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예술톡톡 문학2. 끝없이 배우고, 끝없이 미끄러지고 - 괴테『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10-19 13:28
조회
506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유명한 ‘그 괴테’의 소설이라니, 오오, 기대를 했습니다만, 다분히 실망스럽게도, 강의의 시작은 “괴테의 소설은 재미는 없습니다. 그는 이야기에 능한 작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라는 말이었어요. 사실 수업 전에 살짝 초반부만 맛을 봤던 소설 속에서, 웬 다 큰 남자가 연극에 쓰이는 인형들을 애지중지하면서 어릴 때의 추억들을 줄줄 늘어놓고, 애인에게도 인형들을 소개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이게 뭐지, 했던 참이었거든요. 첫인상만 가지고 소설 전체를 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괴테에서 시작된 소수의 고전주의 교양소설이 낯설고 심지어 하찮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특히 ‘철들지 않았으나 그 사실을 자기만 모르는 어린아이의 흥분과 열정의 도가니처럼 보이고’(제 느낌도 딱 이랬어요!), ‘어쩐지 성장이나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조야한 피카레스크 소설(악당소설, 건달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걸 쿨하게 인정(!)해 놓은 수경언니의 강의안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어요. 상황 파악을 못하는 주인공(빌헬름)이 혼자서 진지하고, 대개의 에피소드는 뭔가 일어날 듯하다가도 흐지부지 끝나거나 비약해버리곤 한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교양소설의 대명사격(확실히 주인공이 교양을 함양하게 되고, 독자들에도 교양을 함양하게 하는 온갖 다양한 배움의 기회들로 가득 찬 소설이긴 하다네요)불리고, 20세기의 많은 작가들에게는 엄청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정말 무식한 저도 알만큼 유명하니까요. 그런 것엔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요. 그것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습니다.

 

루카치라는 소설이론가이자 비평가인 사람이 『소설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내용을 들었는데요. 그는 소설의 생기기 이전의 서사시(오딧세이아, 일리아스)나 소포클레스의 비극들이 소설로 바뀌는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을 꼽았대요. 서사시의 주인공들은 운명이 보장해주는 모험을 하고 나이가 늘어감에 따라 모험 속에서 지혜와 성공을 얻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어요. 하지만 근대소설의 주인공들은 새롭게 세분화된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집과 고향을 떠나서도 ‘모험’이라기보다는 ‘방황’에 가까운 것을 겪게 돼요. 목적지 없이 떠돌고, 소외된 채로 좌절하고, 거꾸러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기도 하는 거죠. 18세기의 독일은 사회가 분화되고 개인에게 다양한 직업들을 가지고 사회에 시민으로 종사하기를 요구했어요. 그 사회의 요구를 거절하고 떠나서 목적지 없이 방황하는 자의 자취들을 저같은 독자들은 별 납득이 없이 시큰둥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시간은 흐르는데 빌헬름은 성장하지도 않고 이야기엔 진척이 없어요. 도대체 이 이상한 소설은 무엇을 향하는 걸까요.

이 작품은 총 9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5부까지가 ‘연극적 사명’에 해당하는 플롯이에요. 어릴 때부터 인형극을 좋아하던 빌헬름이 실연 후 아버지 사업의 수금(돈 걷는 거요!)차 길을 떠났다가 사업과는 멀어지고 마침내 연극을 향한 길을 걷게 된다는 얘기요. 젊은 시절의 괴테였다면 예술가로 성장하는 청년을 멋지게 그려냈겠지만, 프랑스 혁명을 통과하고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 고전주의 시대에 진입하면서 괴테는, 연극을 벗어나 길 위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며 온갖 인간을 만나는 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총체적인 교양소설’을 쓰게 돼요. 그가 지나게 될 여러 과정 중 하나인 연극시대 속에 머무는 동안, 사건은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않은 채 지지부진하게 나열만 돼요. 많은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지만 그저 그럴 뿐, 모든 것들이 그냥 ‘흩어져버린다’고 수경언니는 묘사했어요. 작품의 첫 문장 “시간이 매우 오래 흘렀는데도 연극은 좀처럼 끝나지 않고 있었다”는 말처럼 6부까지 이어지던 연극이 끝날 수 없었던 것은 6부의 수기를 지나 7~9부의 ‘수업시대’를 지나가는 사이에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져 결말을 맺게 되는 것과 연결시켜 보면 괴테의 노림수임에 분명합니다. 괴테가 과감하게 선택하고 나열한 다양한 ‘허송세월’의 순간들을, 작품 속 뱃놀이 장면에 등장하는 신사가 빌헬름에게 던진 말이 주석처럼 설명해주죠. “많은 사건들이 처음에는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중 대부분이 그 어떤 공허한 일로 끝나버리지 않던가요?” 결국 괴테는 이렇게 공허하게 끝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 것이고, 그 답은 6부 이후에 제시가 돼요. 즉, 중요한 것은 사건 하나하나가 아니라 그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일이라는 것, ‘수업시대에서 중시되는 것은 각 에피소드에서 배움을 추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들 사이를 고리들로 연결해내는 일이라는 것’이죠. “연극의 단계를 떠나 더 넓은 관점에서 세계와 사물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을 때라야 이야기는 비로소 종결될 수 있고, 빌헬름은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강의안)”습니다.

