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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s 다이어리 : 시끄러운 진실 <씨왓아이워너씨>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1-21 01:09
조회
744

시끄러운 진실 <SEE WHAT I WANNA SEE>


5831c8c9eb8974862844.jpg1막. <ㄹ쇼몽>

“진실은, 한 남자가 죽었다는 거예요.” -1막. <ㄹ쇼몽>, 경비원.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제목을 단 이 극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세 개의 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가지 살인사건을 두고 사람 수만큼 증언이 갈리고 또 그에 따라 지목되는 범인도 다른 영화 <라쇼몽>(소설 <덤불 속>)의 플롯을 차용한 <ㄹ쇼몽>, 어느 날 세워진 푯말 때문에 사람들이 정말 연못에서 용이 나올 거라고 여겨 호들갑을 떠는 단편 <용>을 원작으로 하는 <영광의 날>, 그리고 막간극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일 꿍꿍이인 <케사와 모리토>가 있다.
막간극을 제외하면 1막과 2막은 모두 뉴욕 센트럴파크가 배경이다. 둘 다 시간 배경도 다르다. 1막과 2막은 각각 1951년과 2001년의 뉴욕 센트럴파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영화 <라쇼몽>이 개봉된 해인 1951년, 그리고 2001년.
오프닝 <케사와 모리토>는 케사가 모리토 목을 노리자마자 끝난다. 이후 1막 <ㄹ쇼몽>이 시작된다. 남자가 죽고, 목격자 극장 경비가 피곤한 얼굴로 진술한다. “뭔 말이 더 필요해. 아는 건 다 말했죠.” 그 다음 강도가 등장한다. “범인은 나.” 그 다음 아내. “날 봐요. 내가 죽였어요.” 마지막으로 죽은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영매. 그녀는 남편이 직접 가슴을 찔러 자살했다는 목소리를 전하며 말한다. “난 말을 옮겼을 뿐.” 목격자도 당사자도 누구 하나 취조자가, 관객이 원하는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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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다시 본 <씨왓아이워너씨> (이하 <씨왓>)는 참 시끄러운 극이었다. 배우 네 명이 각각 자신은 진실만을 말한다고 한 시간 내내 외치는 1막은 물론 911 테러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믿음을 잃고 기적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센트럴 파크를 배회하며 노래하는 것도 상당히 시끄러운 장면을 연출한다. 잘 귀 기울이지 않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고 단지 저기서 배우들이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는 넘버, 그리고 관객석을 돌아보며 자신의 절실함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배우들. 진실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이란 말인가?
나는 <라쇼몽>식 구조를 내가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 상대성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도 있고 재미도 느낄 줄 알았다. 그런데 관객으로서 앉아서 보고 있기에는 또 그렇지가 않았다. 이건 사실 매우 피곤한 이야기다. 우선 케사가 모리토를 찔렀는지 아닌지 다른 반전이 있는지 무엇 하나 밝혀지지 않은 오프닝을 본다. 그리고 찝찝한 채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무리 <라쇼몽>에 대한 정보가 있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대체 어쩌라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누가 됐든 범인이 밝혀지면 좋겠다. 저 캐릭터들이 진실을 몰라도 좋다. 관객인 나에게 살짝 힌트라도 주면 좋겠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볼 테니까, 진실을 주고 이 시끄러운 극을 마무리해라.
하지만 <ㄹ쇼몽>은 애초에 모음 ‘ㅏ’가 사라진 이야기다. 즉 제목부터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다. 죽은 남편은 영매의 입을 통해 사건과 상관없는 것 같은 영화관 간판을 회상한다. “난 영화가 필요해요. 뭔가 다른 세계가 필요하죠. 다른 생각을 해야 했어요. 극장 바깥쪽에 걸린 현수막에 제목의 ‘ㅏ’자가 빠져서 <ㄹ쇼몽>으로 적혀 있었죠. ‘ㅏ’자는 어디로 사라진걸까? 사라지다...” <ㄹ쇼몽>에서 가장 시끄러운 장면이다. 강도와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놀아나겠다는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해야 했던 남편은 영매와 함께 ‘ㅏ’로 시작되는 단어를 큰 소리로 나열한다. “아침안개, 아메리카, 아첨, 아찔함...”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결정하는 모음이 사라진 자리에 시끄러운 ‘다른 생각’들이 웅웅거린다. 여기서 관객은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없다. 삼각형 무대의 어느 변을 차지하고 앉아있든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다. 진실은 존재하는가? 진실이 잘 구성되어 머릿속에 담아갈 플롯이라면 진실은 없다. 굳이 있다면 이 시끄러운 ‘아메리카’, ‘악’, ‘아픔’, ‘아비규환’이 진실이다.

