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1월 28일 <큰 비유의 경>후기

작성자
동하
작성일
2016-11-30 00:46
조회
3581
큰 비유의 경

드디어 1. 계행다발의 경을 지나 2. 큰 법문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엔 큰 비유의 경을 읽었는데 부처님의 전생담을 수행승들에게 들려주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수행승들이 둘러앉아 전생담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이 이렇게 모여앉아 이런저런 고민을 얘기하는 모습과 비슷해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좀 가까운 동지적 느낌도 났습니다. 그런데 왜 전생담일까요? 윤회를 끊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기 때문일까요. 부처님은 친절하게도 91겁부터  현생까지의  7분의 부처님의  긴긴 전생담을 이야기해주십니다. 은남샘이 개체의 윤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하셔서 모두들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윤회는 기본적으로 12연기설을 바탕으로 한 인과법칙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개체로서의 행위가 지은 업이 다음 생을 만든다는 점에서 윤회라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윤회를 하게끔 하는가할 때 현세의 집착의 근원인 아(我)는 색수상행식라는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찰나적 존재인데 육신이 소멸하는 것과 함께 개체의 분별심은 흩어져 버립니다. 이 때 수행을 한 보살은 생사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다시 고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현생에서 반복하여 어떤 습관으로 자신을 얽매고 있다면 그 역시 윤회의 체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수경샘의 말씀이 와닿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습에 얽매여 있으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 제 경우는 익숙한 지반이 더 단단하기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윤회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 일텐데 좀 답답하기도 합니다.

큰 비유의 경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인가에 대해 분분했었는데요, 부처님의 서른두 가지의 위대한 사람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상상할 수는 있어도 전체적인 형상을 그릴 수가 없다는 점이 신기했습니다. 천 개의 바퀴살과 테와 축이 달린 모든 형태가 완벽한 수레바퀴를 지닌 발바닥, 손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 손발, 사자와 같은 턱, 사슴과 같은 장딴지, 끝이 위로 향하는 몸의 털, 일곱 군데가 융기된 몸, 하느님처럼 단정한 몸매.. 등등 이것은 태생부터 숨길 수 없는 남다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경계 없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한 것인지 이런 저런 부처님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즐겁기도 했습니다.

공통과제에 있어서 저는 이미지에 이끌려서 듬성듬성 서술하지 말고 주제를 정하고 정확하게 개념을 풀어서 쓰는 습관으로 몸을 바꾸라는 따끔한 충고를 받았습니다. 은하샘은 불교가 탄생이전에 존재에 대한 사유를 했다는 것이 놀랍고 그 이전에 명색과 의식이 있다는 불교논리의 메커니즘이 매번 놀라운데 어떤 의미에서 순환논법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하셨어요. 의식을 통해서 존재는 더 강구해지고 기존인식을 강화하게 되지 않는가, 내가 노력해서 바꾸려고 해도 다시 돌아오게 되지 않는가, 의식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갈 길은 정해져 있는데 무의식적인 노력조차도 헛되지 않는가. 다른 인식을 할 가능성이 없지 않는가 하니 허탈하다고.. 은남샘이 그럼 여기서 깨달음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질문하셨어요. 에델만이 인식의 회로를 바꾸기 위해서는 순환고리에 돌아가는 그 사이에, 그 틈에 개입해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배운 것처럼 수행을 훈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왜냐하면 내 의지가 그 시점을 포착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힌두철학에서도 계속 수행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수경샘의 마무리 멘트가 기억납니다. 몸을 바꾸는 것은 강렬한 욕망밖에 없는데 그것 역시 몸을 바꾸는 방식밖에 없기 때문에 좋은 것을 새기는 수행이 다시 강조될 수밖에 없다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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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01 12:43
    요번엔 일찌감치 올려주셨네요^^ 붓다의 숨길 수 없는 아우라가 물갈퀴와 황금색털로 표현된다고 생각하면 역시 좀 재미나요ㅋㅋㅋ 암튼 이것 땜에 어떤 바라문들은 붓다의 법문을 듣고도 의심해서 그의 혀가 얼마나 긴가를 확인했다고 하니, 문제는 위대한 사람의 특징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해 중생이 갖는 표상이 아닐까 싶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