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춘분> 후기 - 수경조~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11-29 03:20
조회
287
생각나는 순서대로 나열해 보겠습니다.

먼저 소설 초반에만 나타났다가 뱀지팡이만 남기고 사라진 모리모토라는 인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뭔가 중요한 역할로 다시 등장할 것만 같고, 사건간의 어떤 연결고리라도 될 것만 같은 기대감을 자꾸 주지만 사실은 처음에 잠깐 나온 게 끝인 비련의(?) 인물이죠. 일단 그는 게이타로에게는 모험을 상징하는 인물로, 게이타로가 생각하는 모험이란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모리모토의 역할 때문에 설화적이라고 느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옛날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에게 증표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산신령과 같은 존재에 빗댈 수 있지 않겠냐는 거였어요. 또 근대인에게 유물(뱀지팡이)을 남기고 간, 근대 이전의 지나간 세대, 과거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모리모토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어떤 면에서는 모리모토의 부재(사라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음)는 모험시대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도 했는데요. 모리모토의 모험과 게이타로의 현실 속 모험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다소 과장이 섞였다 하더라도 모리모토의 과거의 경험담은 파란만장한 살아있는 모험들로 넘쳐나지만, 그가 사라진 이후, 지금 여기서 나(게이타로)의 모험은 기껏해야 소개서를 쓰거나 직장을 구하기 위한(고 정도의 목적을 위한) 것 밖에 안 되는 시시한 탐정놀이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거죠. 별다른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는 너무도 평범한 중년신사를 따라간다든가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상상이나 해내는 수준의 활동은 모험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합니다. 어떤 큰 시도도 하지 않고 특별하거나 거창한 일도 일어나지 않죠. 어쩌면 이 소설은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냐는 얘기를 했어요. “자기 같기도 하고 남 같기도 하고, 긴 것 같기도 하고 짧은 것 같기도 하며, 나올 듯하기도 하고 들어갈 것 같기도 한 그런 물건”은 소설 속에서는 뱀지팡이로도 보지만, 소설에 대한 소세키만의 정의라고도 볼 수 있다는 해석은, 전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어서 깜짝 놀랐어요. 책을 읽으면서는 이것이 인생에 대한 비유일까 정도는 고민해 봤지만 소설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니요! 듣고 보니 엄청 그럴 듯했습니다.

아무튼 밖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어떤 큰 사건과 모험이 없는 근대인은 이제 그 에너지를 내면으로 돌립니다. 외부적 사건은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어떤 작은 것 하나에도 크게 요동치며 반응하는 파란만장한 내면의 폭풍이 중심에 나타나죠. 근대에서의 실제 세계는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내면에서 모든 것을 만들었다 부쉈다 세웠다 허물었다를 반복하는 근대인은 피곤합니다. 스나가가 그것을 잘 보여주죠. 별 거 아닌 일상과 요동치는 내면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근대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 게이타로가 책상에 앉았다’로 시작해서 그가 쓴 글 속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마지막에 작가가 일어나는 장면으로 끝난다거나 했으면 훨씬 재미가 없었겠죠.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어디서부터가 소설인지를 소설 안에서 분명히 구분해 낼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원재료와 가공된 얘기와의 경계가 따로 없고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바느질 자국이 확실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이 소설을 재미있게 만들어준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아무튼 이 소설 속에서 근대라는 모험이 없는 시대의 일상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시시한 일상 속에서 소설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소세키의 고민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고요. 소설이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이 아닐까, 일상을 구성하고 인간을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이게 소설이 아닌가 하는 말들이 오갔습니다.