2막. <영광의 날>

“오늘 우리의 질문은 기적은 일어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기적을 믿는가입니다.” -2막, <영광의 날> ‘기자’
“정말 미친 건 매일 똑같은 걸 반복하면서도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거야. 마치 기도처럼.” -2막, <영광의 날> ‘신부’

인터미션이 끝나고 <케사와 모리토>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모리토가 케사를 죽일 궁리를 한다. 모리토가 케사의 목을 노린다. 그리고 2막 <영광의 날>이 시작된다.
2막에는 “모든 단어에서 철자가 하나씩 빠진 문장 같은” 인생을 사는 신부가 나와서 ‘작년’을 회상한다. 그 회상 시기는 2001년을 또한 ‘작년’이라고 말하는 때이다. 만약 <씨왓>이 <ㄹ쇼몽>에서 끝났다면 아무래도 부족했을 것이다. <ㄹ쇼몽>은 <라쇼몽>을 미국으로 배경을 옮겼으며 주제가 주는 묘한 뉘앙스를 강화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플롯이 전부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극은 2막이 있다. 그리고 기적과 9/11을 같은 선상에 두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극에서 9/11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보면 센트럴파크를 떠도는 사람들의 머리 한구석에 무엇이 있는지는 한눈에 보인다. 사람들은 작년, 끔찍한, 모든 꿈을 앗아간 재앙을 두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신부에게 묻는다. 그 사건을 계기로 믿음이 흔들린 신부는 센트럴 파크에 낙서를 한 장 써 붙인다. “3주 후 화요일 오후 1시 정각 자 기적이 올 거야. 저기 물 밖으로 나오시리라. 믿음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고 예상외로 온갖 사람들이 센트럴 파크로 몰려들어 기적을 기다리는 광경을 보고 당황하고,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이건 모두 거짓말이라고 밝히며 돌아가라고 소리친다. 오후 1시 정각. 기적이 일어난다.
<ㄹ쇼몽>이 그래도 착실하게 <라쇼몽>을 따라갔다면 <영광의 날>은 소설 <용>의 결말을 뒤집는다. ‘작년’의 악몽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1시 정각에 내리친 벼락을 동반한 소나기에 혼비백산하며 호수를 등지고 도망친다. 그때 호수를 돌아본 것은 냉소에 사로잡혀 믿음을 모두 잃어버린 신부뿐이다. 소설 <용>에서는 연못에서 용이 나오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진상을 밝히는 주인공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영광의 날>에서는 신부를 아는 사람들이 그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원망하며 떠난다. 신부가 본 기적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믿어주지 않는다. 그렇게 신부는 ‘진실’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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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에서 재밌는 장면은 무신론자에 공산주의자인 신부의 이모가 슬그머니 공원에 나타나 신부가 놀라는 것이다. 이모는 당황하는 신부에게 “기적은 온다.”라고 침착하게 말한다. “인내심이 필요한 거야. 때가 올 테니. 단 하루도 빠르면 안 돼. 늦어도 안 되는 일.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기적은 무엇인가? 예상외의 초자연적 순간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시간까지 명확하게 기재된 계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모든 것이 무너졌던 ‘작년’이 아니라 공원에 버려진 종이쪼가리에 적힌 ‘그 때’가 진정한 기적의 순간이다. 사람들은 그 기적을 믿는다. 기대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기적을 바란다. 사람들이 뭘 바라든 기적은 다시 일어난다. 그들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만들었던 ‘작년’과 같이 기적은 일어난다, 기적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뒤로하고 당장 뒤돌아서 도망치도록 만든다.
신부는 기적을 보았다고 하지 않고 진실을 얻었다고 진술한다. 매번 신은 없다고 되뇌던 신부는 기적을 목격하고, 기적이 필요하다고 외치며 영광의 날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도망치는 가운데 드러난 진실은 착잡함만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또 다시 기적이 일어나서 또 다시 같은 방식으로 도망치고, 또 똑같은 방식으로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부는 그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묻는다. “그 진실로 제가 뭘 해야 하죠?”
<씨왓>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극이다. 그리고 이젠 다소 케케묵은 것 같은 이 명제가 일침을 가하는 말이 가져다주는 어떤 명쾌함이나 놀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이기도 하다. 상대성을 되뇌더라도 사건을 만나면 뼛속에 새겨진 습관대로 행동하게 되니 말이다. 객석에 앉아서 확인하는 건 사건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리고 사건이 한가지로 규합되어 정리되기를 내심 바라는 나 자신이고, 또 트라우마에 붙들려 사건 모두를 같은 차원으로 환원해 버리는 인간의 습이다. 인간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이게 진실인가? 그럼 이 진실로 뭘 해야 하는가?  그게 진실이라고 믿을 수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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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23 15:44
    드디어 올라왔군요ㅋㅋㅋ라쇼몽이 극에선 어떻게 연출될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전 라쇼몽 읽었을때 결국 아무도 진실로 다가갈 수 없다기보다 그게 각자의 진실일거라고 받아들였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