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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 10월22일 후기 & 29일 공지

작성자
귀매
작성일
2016-10-23 08:59
조회
527
이번주 동사서독을 채운샘은 ‘경청(敬聽)’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옛 의서에서는 心主舌 腎主耳라고 하지요, 말은 가까운 곳 (心)에서 바로 나오지만, 듣는 것은 저 깊은 곳(腎)에서 끌어다가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많은 집중 에너지를 필요로 하다고 보아도 되겠지요? 오늘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새삼, 듣고 있되 듣고 있지 않은것이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부끄러워졌습니다. 흘려 듣거나, 필요로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듣거나, 대꾸할 말을 생각하면서 듣거나, 나도 모르게 어제 먹다 만 빵을 냉장고에 넣었던가 말았던가 생각하면서 듣거나.. 읽는것도 마찬가지 이겠지요! 연애소설을 읽던 노자를 읽던, 얼마나 마음을 집중해서 듣느냐(읽느냐), 얼마나 핵심을 잘 짚어내어 내 것으로 소화하느냐, 그것을 놓치지 말고 가야하겠습니다.

도대체 ‘도(道)’가 뭘까? 유(有)는? 무(無)는? 이라고 궁금해하는 것은 그것의 개념을 규정하고 기준을 가져와야 속이 편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 ‘척도(기준)’을 부여하고 그것에 대해 ‘안다’라고 느껴져야 후련하게 공부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지요.

‘허심(虛心)’에 대해 백과사전적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나의 문제’로 가지고 와서 ‘허심..마음을 비운다는게 뭘까?’, ‘욕심을 버리는게 뭘까?’ 라고 질문을 던져보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더 이상 도인이나 논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아..뭔 얘기인지 모르겠어..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와 같은 수동적인 읽기가 아닌, 온 마음을 집중해 치열하게 자기와 연동되는 사유를 해보자는 것 입니다. 저는 채운샘의 이런 깨알같은 조언이 참 고맙습니다. 이제껏 이렇게 친절하게 공부하는 방법을 들은 적이 없어서요. 물론 제가 당장 그런 적극적인 읽기를 할 수 있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편협한 독서습관-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비슷한 글을 읽으면서 잘 썼다고 좋아하고, 이해가 잘 가지 않거나 평소 생각에 위배되는 글을 읽으면 안 좋은 책이라고 싫어하는-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호호

지난주 공통과제였던 3장의 본문 중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사실 저는 과제에 한자 의미 그대로 ‘배를 채운다’로 적어서 내었고, 토론 시간에 조원들은 虛實, 强弱개념 및 心志는 안에 있고 覆骨은 밖에 있다…등등 자를 들고 긴가 짧은가 이게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열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채운샘이 實其腹 强其骨에서 ‘覆,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實,强’을 그것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최소한의 에너지로 보면 어떠하냐는 이야기를 하셨을 때 깜짝 놀랬습니다. (왜 난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했지?)

그렇다면, 이는 타고난 본성을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렇다면 虛其心 弱其志 가 필요한 이유는요? 바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제도에 편승하여 잉여를 구축하고 이 한 몸 건사하기 위해 너무나도 큰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無常을 외면하려는 불만족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채워우려는데서 我 (ego?)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일상적인 밥을 먹어도 살 수 있지만, 더 귀하고 더 맛있고 더 자극적인 맛을 찾아 다니는 것을 고상한 취미로 봅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왜일까요? 소유함으로써 자기가 충족된다는 망상이 아닐까요?

여기서 소유는 물건일수도, 사람일수도, 그리고 관념과 생각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나 물건에 집착하는 것만 소유욕인줄 알았지, 생각을 고수(!)하는 것도 집착이라는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저것은 무엇이다’ 라고 언어로 규정을 하고, 고정된 관념이 형성되어 낡은 가구처럼 가득 들어차 있으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공간이 없어서, 또는 어울리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들겠지만 그렇다면 아무리 가구를 사러 나가도 시간만 허비하고 결국 빈 손으로 돌아오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나의 앎과 욕망을 꼭 잡고 놓아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배워도 배움이 일어나지 않겠지요!