‘연극의 시대’를 지나 도달한 ‘수업시대’에서 비로소 모든 것이 마무리가 됩니다. ‘탑의 모임’이라는 공동체가 있어서 이제까지의 빌헬름의 여정을 따라오며 관찰하고, 사람을 보내어 문제를 일으키고 해소하는 둥 적절한 수업을 진행하였으며, 그 마침을 고하는 방식으로 그에게 ‘수업증서’를 건넨다는 것이죠. 오딧세우스처럼 모험을 통해 성숙‧발전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는 주인공이 그냥 흐지부지 명예를 얻으며 결말로 이끌려가는 진행에 저처럼 독자들은 께름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수경언니는 이 진행이 괴테가 작품전체를 섬세히 계산해 고안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해요. 빌헬름이 분석한 햄릿의 상황이 수업증서 수여 장면 속에 고스란히 포개진다고요. 햄릿은 자기가 겪는 것에 어떤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작품이 계획으로 차 있으므로, 그는 그 필연적 귀결에 따라갈 수밖에 없죠. 빌헬름도 이 두루마리 양피지, 수업증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가 만난 모든 사람과 사건들이 적힌 수기가 ‘빌헬름의 수업시대’이며, 그가 그 수여증서를 받았던 그 방에서 목도한 그것이 바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가 되는 것이죠.

‘탑의 모임’을 통해서 그가 이런 명예를 얻었던 결말을 생각해 보면, 괴테는 시민사회를 떠난 공동체가 있지 않고서는 이런 사건들의 연관성, 사물의 진실과 이면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흩어지던 사건들과 허송세월의 연극시대를 지나며 그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공동체로 연결될 수 있고요. 빌헬름이 이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성장과 조화를 통해서이고, 그것을 이루는 핵심이 공동체에 귀속되는 것, 개인을 소외시키지 않는 공동체, 탑의 모임을 만나서 수업을 받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이에요. 시민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로 찾아야 할 필요를 만났던 그 시대에 괴테는 근대와 근대인에 대해 규명하고 그 정체성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던 것이죠. 집 떠난 빌헬름의 시간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그가 조화로운 교양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수렴점인 탑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탑의 모임에게서 수업증서를 받는 것이 마침표를 찍는 일(end)이었던 것이죠.

우리의 시대는 더 이상 우리에게 성숙을 권하지 않죠. ‘동안’과 ‘신상’을 외치는 일상을 봐도 그렇고, 영화나 드라마의 최신 트렌드 - 스핀오프, 프리퀄의 다양한 속편들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들도 그렇고요. 끝없는 계속은 마침(end)보다는 이어짐(and)만을 말할 뿐입니다. 이런 것들에 익숙한 우리에게 마침을 말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겼던 마지막 소설가의 소설이 낯설고 불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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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0 12:27
    미리 예고, 내일 있을 조이스 수업에서는 아름답지만 낯설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성장' 그 자체를 다루는 문장들을 만납니다. 성장소설이라고 해서 익숙하고 모두가 다 아는 그런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하신 분들, 깜-딱 놀라실 거예요. ㅎㅎ 괴테 작품을 통해 이미 맛보셨죠. '성장'은 우리가 아는 '그 성장'이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