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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생] 쌩 텍쥐페리

작성자
선민
작성일
2016-11-10 08:29
조회
644
[길 위의 생]_쌩 텍쥐페리(1900.6.29.~1944.7.31)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1. 사막에서 끝난 여행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샘이 있기 때문이지. 그 밤 하늘은 왜 그렇게 아름다울까? 지상의 빛이 완벽하게 사라진 뒤 어둠을 일깨우는 무수한 별. 그 많은 별들 중 어딘가에서 내가 아저씨를 보고 웃고 있을 테니까. 북아메리카 서부의 사막에서 돌아온 뒤 저는 소혹성 B612에서 온 외계인 왕자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정말이지 사막은 왜 그렇게 아름다울까요?

사막은 어린 왕자의 여행이 끝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왕자는 비로소 친구를 사귀고, 하나의 진실을 선물한 뒤 고향별로 돌아갑니다. 진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왕자는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많은 여행을 합니다. 신하 없는 왕, 취한 자신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술꾼, 세면서 별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사업가. 이들이 사는 작고 작은 별들을 건너다닌 뒤 왕자는 이렇게 말하지요. “어른들은 참 이상해.” 어린 왕자가 지구의 사막 위에 떨어진 것은 사막에는 어른이 살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요? 계급, 성별, 규율과 같은 각종 사회적 문법을 짊어지고는 횡단할 수 없는 곳. 하지만 왕자는 사막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왕자도 추락한 비행사도 사막으로부터의 이륙을 꿈꿉니다.

2. 인간의 길

1943년 <어린 왕자>를 쓸 무렵의 쌩 텍쥐페리는 미국 망명 중이었습니다. 이념과는 무관해 보이는 한 사람의 기술자, 우편물을 실어 나르고 항로를 개척하던 비행사는 왜 ‘망명’을 결심했을까요?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사막이나 그리다니, 혹시 쌩 텍쥐페리는 전쟁의 어둠을 피해 사막으로 도망갔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갖고 검색하다가 『Wind, Sand and Stars』라는 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을 찾아 보니 이 책의 원본이 바로 1939년에 쌩 텍쥐페리가 프랑스어로 쓴 『인간의 대지』였습니다. 바람, 사막, 별은 진작부터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화두였나 봅니다.

『인간의 대지』는 비행사였던 쌩 텍쥐페리가 1933년 사고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게 되면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육체가 모래처럼 바스라지고 정신이 환영에 점령당하면서 사막에 묻히려던 순간, 쌩 텍쥐페리는 인간에 대해 사유합니다. 하늘에는 물도 풀도 인간도 살지 못하지요. 비행사가 자신의 사유를 완성시킨 장소가 사막인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치명적 상처를 남긴 이 사하라 사고도 쌩 텍쥐베리가 비행을 포기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비행에 대한 그의 몰두는 사실 대단했습니다. 1944년에 떠났던 마지막 비행도 사실 나이나 체격 조건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비행이었거든요. 그는 왜 비행에 매료되었던 것일까요? 당시의 비행기는 조종석에 뚜껑도 없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엔진이 종종 꺼지기도 하고, 조종 장비는 어수룩하고, 지도조차 불완전했다고 합니다. 1920년대와 30년대는 막 대륙 간 항로가 개척되던 시점이었어요. 쌩 텍쥐페리가 근무했던 라데코에르 항공사에서는 프랑스에서 칠레까지 항공로가 다 개척되기까지 120명 이상의 직원과 승객이 사망할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하늘 길은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시험되고, 또 시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쌩 텍쥐페리가 반한 것은 바로 이 불안정성이었습니다. 갑자기 깍아지르며 솟아오르는 산 봉우리의 측면, 착륙을 방해하는 실개천의 그림자, 바다의 온도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대지의 힘들. 2차원의 지도나 갖가지 기상학적 통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차원이 인간의 머리 위에 늘 있어왔다는 사실은 놀라웠습니다. 쌩 텍쥐페리는 인류가 막 눈을 뜨고 있던 이 다채로운 공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이 신비로운 하늘을 매끄럽게 달리기에는 아직 인간의 기술이, 이곳을 무리없이 이해하기에는 아직 인간의 지력이 불완전했습니다. 허나 정든 지상의 모든 길을 뒤로 두고 솟아오르는 항로라니요. 항로를 개척하는 일은 인간의 지성과 감각을 더욱 깊고 넓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쌩 텍쥐페리는 하늘을 날면서 기상학과 천문학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귀족 어른들이 기술직이라며 앞다투어 반대하고, 애인이 사랑을 빌미로 발목 잡아도 그의 비행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쌩 텍쥐페리가 1941년에 대서양을 떠나 망명을 했던 것은 프랑스 내의 분파적 갈등과 나치즘의 전횡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념으로 갈고 닦는 지상의 길이란 그 땅을 약간만 이륙해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요. 물론 허공에 길을 낸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겨우 인간일 뿐인 내가, 그 육신과 그 정신만이 위대하다 고집하는 순간 몇 겹으로 대기를 감싼 구름이 어떤 운명을 선사할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지요. 허공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항로를 기다리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완벽한 항로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람과 모래와 별이 계속해서 자리를 바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사막의 맛

