20분에 수업을 시작합니다.

+ 다음 주 간식은 윤몽 누나와 제가 맡았습니다.
전체 3

  • 2016-09-24 03:11
    니체수업은 완전 멋진 말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건강과 병에 대한 얘기는 특히 감동적이었고요.. 아무튼 건화야, 우리 사자가 되자^^*

    • 2016-09-24 12:10
      윤몽의 댓글에 부끄러움은 나의 몫..... '멋진 말'에 꽂혀가지고는 오래 못간다 몽아. 건화랑 제대로 공부해보그라.

  • 2016-09-25 22:42
    오호^^ 요즘 후기 읽는 재미에 쏙!쏙!빠짐ㅎㅎ(청소세미나 후기 쓸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쓰셨나 빼꼼 들여다 본 후의 자세) 생각하며 읽었어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