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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4강> 후기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10-21 05:01
조회
503
이번 주엔 지난 시간에 하다만 이야기를 마저 하고(사실은 거의 그 이야기를 주로 하고) 지나갔어요.

니체의 쇼펜하우어에 대한 회고를 보면, 니체는 20대 중반의 불안하고 우울한 날들에 쇼펜하우어를 읽는 것을 통해서 그 시기를 넘어갈 수 있었대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접하는 순간, 일종의 비역사적 순간을 경험했다고요.

니체가 살던 시대를 먼저 살펴보면 19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으로 많은 희생으로 공화정의 초석이 마련됐고, 독일은 혁명이 좌절되고 이후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 전쟁의 승리 등에 힘입어 유럽의 열강으로 부상합니다. 하지만 독일의 여론은 모든 전쟁의 이면인 폐허와 죽음을 외면하고, 전쟁이 남긴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그 승리를 문화적인 자부심으로 슬쩍 치환해버립니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생각들이 바뀌던 시대에, 신의 자리를 인간이 대체한 채 원숭이로부터 이렇게 위대한 인간이 나왔다는 천박한 과학주의만이 가득했던 것이에요. 오히려 니체는 같은 진화론을 접하고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당시 사람들의 이런 태도들을 니체는 지식인의 조증이자 문화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진단했어요. 지난 시간에도 보았듯 니체는 당시의 사회에서 어리석은 국가주의와 기독교의 타락, 문화의 속물교양주의를 비판했습니다(니체는 문화를 독특하게 사유했다고 해요. 반시대적 고찰에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도 문화에 대한 것이 아주 중요하게 등장한다고 해요).

‘인류 전체의 행복, 역사 전체의 보편성,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등이 당시 지식인들이 내세우던 근대적 가치를 대표하는 구호들이었어요. 니체가 보기에 이 근대의 삶이라는 건 범용한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죠. 니체는 대중들에 대한 혐오, 엘리트에 대한 혐오를 같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미래의 대중(아직 오지 않은 민중, 어딘가 이미 지금 있을지도 모르는, 각자 어딘가에서 각자의 실험을 하고 있는 민중)을 기다렸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절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어떤 인간들인가요.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인간의 특성을 ‘게으름’으로 꼽는데요. 그는 이 책에서 겁이 많아서 모두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숨기고 사회의 풍속과 의견 뒤에 숨어버리며, 그 이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무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서로에게 강요하게 되는 인간들의 타성, 게으른 습성을 비판했어요(부처님도 자기를 붙들고 있는 것을 게으름이라고 하셨다고 해요). 자신의 신념체계와 가치체계를 부정하는 것, 온몸으로 뛰어들어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는 것, 무리의 가치체계와 싸우며 무리에게 비난 받는 것을 감수하는 것은 모두 우리가 게으르고 비겁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이죠. 이런 범용한 인간들과 대비되는 것이 니체에게는 철학자들과 예술가입니다. 예술가는 실재가 아닌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남들의 시선을 벗겨내고, 비밀을 폭로하며, 인간의 나태함을 경멸하는 자로, 대중 속에 속하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가 되려고 하죠. 니체는 ‘의견과 공포의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해방은 없다고 말하며, ‘공적 의견만 가진 가짜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의 폐해를 들추어내요. 또한 그는 선악이라 부르는 가치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그러니까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선악이라는 건 없으며 지금 우리가 부르는 선은 한때 누군가의 악이었음을 말해요. 그러니까 삶의 세계에서 실재하는 것들은 우리가 흔히 기대하듯 결코 아름답거나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잔혹’하다는 거죠(아르또의 잔혹성). 우리가 어떤 조건에 있는지를 읽어내는 것이 예술가이자 철학자라고 했는데 그들은 인간에게서 이런 실재하는 것들-인간이 비겁하며 게으르다는 사실 같은 것들-을 포착해냅니다. 우리의 나태함은 관습을 전혀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것, 사유에 게으른 것, 공부에 정진하지 않는 것, 인생에 부딪히는 문제들을 돌파하려고(혹은 아예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에요.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안돼요. 니체는 철학하는 법, 사랑하는 법, 이별하는 법까지 모두 배우라고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계속 고수해가는 쪽으로 게으르게 살 수밖에 없으니까요. 편해지려는 생각을 멈추고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서 생각하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자신의 시대를 죽이고 몰락시키는 자’들이 오히려 ‘시대를 다시 부활시키는 자’이며, 이것이 시대의 결을 거스르는 것, 즉 이것이 니체가 말한 ‘반시대성’인 것이에요. 하지만 근본적인 것을 사유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동시대적’일 수도 있는 것이에요.

