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1.23 절차탁마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1-29 02:34
조회
325
161123 절탁후기

<천 개의 고원>은 각 챕터마다 어느 시대를 제목으로 삼는데, 열 번째 고원은 1730년입니다. 18세기는 인간의 이성을 밝히는 계몽주의 시대이자 흡혈귀 담론이 쏟아지는 시대였다고 합니다. 계몽주의라고 하면 허구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거셌을 것 같은데 흡혈귀 이야기가 유행했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드라큘라> 영화 클립을 보았는데요, 드라큘라 백작이 잡히려는 찰나 그의 몸이 해체되며 쥐떼가 우글거리는 모양으로 변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드라큘라 백작을 잡으려고 온 사람들은 분명 그에게 총을 쏘았고, 그들 앞에서 괴물의 모습을 한 백작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클립을 보고 있으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그들은 과연 흡혈귀 드라큘라를 잡아 죽인 게 맞을까? 드라큘라가 거기에 있기는 했던 것일까?
흡혈귀 이야기의 대표격인 <드라큘라>를 보면, 그는 죽은 존재도 산 존재도 아닌, 남성의 형태를 취하지만 여성적인, 그리고 안개나 동물로 변신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딱 한 가지로 잡히는 존재가 아니라 경계가 모호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염을 통해서 번식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에 공포를 느끼거나 매혹당한다고 합니다. A나 B가 아니라 A도 B도 아닌 모호한 대상을 멀리하고 싶으면서도 그 알 수 없는 모호함에 끌리는 것입니다. 특히 중심의 자장 안에 있지만 언제든 이탈할 수 있는 가장자리의 존재가 쉽게 흡혈귀 같은 존재에 매혹당한다고 합니다. 이건 존재가 늘 동일자로 존재하지 않고 중심으로 수렴하는 힘과 달아나려고 하는 힘 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뜻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10장에서 어떻게 우리가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질문합니다. 생성과 변화만이 있다면 존재는 해체되어야 할 것인데 개체는 어떻게 개체일 수 있는가. 생성과 일관성의 관계에서 일관성을 어떻게 이해할까.
우리가 존재를 생각할 때는 그것의 특징을 떠올립니다. 종, 언어, 성별, 피부색 등등. 특징이 같고 다름에 따라서 존재를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유사성과 차이의 기준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질서를 만들어내는 초월항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의 신이 그런 초월항입니다. 어떤 구조를 염두에 두고 유비관계를 설정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본질주의에 갇히게 됩니다.
들/가는 생성의 차원에서 개체가 개체일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를 찾습니다. 생성이 이루어지지만, 생성을 바깥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고 사유하는 틀은 무엇인가. 들/가의 본질은 어떤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이들, 도주선입니다. 1차적인 것, 본질은 이미 존재하는 배치가 아니라 그 배치를 교란하는 도주입니다. 채운쌤은 면역을 예로 드셨는데요. 바이러스, 균과 접촉하면서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면역 체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질적이고 분열적인 힘, 즉 타자성이 오히려 나를 나일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자들을 통해서만 나로 현존한다는 역설. 들/가는 이것을 ‘반자연적 결연’이라고 합니다. 사실 ‘반자연’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갖고 있는 표상에 비한다면 ‘반자연’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선험적인 규정성이 없는 자연에서는 자연, 반자연, 인공이 따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연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조차 자연입니다. 그리고 자연에는 이질적 항들의 작동과 교류가 일어날 뿐입니다. 그리고 개체의 동일성, 내가 나라고 느끼는 것, 자아는 그 이질적인 힘들 사이의 문턱일 따름이라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10장은 ‘되기’ 장입니다. 온갖 기억들이 나와서 ‘되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채운쌤은 ‘되기’와 반대되는 말은 기존의 상을 반복 생산하는 ‘재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되기’는 상태의 변화도 아닙니다. 점에서 점으로의 이동을 뜻하는 개념도 아닙니다. 계속 ‘되기’가 무엇이 아니라고 말하게 되는데요. 일단 ‘되기’는 생성입니다. 그런데 생성은 또 ~이 생겨난다고 오해될 수 있는 데 또 그것도 아닙니다. (소멸도 생성이니까요.) 생성, 혹은 ‘되기’는 무엇인가로 변화하는 것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되기’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어디에서 어디로 이행해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 그리고 이 시간, 이 공간, 이 날씨와 더불어 현실화되는데, 이것 자체가 ‘되기’를 실행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채운썜은 ‘되기’란 끊임없는 과정인 분열이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늘 표상과 존재를 일치시켜 주체를 붙잡으려 하는데 ‘되기’란 그 주체로부터 달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들/가는 ‘되기’란 그 자체로 소수적이라고 합니다. 존재는 타자들로 이루어져있고, 늘 동일화 하려는 지배적인 힘으로부터 달아나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배적인 힘이란 단순히 수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소수와 다수를 가로지르는 견고한 선, 나무적인 것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되기입니다. 여성 되기란 남성이라는 영토와 함께 여성이라는 영토로부터 달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물 되기는 인간주의로부터 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되기’를 위해서 가장 견고하고 특권적인 영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소수와 다수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겉으로는 달아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파시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채운쌤은 윤리의 문제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왜 우리는 동일한 사건을 겪는데도 다르게 받아들이는가? 주체가 만약에 단일하다면 불변하는 본질을 갖고 있다면 동일한 사건에 대한 동일한 방식의 판단을 내놓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동일한 사건 앞에서도 다 다른 방식으로 겪습니다. 이건 주체가 어떤 배치에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서 윤리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 됩니다. 나는 어떤 배치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배치의 중심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고 고유한 윤리를 발명할 것인가. 그런 실험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채운쌤은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을 인용 하십니다^^ 보편적 윤리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윤리는 반드시 실험하는 자들을 동반한다는 것.
전체 3

  • 2016-11-29 10:56
    보편적 윤리로 환원되지않는 구체적이고 고유한 윤리의 발명과 실험... 이 말 또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선언 같은 것으로 남지 않으려면 우리도 이 지점에서 뭔가 더 고민해서 풀어봐야 하지 않겠는고? 세상 모든 책을 읽는 작업에서 정말로 어렵고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서부터인 듯. 담 후기에서는 그걸 좀 보여주면 더 좋겠다!

  • 2016-11-29 13:38
    1차적인 것이 탈영토성이라는 얘기가 늘 알쏭달쏭했는데, 오늘 혜원씨 덕에 이해했네요. 완전 잘 읽었어요! 멋진 후기 고맙습니다!^^

  • 2016-12-01 13:18
    다양한 힘들 사이에서 오히려 자아는 불안정에 가까운데, 어떻게 우리는 '나'라는 자아를 이토록 견고히 하는 걸까요? 알듯 말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