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9월 19일 후기

작성자
현옥
작성일
2016-09-25 10:47
조회
3442
디가니까야 1품 2,3장 후기

2장 ‘수행자의 결실에 대한 경’에서 아자따삿뚜왕이 세존에게 한 질문-세상에는 수많은 직종의 직업들이 있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각각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능의 결실로서 자신은 물론 처자와 부모와 친지들을 부양하고 살아가고 또한 수행자들을 위한 보시를 행한다. 수행자들에게도 이처럼 현세에서 눈으로 확인되는 결실이라고 할 만한게 있는가? -은 ‘공부’라는 길에 서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존의 말씀처럼 세상은 ‘번잡하고 티끌로 가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티끌과 번다함 속에는 소소한 기쁨과 재미라고 할 만한 것들도 꽤 많이 들어 있고, 게다가 약간의 제정신만 차린다면 그럭저럭 좋은 사람으로 주위와 화목하게 살아갈 수도 있는데, 우리는 왜 굳이 ‘공부’라는 이 길을 가고자 하는가, 혹은 가야만 하는가?

세존은 현세에서 부림을 당하며 자유롭지 못한 노예나 농부가 출가하였을 때처럼 확연히 눈에 보이는 결실도 있지만, 그보다는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잘 길들이는(이건 자신을 포함한 중생의 삶을 통찰하고 그들 각자의 처지에 맞게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일 듯) 명지와 덕행을 갖추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우월하고 탁월한 수행자의 결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런 밝은 지혜와 덕행을 갖추기까지는 까다로운(짧은 크기, 중간 크기, 긴 크기의) 계행을 지키고, 부단히 새기며 알아차리기 위한 각고의 과정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뭔가를 안 것 같아도 탐욕과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의심에서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한은 아직 앎이 아니라고도 하시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경을 읽으면, 먼저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떠오르고, 거기까지 가는 길이 참으로 ‘어렵기도 하구나,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다음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세존은 이러한 의도나 그에 따른 걱정들이 결국 우리가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삶을 방해하는 장애로 작용하여,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방황하도록 한다고 하시네요. 이 말씀을 새기며 생각해 보니 정말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의 이미지의 언저리를 돌면서 혹은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궁리와 염려로 보내고 있는게 분명해 보입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제대로 충분히 산다는게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얘기하는 걸까요?

3장 ‘암밧타의 경’에서는 자신의 앎에 대한 자만으로 가득차 있는 교만한 바라문 암밧타에게 가차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대가 ‘나는 나의 스승과 더불어 그 성전을 배운다’고 해서 그대가 선인이 되거나 선인의 경지를 향해 걷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요. “그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마음이 유연하고, 그 마음이 장애가 없고, 그 마음이 고양되고, 그 마음이 믿음으로 가득차는 것을 알았을 때(p230)” 그때라야 비로소 수행의 길에 제대로 걸음을 내딛을 수가 있다고 말입니다.

‘디가니까야’는 1500페이지가 넘는, 여태 접해본 텍스트 중에서 가장 두껍기도 하지만 참 아름다운 텍스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랄까 ‘깨알같다’는 느낌이예요.^^ 수경쌤 말씀마따나 계행의 부분들을 비롯해서 꽤 많은 부분들이 무한 반복되고 있고, 어찌보면 다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 같은데도,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말씀들이 놓여진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조금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요.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도 똑같지 않나요? 하루를 사는 동안에 뭐 그렇게 색다르고 신기한 일이 있겠어요? 밥먹고 잠자고,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어제와 비슷한 일들을 하면서 하루가 지나가죠. 그러나 우리의 신체는 단 한 순간도 똑같은 적이 없고, 무한하게 다른 것들과 늘 다른 방식으로 접속하고 있다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 신체는 엄청나게 다양한 개체들로 구성된 ‘다양체’이고 끝없이 生生不息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어제와 똑같아 보이는 한 순간도 사실은 같은 순간일 수가 없는 것인데, 우리가 어제와 똑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어제와 같은 욕심, 기대, 전제, 목적...) 생생불식하는 현재를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죠!

날마다 ‘디가니까야’를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 중세의 현인들처럼 텍스트가 신체에 알알이 새겨질 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리라는 우리의 암묵적인 합의가 분명히 어떤 효력을 발휘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 너무 더디고 어수선한 후기를 올려 죄송합니다요. 꾸벅! 아무래도 제가 정신이 덜 돌아온 것 같아요... 속히 정신을 차리겠습니다
전체 1

  • 2016-09-25 10:54
    암밧타의 경 읽으면서,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은 정말 어찌할 수가 없는 거구나, 저렇게 많이 공부하고 많이 아는데도 그게 다 쓰잘 데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쁘다고 붓다 앞을 떠난 뒤 돌아가서는 또 다 안답시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겠지... 아직 단 세 경밖에 안 읽었지만, 제일 많이 기억에 남는 사람입니다... 자, 우린 일단 우리 방식으로 소박하게 읽고 써보아요. 월요일에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