어떤 시대든 욕망이 특정한 방식으로 흐르도록 하는 길이 나 있어요.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움직이죠. 우리는 협소한 영역, 가족이나 직장을 벗어나지 못해요. 나도 이미 자본주의적 욕망을 재생산하는 부품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시대적 조건을 벗어나지 못하죠. 그래서 이 조건이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해요. 나를 사유한다고 할 때 나와 배우자와 가족과 자식 이상을 사유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만큼의 협소한 영역의 우리 삶과 죽음의 이유로 생각하다 죽을 수밖에 없게 돼요. 하지만 우리의 번뇌를 구성하는 것은 사실은 나의 가족의 영역, 그 이전의 문제(돈의 욕망이 이렇게 구성될 수밖에 없는 자본의 배치라든가)인 것이죠. 우리는 시대적 조건을 사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시대적’이지 않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으니 ‘반시대적’일 수도 없고요.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 자신인 것이죠.

니체는 어차피 잃어버리기(無常) 마련인 우리의 실존을 조금은 ‘무모하고 위험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했어요. 실제로 현실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것, 점점 좋아지는 것 따위는 없어요. 목적론적인 사고(이상주의)는 미래에 무언가 좋은 것이 있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유인 것 같지만, 오히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다름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자기의 때묻지 않은 본래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자신의 본질은 저 깊은 갱도로 내려가는 시도와 모험을 감행한 후에야 얻는 것, 저 높은 곳에 사다리를 밟고 삶에서 겪는 것들을 관통하고 올라간 후에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강도 있는 경험을 하느냐, 즉 삶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통해 어떻게 몰락과 통찰, 자기 환멸과 자기 극복 등을(루쉰의 자기해부처럼..) 겪어내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아무튼 니체는 자신이 어떻게 쇼펜하우어를 통해서 자신으로부터 떠날 수 있었는가의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철학자를 그들의 견해가 아닌 그들의 ‘삶’을 통해 평가했죠. 책보다 그의 표정과 태도와 의복, 음식, 관습 등을 본 거예요. 그가 보기에 쇼펜하우어는 대학교수와 교수철학을 생산했다고 평한 칸트와는 반대되는 인물이에요. 그는 자유로워지고 온전한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현재와 싸우고, 현재의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 시대의 엄마에게 반항하는 의붓아들과 같은 철학자였죠. 니체는 삶이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적나라한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렇기 때문에 삶이 상처와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럼에도 이 진리를 파고들어감으로 삶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쇼펜하우어적 인간을 대중적이고 격정적인 루소적 인간, 명상하고 관조하는 괴테적 인간과 대비시켰어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개체의 찢김을 감내하는 고통의 삶과 그 너머 본질의 세계(의지)라는 이분법을 넘어가지 못하고 여기에서 멈추었지만, 니체는 여기에서 쇼펜하우어와 –사실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 열광했던 자기의 청년시절과 - 결별하고 이를 넘어갑니다.

그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넘어가는 것은 니힐리즘의 개념을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의 두 가지로 나눔으로 가능했죠. 그는 철학자는 한 손에 망치를 들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망치를 들고 기존의 설정된 우월한 가치들을 부수어나가는 폭력적인 힘,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파괴, 이것이 바로 능동적인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의 반대는 더 이상 아무것도 공격하지 않는 지친 니힐리즘, 무無(죽음, 태어나지 않음, 아무것도 하지 않음)를 의지하는 수동적 니힐리즘으로, 니체는 불교를 수동적 니힐리즘으로 봤다고 하네요.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아무튼 니체가 보기에 사람들은 기존의 가치를 무화시키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낼 만큼 충분히 염세적이지 못하고, 기존의 가치들을 조금씩 변형해가고 재활용하며 그럴듯하게 겉모습, 표어, 구호만 바꿔가고 있었어요. 사실 그것은 지금의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은 것 같네요.

