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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동사서독 후기 + 숙제공지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11-29 23:20
조회
369
아.. 후기를 시작하려니 막막합니다. 지난 주는 저녁을 먹고 나서 보충수업까지 했기 때문에 수업시간이 꽤 길었는데, 뭔가 많은 이야기들이 줄줄 있었던 것 같으면서도 이게 딱 말로 표현하려니 또 딱 집어 말하기가 힘이 드네요.  일단 제가 인상 깊게 들었던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볼게요ㅠㅠ

 

38장에 상덕, 상인, 상의, 상례가 나오는 것에서 어떤 규정에 갇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역사적인 인물로든 주변의 사람이든 성인들이든 그 중에서 존경할 만한 누군가를 꼽을 수 있다면 그들의 특징은 어떤 한정된 이미지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엄청 존경받는 사람인데 원리원칙주의자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잖아요. 선을 긋고 누군가를 보지 않고, 뻑뻑하지 않은 사람, 오히려 자유자재하고,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풀어지도록 만드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죠. 우리는 말에 갇히고, 우리가 만든 규정에 갇히고, 자꾸 경계를 세우려고 합니다. 전 특히 공통과제를 하면서 내가 아는 상덕이 이런 건데, 인이 이건데, 하는 식으로 저도 모르게 상을 자꾸 세우게 되어서, 조금만 다른 맥락에서 그 단어가 나오면 유연하게 생각을 펼치지 못하고 어? 하고 자꾸 걸리고, 해석하기가 어렵고, 앞뒤로 꽉꽉 막혀서 옴짝달짝 못하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규정을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흐를 수 있는 경지는 대체 어떤 것일까요.

 

채운샘이 이날 공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요.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우리는 공부를 안 해도 살 수 있어요. 배우지 않아도 얼마든지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갈 수 있죠.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 지식을 만났을 때 느끼는 기쁨을 알 수 없게 된다는 말이었어요. 사람에 비유하면,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난 충분히 잘 살아갔겠지만, 대신 이 사람을 만났을 때의 이 기쁨과 행복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었겠죠. 아, 이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알게 되어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그것처럼 채운샘은, 사람도, 어떤 책도, 어떤 특정한 공부도, 철학자도 작가도, 이것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세계가 좁아졌을 거라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것을(혹은 그들을) 안다는 것이 내 존재 자체가 충만하도록 느끼게 하는 훌륭한 스승들, 이들과 접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만 느낄 수 있는 존재의 충만함, 이런 게 있다고 하셨어요. 오오. 전 솔직히 엄청 감동을 받았어요. 이것 때문에 나도 공부를 하는 것이겠다! 다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이것(노자? 니체? 루쉰? 소세키? 채운샘? 건화? 등등?)을 만나서 느끼는 기쁨! 아직 내가 느껴보지 못한, 그리고 엄청 궁금한 그 벅차는 느낌!

 