쌩 텍쥐페리는 동료와 함께 사막에 불시착한 뒤, 구조되기까지 꼬박 사흘 낮밤을 포도 몇 알과 오렌지 반쪽, 쿠키 몇 조각에 의지해 움직여 다녔습니다. 나침반이 방위를 가리키고는 있었지만, 동서남북 그 너머에 바다가 펼쳐질지, 모래산이 솟아오를지, 사람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지요. 기운이 떨어지자 밤의 추위를 막기 위해 지니고 걷던 텐트 조각마저 버려야 했습니다. 느닷없이 나타나는 호수나 유목민의 신기루 앞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다가, 나락과도 같은 절망에 발을 내딛기도 했습니다. 죽는 것이 구조를 포기하기보다 쉽다는 것을 겨우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목구멍은 이미 막혀버렸으며 혀도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끔찍한 갈증 속에서도 그와 동료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떼고 있었습니다. 물론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걸은 200km의 길은 매 순간을 극도의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은 결과였습니다. 이때 쌩 텍쥐페리는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까지 걷게 하는가? 사막의 조난자에게 숨결을 불어넣은 존재는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과 친구, 고락을 같이 했던 동료였습니다. 함께 추락한 동료는 자신의 시신이 조금 더 빨리 발견되도록, 그래서 아내가 보험금을 늦지않게 받을 수 있게, 뼛속에 남은 마지막 숨을 고르곤 했습니다.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는 딱 그 순간에 특별한 전도가 일어나기도 했는데요. 조난자가 자신을 잃고 슬퍼할 이들을 구하는 구조자로 변신하는 겁니다. 죽어가는 자신에게 상대를 살릴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나중에 구사일생의 두 비행사를 구한 것은 이름 모를 유목민이었습니다. 우리의 목숨에 생명수를 부어넣는 존재는 평생 단 한 번도 스친적 없는 누군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이 상상을 미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보이는 그 너머에서 서로를 살리고 있었습니다.

타들어가는 혀로 맛본 사막. 그 부재의 맛. 사막의 매끈함이 낮에는 그늘을 지우고 밤에는 기댈 곳을 없앨 때, 우리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손에 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지은 것에 의해서밖에는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왕국은 자기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작고 작은 자신의 왕국이 어떤 은하계에 속해 있는가를 성찰할 때 비로소 부끄러움과 책임, 그리고 사랑을 동력으로 자신을 구하게 됩니다. 어린 왕자는 이 깨달음을 비행사와 나누면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쌩 텍쥐페리도 1944년 7월 31일 자신의 왕자를 만나러 훌쩍 소행성 B612로 날아갔습니다.

우리는 해방되고 싶다.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은 곡괭이질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도형수의 곡괭이질은 개척자의 곡괭이질과 완전히 다르다. 도형수의 곡괭이질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만, 개척자의 곡괭이질은 그를 위대하게 만든다. 곡괭이질을 하기 때문에 도형장인 게 아니다. 추악함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니까. 도형장은 의미 없이 곡괭이질을 하는 곳, 곡괭이질 하는 자를 사람들의 공동체에 연결해 주지 않는 곳, 바로 그렇기에 도형장인 것이다.그리고 우리는 그 도형장에서의 탈출을 꿈꾼다.”[『인간의 대지』, 허희정 옮김, 팽귄 클래식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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