한 가지 더, ‘니체에게 비판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지나갔는데요. ‘비판’이 바로 니체의 철학의 방식이자 독특한 사유의 방법이었는데요. 그가 싸움, 호전성, 공격, 적수, 강한 본성 등을 언급한 것은 그의 철학이 후에 파시즘에 이용되듯 잘못 이해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지만 그것은 그의 텍스트 전체를 읽고서는 그렇게 해석될 수 없다고 해요. “복수와 뒷감정이 필연적으로 약함에 속하는 것처럼 공격적인 파토스는 필연적으로 강함에 속”합니다(약한 자가 타인의 곤경에 민감하다는 말은 지난 시간에도 나왔지만 탁월한 거 같아요!). 공격자가 좀 더 강력한 적수(혹은 문제)를 찾으면서 성장하듯 호전적 철학자는 자기의 전역량과 유연함과 싸움의 기술을 모두 발휘하여 전력을 다하죠. 니체가 생각하는 정직한 결투를 위한 전제들은 적을 경멸한다면 싸움을 할 수 없고, 승리하고 있는 적들만 공격하며, 결코 개인을 공격하지 않고(다만 개인을 확대경처럼 사용할 뿐이라고 했는데.. 슈트라우스와 바그너를 공격한 것도 그런 것이었다고 하네요.. 그쪽 입장에서도 그렇게 느껴졌을지는 의문이..;;), 개인차가 배제되고 그 배후에서 나쁜 경험을 하게 도리 것이 없는 것만을 공격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에게 공격이란 호의와 감사함, 존경의 증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도, 바그너도 그가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대상이었으니까요. 따라서 그들과 결별하는 것은 젊었던 시절의 자기 자신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가벼움과 유희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어요.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서 가장 좋은 것이 ‘유희’라는 말이었는데요. 니체에게 철학이란 어린아이들이 주사위 놀이를 하듯, 점100(?)으로 고스톱을 치듯, 매번의 새로움을 즐기는 유희와 같은 것입니다. 판돈이 커져서 돈을 버는 것에 혈안이 되어버린 경기처럼 철학자의 이미지가 우울한 표정과 목소리, 압박감을 떠올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요. 여기서 ‘운명애’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운명애란 바로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그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여기서 전 좀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현시대를 정당화하려는 역사가들의 작업의 결과물들을 니체는 ‘역사병’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가 보기에 삶에는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아요. 삶 자체가 이미 정당하지 못한 것이죠. 그가 말하는 ‘역사병’과 ‘신의 죽음’의 맥락에는 헤겔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데요. 바로 ‘니체적 몸 vs 헤겔적 정신’인 것이죠. 니체는 헤겔의 궁극적인 목적지향성을 비판합니다. 그는 인식자가 아닌 행위자로서의 짜라투스트라를 내세워 ‘부정의 부정’에 맞서 ‘긍정의 긍정’을 제시하죠. 이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 그리스 비극을 통한 삶의 긍정과 연결되는 것이에요.

 

사실은 이번 주가 원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주로 하려고 했었는데, 이전까지 이야기들이 많아서 주 내용은 다음 시간으로 넘어갈 거 같아요. 간단히만 얘기하고 넘어가자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니체의 아포리즘적 글쓰기가 시작되는 책으로, 니체에게 있어서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해요. 이 책에는 이후에 계속 반복될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도덕의 문제, 진리의 문제, 학문과 예술의 문제, 가치의 전도의 문제, 니힐리즘의 문제 같은 것들이요. 하나하나가 앞으로 수업이 진행되면서 자세히 다루게 될 내용들이에요.

 

니체의 사유를 자기화한 사람으로 채운샘은 동양에선 루쉰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루쉰도 소세키도 니체를 번역을 했고 즐겨 읽었다고 하죠. 샘은 루쉰처럼 니체의 책을 머리맡에 놓고 조금씩 시간이 날 때마다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어요. 니체의 글들을 읽은 후에 루쉰을 다시 보면 좋을 거 같아요. 루쉰의 글에서 얼만큼 니체가 보이는지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겠네요. 채운샘은 반고흐, 몽테뉴 등의 사람들과 니체와 연결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연결고리를 찾아가며 철학가, 문학가, 예술가를 한 사람씩 공부하는 것도 풍요로운 공부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아, 배움의 길은 역시 끝이 없군요!

다음 시간 공지(간식 등!)는 건화가 댓글로 달아주길 바랍니다.
전체 2

  • 2016-10-21 07:49
    지난 강의를 생생하게 다시 듣습니다. '게으름'이 인상 깊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중간 중간 졸기도 하였습니다. 나태함은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고 위안을 합니다.
    .... 근데, 니체가 썼다는 <운명과 역사> , <의지의 자유와 운명>이란 글은 어디에서 찾아 읽을 수 있습니까?

    • 2016-10-22 22:43
      금강석샘, 말씀하신 글에 대한 이야기는 채운샘께서 월요일 수업날 얘기해 주실 거예요.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 보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