‘만족함을 아는 만족(知足之足)’에 대한 얘기에서 샘은 존재자체로 충만해지지 못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심들이요. 우리는 왜 만족하지 못할까요. 우린 공부를 하고, 직장엘 다녀오고, 집안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하루일정을 마치고 나서 몸이 피곤하게 되는 건 당연한 건데도, 피곤하지 않기를 바라죠. 요즘 모든 기사들을 뜨겁게 만들고 계신 그분들이 모든 피로가 싹 풀리는 약물들을 애용하셨다죠. 그런 게 있다면 저도 맞지 않았을까 싶어요. 모르고 돈이 없어 기회가 없었을 뿐이죠. 살면서 에너지를 쓰고 그 대가로 몸이 피곤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도, 우린 힘들지 않길 바라죠. 최대한의 돈을 벌고도 최소한의 힘과 노력이 들기를 바라게 되고요. 그게 탐욕이라고 했어요. 어떤 일을 맡았으면(이를테면 대통령이라든가) 그 자리를 감당하기 위한 어떤 일도 다 감수해야 해요. 정치인도 자리만 맡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따르는 책임들을 모두 같이 짊어져야 해요. 연예인도 인기만이 아니라 욕먹을 것까지도 같이 각오하는 게 당연하고요.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의 모든 것, 그 아이가 귀엽고 예쁘고 건강하고 똑똑하고 예의바르게 자랄 것뿐만 아니라, 그 반대되는 모든 최악의 상황들 – 심지어 아이가 아프거나 죽는 것까지도 – 도 모두 감당해야 돼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욕심이 적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먹고 살 만큼’이라는 표현을 쉽게 사용하지만, 사실 ‘먹고 살 만큼’의 욕망의 크기는 천차만별이죠. 탐심의 기준은 사실 자기 스스로가 아는 것이고요. 족하다고 느끼는 딱 그만큼 이후의 모든 것은 잉여이자 자신의 탐욕이죠.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점점 더(more) 원하게 되고요. 몸은 원래는 필요한 것들만 취하면 끝이고 그 이상은 축적돼요. 지방과 같은 불필요한 축적이 많아지면서 옛날보다 훨씬 많은 질병들이 생겨났죠. 인류전체의 역사로 보면, 농업혁명을 통해 정착, 축적, 약탈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세계의 반 이상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은 다른 한쪽에서는 축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리예요.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에서는 우리의 탐욕들이 제도화되고 있죠. 요즘 한참 유행인 먹방은 미식이라는 말로 아름답게 탐심을 포장하죠. 쾌락주의라고 흔히들 생각하는 에피쿠로스학파는 자신이 신경 쓸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 부와 가난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자신이 신경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즉 스스로의 마음의 평화를 고민하라고 했대요. 아무튼 인간의 탐욕에 대한 이런저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했지만, 역시 지족이라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가장 편안한 방식으로 돈을 벌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은 탐욕이라고 하고, 공부가 쑥쑥 잘 되길 바라는 것도 탐욕이래요. 자기가 쏟아야 할 만큼, 감당해야 할 만큼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답니다. 여기에서 샘은 역시 철학이 없는 삶, 욕망으로만 점철된 삶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며, 어디 가서도 자기 생각을 말하고 글 쓰는 능력만 있으면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고 먹고 살 수 있다, 사유하는 법을 배워라, 등등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최근 격몽의 논어에서 만난 칠조개는 벼슬하는 것이 어떠냐는 공자님의 권유에 아직 자신이 그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겸손하게 인정해요. 그는 어떤 책임을 맡으면 그것은 그 순간 따라오는 모든 번뇌들을 함께 감당하는 것임을 알았던 자였어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 좋은 것들, 잘될 것들만을 보고 나쁘거나 안 좋은 부분들은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거나 외면해버리죠.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우린 모두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환상 같은 걸 가지고 있어요. 자신이 할 수 있고 없는 것, 감당할 수 있고 없는 것을 사실은 잘 모르고, 자신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 굉장히 서툴러요. 그런 채로 대부분 자신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 내 존재가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하려고 시도하고 실패하곤 하죠.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충족된 상태를 꿈꾼다면 그건 이미 ‘만족’이 아니라 ‘욕심’인 것이죠.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야만 만족한다면 그것은 만족이라기 보단 탐심이라고 해야 해요. 채운샘은 ‘지족의족’이란 자신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긍정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셨어요. 내 존재가 있음으로 일어나는 주변의 모든 일, 그 시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은 다 나의 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아무리 나쁘고 힘든 일이라 해도 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것. 그것이 지족이라고요. 공부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면, 우린 모르는 상태에는 불만족스럽고 알면 우쭐해지고 이 두 사이를 쉴 새 없이 반복하죠. 