저는 밭을 갈아본 적은 없습니다만…^^:

밭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매일 돌을 골라내고 (콩쥐가 부러진 호미로 종일 밭의 돌을 골라내야했는데 검은소가 도와주지요?) 잡초도 뽑아주고, 햇볕 쨍쨍한 날도 있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도 있고.. 밭은 똑 같은 밭이지만 매일 마주치는 상황을 겪어내고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해야 뭘 심어도 잘 자랄게 아니어요? 하물며 밭도 매일 적절하게 돌봐야 하는데, 우리는 마음을 하루에 한번은 돌아보고 있을까요? 운전대에 앉자마자 기계처럼 운전해 어느새 회사에 도착해 있고(왔던 길도 생각나지 않는 상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사원증을 목에 걸고 어제 누른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또 나도 모르게 컴퓨터에 로그인을 하고 (암호는 떠올리지 않아도 자동으로 입력된 상태), 또 아무 생각없이 커피를 한잔 뽑아오고..가끔 소름 돋을만큼 똑 같은 아침에 놀랠때가 있음이 떠오릅니다. 생각과 감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전자동이지요. 어떠한 자극이 왔을땐 똑같은 반응을 하고 있는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은 방치된 저의 밭에 굴러온 돌, 비왔을때 파인 웅덩이, 멧돼지 발자국…다 그냥 남아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합니다. ‘나는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인데! 왜 전자동 로봇처럼 살고 있지!’

虛其心은 바로 ‘다가오는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까 하는 태도’ ‘도그마를 버리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유연성’일 것입니다.

마음의 밭을 가는 것, 思



그렇다면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는 인간들이 자기 본성을 지키면서 살게 해주는 다스림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욕망을 버리는 것이 아닌, 욕망의 구도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무엇’이 없으면 못 살 것이다라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
내가 이루어야 할 것(망상)이 본질이 아니라 나 자체(覆骨)가 본질이라고 한다면! 짜릿하지 않으세요. 나는 여기에 있는데, 파랑새는 여기에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고생스럽고 험한 길을 가고 있는 여행자의 고단함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요..

노자는 道沖 (4장)이라고 합니다. 보통 개체 차원에서 有를 떠올리고, 用을 有의 차원에서만 이야기 하는데, 노자는 쓰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虛,無)’까지 함께 어우르고 있는 것입니다! 無는 nothing이 아니라, 有가 작동하게 하는 원리입니다. 문은 안도 밖도 아니지만, 문이 있음으로 해서 안과 밖이 생기는 것을 떠올려보세요. 이렇게 無有는 허공에 떠있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존재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생활입니다. 만약 우리가 無有를 규정해버린다면, 아무리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도 새롭게 읽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채운샘의 ‘과정만 있다’는 말이 또 감동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끊임없는 과정인 것이지요..살아서 숨쉬는 나는 왜 죽은 백과사전이 되려고 할까요.

그렇다고 주구장창 노자 신봉자가 된다면 또 어떨까요? 이곳에서 5장의 풀무가 힌트를 던져줍니다. 天地之間其猶槖籥乎! (하늘과 땅 사이가 어찌 풀무와 같지 않은가?) 신체도 관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고, 식물도 바람이 불어야 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노자도 보자기에 꽁꽁 싸서 신봉하면 화석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테지만, 다른 것을 통해서 노자를 볼 때 비로소 작동합니다. 유가를 가지고 보는 노자는 어떠한지, 불교로 보는 노자는 어떠한지 – 그래서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것인가요- 아무튼 요점은 규정되지 않은, 그리고 앎이 해방으로 작동할 수 있는 공부를 하자는 것인 듯 합니다. (맞죠 샘? ^^;;)

덧붙여 3장의 常使民無知無欲의 知는 특정한 知입니다. 본성을 거스르는 知입니다. 만약 우리가 노자의 개념을 줄 긋고, 정리하여 노자박사가 되어서 ‘無란 말야~ 이런거야’하고 끝난다면 그것은 그냥 지식으로 나를 채우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수단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나의 생활로 가지고 들어와 몸으로 읽고, 생각으로 나를 가볍게 하는 知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요. 여기서의 欲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欲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잉여의 욕망인 탐욕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지요.

