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0.26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0-23 15:44
조회
327
갑자기 겨울이 되었네요. 기다리셨죠? 늦은 공지 올립니다 ^^;;
다음 주에는 일곱 번째 고원, <얼굴성> 들어갑니다. 시간이 갈수록 오묘한 맛을 더하는 고원, 이번에는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지(…응?) 사뭇 기대됩니다.
모두 세미나 참석은 못하셔도 꼬옥 책 읽고 오셔요.
간식은 홍명자쌤+현옥쌤께 부탁드렸습니다. 맛나고 든든한 간식 타임 될 듯~!

지난 시간에는 4장에 이어 다시 들뢰즈+가타리의 언어학 수업이 진행되었지요.
채운쌤은 언어에 대한 인간주의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기획 의도라 하셨는데, 네, 인간의 문화 및 언어를 지층으로 사유하던 3장에서부터 이미 예고된 바인 듯합니다.

지지난 시간에 함께 읽은 4장의 핵심, 기억하시죠? 언어는 정보 전달이나 의사소통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명령어랍니다.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날조함으로써 개입한다지요.
그런 경험 있지 않으세요?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내심 느끼고 판단해온 바를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입밖에 내 떠들고 나면 그 느낌이 더 강해지고 심지어 그게 완벽하게 공정한 판단이자 사실인 것처럼 되어버린 일.
언어를 통해 대상을 규명하고 포획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어왔지만, 실은 오래 전 스토아학파에서부터 이 같은 믿음은 회의되고 있었다죠.
말의 차원, 그리고 사물의 차원은 서로 독립적이면서 상호의존적이라고 합니다.

자, 그럼 지난 시간에 함께 읽은 5장에서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어와 주체화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대한 고찰이고, 동시에 어딘가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끝없는 탈주체화의 모색입니다.
…실은 탈주체화가 썩 잘 연결되지 않는데, 이 부분은 앞으로 책을 읽어가며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고, 오늘은 주체화에 대해 간단히 복기하는 정도로 마칠게요.

우리는 기호라 하면 소쉬르의 기표-기의 관계를 제일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만, 들뢰즈+가타리에 의하면 그것은 여러 상이한(그리고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호 체제의 일부에 불과하답니다.
채운쌤께서는 특정한 기호 체제는 ‘변수’와 특정사회의 결합물이며, 주체화는 바로 이 특정한 기호 체제 위에서 특정하게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셨죠.
그러니까 고유한 주체가 ‘먼저’ 주어진다는 믿음은 허상입니다. 주체는 특정한 배치 위에서 형성된 기호 체제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주체화를 가능케 한 기호 체제를 들뢰즈+가타리는 후-기표작용적 체제라 부릅니다.
보시다시피 기표작용적 체제 앞에 ‘후’라는 명사가 붙어 있죠. 기표작용적 체제를 신의 말씀과 그에 대한 사제의 해석으로 의미를 생성하던 신의 시대라 본다면, 후-기표작용적 체제에서는 신의 말씀이 전해지는 통로, 신전이 파괴된 뒤 사람들이 끝없이 길을 걷기 시작한 시대입니다.(역사적이거나 진화적 선후 관계가 아니라는~)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유목의 시대로 정의하며, 이때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라 ‘배신하는’ 예언자가 주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수난의 시대, 동시에 정념의 시대(passion).
신의 말씀을 기다리는 신전 지킴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 배신자는 신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의 말씀을 신도 채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완벽하게 수행해버리지요.
요나와 예수. 그들은 얼굴을 돌림으로써 자기 안에서 새롭게 신을 만들고 느낍니다(정념!).
자, 이처럼 나는 신을 배반하고 방황함으로써 신의 말씀을 내면화하고 양심의 가책을 자기 안에 심습니다. 그러니 나와 신 사이에는 사제나 교회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요. 루터의 말마따나 우리 자신이 직접 신과 만날 수 있습니다.
— 들뢰즈+가타리는 바로 여기에서 주체가 탄생한다고 봅니다.

전제군주 혹은 신의 시대에는 의미생성의 중심이 되는 일자, 초월적 기표가 있었을 뿐 내면을 소유한 주체가 있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후-기표작용적체제에서는 오직 주체화의 점이 존재할 뿐이랍니다.
사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해석의 주체가 됩니다. 내 안에 죄가 있고, 내 안에 그에 대한 가책이 있습니다.

내면이 있다는 이 확신, 가책과 죄의식에 대한 이 생생한 감각이 우리로 하여금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고,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한다, 이러저러한 것을 생각하고 느낀다고 믿게 합니다.
그런데 주체화란 사실 특정한 기표작용적체제의 산물인바, 주체가 말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특정한 배치가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됩니다.
인간의 저 안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갖가지 알 수 없는 욕망과 침범 불가능한 사상들이 있다는 속설(^^;)이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주체를 반박불가의 확실한 것인 양 느끼게 하지만, 실상 그렇게 느끼고 해석하게 하는 집합적 배치물이 있을 따름.
고로 채운쌤은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주체란 곧 집합적 배치물이다. 그것은 특정 기표체제 안에서 특정하게 내면화된 결과일 따름이다…….

앞에서 미리 고백했듯 탈주체 부분은 제가 말이 많이 모자랍니다. 얼굴성과 기타 등등 장들을 더 읽으며 이해해보아야 할 듯해요.
다른 분들도, 부디 각자의 고원을 넘으시길 ^_^

그럼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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