사실은 이것은 알겠다와 이것은 모르겠다, 이 단순한 두 가지 사실만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 그냥 하면 되는 것이죠. 우리처럼 자신의 현존을 긍정하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상에 미치느냐의 여부로 스스로를 평가한다면 당연히 족함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거피취차(去彼取此)와 관련해서 했던 이야기들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두 가지의 태도가 있을 수 있겠어요. 하나는 내가 투사한 기대치와 이상을 만든 후에 그것을 추종하고 충족시키려고 여러 수단들을 동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달해야 한다고 설정한 모든 이상태와 이상세계를 다 거부하고 지금 여기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죠. 저 멀리 있는 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는 것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지족이라는 것은 자연이 내게 지금 여기서 부여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일 수 있어요. 나에게 무엇을 주었다가도 그것을 빼앗는 것이 변화하는 자연의 항상적인 모습이죠. 그 자연을 나는 어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의 질문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가와 노자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요. 노자에서 금지와 도덕이 생기는 것 자체가 불의가 일어나고 있는 세상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했죠. 유가도 도가 없다는 시대 인식에 있어서는 노자와 비슷합니다. 유가는 인간에게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이 있지만 그것이 기질이나 사욕에 의해 가려졌다고 보죠. 그래서 그 도를 회복하기 위해, 그 가려진 것을 걷어내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해요. 다시 말해서 인의예지가 사욕에 의해 가려지니, 그 사욕을 덜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본 거죠. 먼저 인의예지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학습시켜서 변화(교화)시켜야 한다는 게 유가의 생각입니다. 이에 비해 노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은 자연의 변화에 다르고 시공의 흐름에 따르는 것으로 어떤 규정성을 갖지 않는 것이에요. 노자가 생각하기에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률은 특정한 규정성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의예지를 걷어내라고 하는데, 이것이 유가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인 것 같아요.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비슷한 부분도 많이 있어요. 예를 들어 38장에서 노자는, 충과 신이 부족하여 형식적 껍데기인 예가 남는다고 봤는데요. 이 말은 충과 신을 노자도 중시했다는 거죠. 그런데 사실 공자도 형식적인 예는 비판한 바 있거든요.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형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형식도 중요하게 보았지만, 우선적인 것이 마음이라고 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죽음까지 제도가 없이는 우리의 존재를 만날 수가 없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세계에서 노자의 질문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노자가 말하는 안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안정과 불안정을 뛰어넘는 안정이라고 했죠. 유와 무를 뛰어넘는 차원의 도에 대한 얘기도 했고요. 우리의 대립적인 규정성을 뛰어넘는 차원의 실존, 죽음까지 내포하며 가는 삶, 절대적 타자성까지 모두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어떤 최고의 것,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 변이를 내포하는 항상성. 여러 번 들어서 감이 잡히는 듯하다가도 막상 설명하거나 깊게 생각해보려고 하면 어려워지는 중요한 말들입니다. 자기 말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새로운 생각은 별로 없으면서도 머리는 또 복잡하네요. 보충수업까지 길~게 하면서 배웠던 여러 가지 내용 중에서 전 ‘지족’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기억에 남았던 거 같아요!

 

이번 주 과제는 60장까지 읽고 이제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 + 공통과제를 써오는 것이고요(간식과 다른 공지를 댓글로 남겨주길 바랍니다!). 요번 주까지 주역 수업이 휴강인데 혹시 회식을 하려나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요~
전체 4

  • 2016-11-30 00:23
    감동적인 후기네요 ㅠ.ㅠ

    • 2016-12-01 20:56
      계속 끝까지 꾸준히 같이♡♡

  • 2016-11-30 07:08
    만족을 안다는 것이 말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참으로 어렵네요. @.@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그런 실수를 안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들 모두가 어떻게 생각하면 다 탐심인 것이고....... 아직도 노자를 모르겠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읽었네요...! 아쉬워라~

  • 2016-11-30 22:59
    정말 무엇을 하든 감당해야 할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네요. 감당할 것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모든 함정이 숨어 있는듯...(!) 그나저나 후기 원래 제차례였는데...ㅠㅠ 죄송합니다. 그리고 간식은 락쿤쌤과 혜원누나입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