이것은 5장의 天地不仁, 芻狗 와도 연결됩니다. 편애함이 없고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자연은 벚꽃이 예쁘게 피었다고 기뻐하지 않고, 꽃이 졌다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늘 변수를 내포하고 있지만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과 같이 우리의 공부도 치우침이 없고, 앎에 갇히지 않는 상태, 질문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6장의 神은 예측 불가능한 오묘한 작용을, 牝은 오묘한 것,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봤습니다. ㅋㅋ 그냥 다 오묘하여요! 緜緜若存用之不勤(이어지고 이어져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며, 무궁무진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도의 작용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세상에 절멸하는 것이 없다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동양의 사유이지요. 캬..멋져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7장의 天長地久는 緜緜若存임을 다시 한번 이야기해 준 것입니다. 예전에 가슴 설레며 봤던 영화 제목이기도 한데, 저는 언제부터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문득 ㅋㅋ
같은 장 以其不自生故能長生의 不自生은 내가 한다는 자의식이 없음입니다. 만물을 길러내는 자연도 내세우지 않건만, '내가 했어'를 알아주길 바라고 사랑받고 칭찬받길 바라고 있지 않은가요.

8장의 動善時는 또 말하자면 너무 길어지는 時가 나와서 살짝 짚고만 넘어갑니다. 이는 자기가 구성할 수 있는 것, 때를 파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샘은 나라는 존재를 어디에 놓고 출발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지시기도 했습니다.

12장의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그러므로 성인은 편안하고 배부름만을 구하지 가무나 여색의 오락을 좇지 않아서, 물욕의 유혹을 버리고 편안히 만족하는 생활을 유지한다)은 앞서 3장에서 살펴본 내용과 유사합니다. 기억하시지요? 본성을 채우는 것이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13장의 寵辱若驚은 정말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 총애를 받거나 욕을 당하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다니요..바로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이 밖에도 ‘움직임 자체가 존재’, ‘이미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 ‘여기서 하는 것과 욕망하는게 일치한다’ 등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 잔뜩 있지만, 이만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공부가 목적이 되는 읽기를 해 오지는 않았는지, 생각의 회로를 바꾸고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통찰력과 용기를 갖추게 될 날이 과연 올 것인지,산들바람처럼 소통하는 知를 내 삶 속에 녹아낼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을지, 두려움과 설레임을 안고 오늘 후기를 마칩니다.

 

 

다음주 공통과제 : 14장~20장
*읽을때마다 처음 1장부터 읽기요 ^^

간식은 락쿤,건화 (아니면 정정해주세욧)

*저..오늘만 후기입니다..ㅠ.ㅠ;;
전체 6

  • 2016-10-23 15:10
    와우! 이토록 신속하고 '주체적인' 후기라니!! 귀매를 후기의 퀸으로 임하노라!

  • 2016-10-23 16:14
    언니의 생각들이 말그대로 반짝반짝 빛이나요. '오늘만'이면 안될듯! 여기저기 자주 쓰시길!

  • 2016-10-23 18:54
    토요일 저녁, 일요일 모두 바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모두 양지선생님의 신속성에 놀랬답니다.

  • 2016-10-23 21:16
    ^^;;;; 오늘이 아니면 다음주말까지 도저히 쓸 수 있는 시간이 나지 않아서 아침에 울면서 썼어요... 살려주세용

  • 2016-10-24 11:20
    와...본받고 싶은 신속성이네요...! 규문 홈피에서 자주 뵐 수 있길...ㅎㅎ

  • 2016-10-24 11:26
    크.... 이런 후기라면 염치불구하고 한 번만 더 울면서 후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