스나가에 좀 더 얘기하자면 그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기 생각을 다시 부수고, 또 만들고 부수고 하는 과정들이 엄청나게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가 특별히 예민하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상당부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과정들이라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소용돌이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는 거였어요. 옛날의 변강쇠전(?!)이니 춘향전이니 하는 이야기들에서 남녀관계는 연애나 밀당이나 고백 같이 복잡한 것 하나 없는 순정, 몸을 자유로이 쓰던 옛사람들의 사랑을 보여주죠. 그것에 비해 근대인인 스나가는 치요코에게 말을 많이 하지 않고 감정을 많이 드러내 보이지도 않으면서, 자아 손상에 대한 걱정으로 미리 거리를 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두어들여지지 않는 마음으로 번민합니다. 소유욕과 내 아성, 자만심이 손상될 것에 대한 두려움, 콤플렉스, 모든 것이 섞여 있어 더욱 복잡하고요. 상대를 의심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그 변명을 의심하고, 끊임없는 의심과 추궁, 내가 있는 자리를 알고 싶어하고, 나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묻고, 상대의 마음을 붙잡기를 원하는 전형적인 근대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봅니다. 이것은 행인의 이치로로 이어지는 계보이기도 하죠! 산시로가 더 자란 모습이 『그 후』의 다이스케에서 보이고, 친구의 아내를 빼앗은 다이스케의 모습이 『문』의 소스케에게서 보인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춘분』의 스나가가 치요코와 맺어지게 되면 『행인』의 이치로와 형수의 긴장된 부부관계를 낳게 되는 것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2~30대가 알바를 하고 여행을 하는 트렌드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요. 일상을 이탈하는 여행을 꿈꾸지만 사실은 여행을 간 그곳에서도 배경만 달리한 채 일상을 그대로 겪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었어요. 일상을 아예 완전히 벗어날 욕망이나 용기는 없고, 일상 자체를 하찮다거나 좀 낮추어 보는 경향은 있는 그들, 알바와 여행 사이만을 왔다갔다 오가는 그들의 내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직업은 구하지 않고 탐정놀이를 하는 게이타로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얘기를 했어요. 두 발을 완전히 딛고 생활인으로 살아갈 욕망은 없으면서 또 이 일상을 다 버리고 자신을 던져서 새로운 세계로 확 나갈 용기도 없는 자들, 다른 삶에 대한 관심과 욕망은 있지만 자기 존재를 온전히 투신할 정도의 욕망은 아닌 딱 그 정도. 여행지에서의 낯섦과 불편함은 여행을 다녀오면 다 해소가 됩니다. 이색적인 것, 낯설고 새로운 것을 적당히 겪고 다시 돌아와서 일상 속의 편안함을 즐기는 것의 반복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무언가를 스스로 그려나가는 것과는 다른 것이죠. 삶을 바꾸려면 에너지와 힘이 필요한데 지금의 단순한 여행을 벗어난 실험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용기가 없어서건, 귀찮아서건, 사실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서건, 일상을 바꿀 힘이 없어서건. 이것은 게이타로가 생활전선에도 모험적 삶에도 뛰어들지 않는 것과 같은 분위기의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외에도 마쓰모토의 딸의 죽음이 나오는 장면에서, 아이의 죽음이 소세키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역시 소세키의 경험과 연결되는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이 작품 속의 아이의 죽음 앞에 가족들과 주변인물들의 행동들이 너무 가볍고 무신경해 보이는 말과 표현들이 이상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당시엔 죽는 아이들이 많아서 죽음이 훨씬 익숙했을 거라는 얘기도 함께 나누었어요. 그리고 ‘밖의 사물을 머리로 바라본다는 심정으로 눈을 사용한다’는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도 있었고요. 고등유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나, 로맨티스트로서의 게이타로의 이상속 고민과 현실 속 고민 –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고민 - 에 대해서도 얘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이야기가 깊어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이번 주 토론 무척 재미있었고요. 제가 기억하는 걸 정리하자면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호홋.
전체 2

  • 2016-11-29 10:47
    소세키를 언급할 때 고양이, 마음, 산시로 정도가 자주 언급되어서 그 존재조차 몰랐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읽게 되었는데... 와, 전 이게 아주 재밌었네요. 지금으로선 <태풍>이랑 <피안(춘분)>이 개인적으로 베스트+_+b

  • 2016-11-29 14:06
    뱀지팡이에 대한 설명이 소세키의 소설에 대한 정의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얘기하는 재원누나의 놀람 가득한 표정이 글에서 느껴집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