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11월 28일 인도철학사 후기

작성자
은남
작성일
2016-12-01 00:50
조회
371
브라흐만을 아십니까? 브라흐만이 곧 아트만이요 아트만이 곧 브라흐만입니다. 저는 쌤의 강의로 용어도 낯선  ‘내재적이며 초월적인 존재’ 혹은 ‘궁극적 실재’ 라는 브라흐만에 대해서 상당히 친근함을 느꼈답니다.. 우파니샤드 책을 가까이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아트만은 개체적 차원에서 자아의식이 해체되는 경험, 자아가 해체되어 전체성을 경험하는 것, 어떤 선정에 이르는 경험이라고 합니다. 브라흐만은 그런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우주적 차원으로 볼 수 있는 거라 했습니다. 아트만은 주관의 차원에서 자아가 해체되는 지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내재적입니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내가 경험할 있는 차원과는 다른 나의 경험과 무관하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차원에 있기 때문에 초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관이자  小我인 아트만은 1.육체적인 자아,  2.생기로 된 자아,  3.지성적인 자아,  4.직관적인 자아(투리야) 차원이 있으며 객관이자 大我인 브라흐만은  1.우주(비라트),  2. 우주의 혼(히란야가르바),  3.자의식(이슈와라),  4.아난다 차원이 있습니다.  아난다로서의 최고 브라흐만이 곧 제4위 지성적 자아(투리야)상태에서 실현되는 아트만이며  주관과 객관과 하나된 상태입니다.  보는 자와 보는 눈과 보이는 대상이 다함께 하나의 전체 속에  녹아드는 것입니다.  브라흐만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아니다 ~아니다’ 라는 부정적 표현으로 밖에 달리 말할 방법이 없습니다.  단지 브라흐만의 속성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충만하고 실재적인 존재이며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영(靈)이며, 무수히 많은 실재적인 원천입니다.  구체적 속성은 ‘아움’(AUM)-‘A’창조자 브라흐마, ‘U’는 유지자 비슈누, ‘M’은 파괴자 쉬바-입니다.  이제 다음에 읽을 우파니샤드 책에서는 아움~ 아움~ 이 자주 나올 것 같죠.  뭔가 주문같기도 합니다.

아뭏튼 브라흐만 자체가 아움이라는 생주이멸 전체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브라흐만이 생성부터 파멸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라면 불교는 생주이멸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에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아우르는 뭔가가 없습니다.  불교는 브라흐만 같은 바깥 차원이 없습니다.  불교는 무상한 현존말고는 깨달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불교는 계속 변화하는 현상세계를 넘어가면 변하지 않는 영원의 세계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무상을 어떻게 매순간 살아갈 것인가가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붓다 또한 당시 고행자의 모든 수행을 직접 하기도 하고 선정을 체험하였지만, 그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경지에서 마냥 살수는 없다고 느꼈다는 거지요. 다시 돌아오면 무상한 현실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자각하고 무아를 말합니다. 그래서 쌤은 오히려 힌두교도들은 붓다가 허무주의로 보였을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물론 현세를 고통으로 자각한다는 것은 같다고 했습니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유한한 개아들이 스스로가 홀로 자존한다고 생각하고 전체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분리된 의식, 분리된 자아 의식으로 살아가면서 충만감을 느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배타적인 삶을 살수록 고통스러운데도 스스로 본질을 구하는 것을 망각하고 살더라는 겁니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것은 마야(미혹)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쌤은 인도철학에서 중요한 것이 ‘자기포기’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참으로 역설적인 존재라고도 했습니다. 자기를 유지하려는 욕망과 자기를 해체시키려는 욕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我와 非我가 동시적인 것으로( A가 not A를 포함하듯) 나이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고 싶어하는 것, 내가 아니고 싶어하는 것이 곧 나이고 싶어하는 그런 모순을 갖고 있으며 이것은 모든 생명에게 내재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인도인의 자기포기가 이런 차원에서 개체성을  벗어던지고 더 커다란 자기자신에 이르고자 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아의 아트만과 대아의 브라흐만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거라 했지요.

다시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붓다와 그리스도, 우파니샤드,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고통에서 출발한 것은 같으나 그 다음 과정이 각각 다르다 했습니다.  여기서 윤리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파니샤드는 유한한 존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거라고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브라흐만과 합일이라면 불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표상으로 붙들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거라고 나라고 붙들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내세로 가야한답니다. 그리스인들은 필멸하는 인간들과 달리 불멸하는 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외칩니다.  신들이 우리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걸 어쩌라구~ 그렇다면 윤리가 어떻게 달라질까요?   마~~니 다를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쌤의 강의에서 가장 인상에 남은 ‘신은 자기원인적이다.’ 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브라흐만은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하고 자기원인적이라고 말합니다. 브라흐만이든 신이든 절대적인 존재는 자기원인적이라고 합니다. 왜 절대적인 존재는 자기원인이라고 하는 걸까를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불교는 상호의존성을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직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라고 합니다. 서로 상반되는 말인 것 같으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했지요.  쌤은 자기원인적이라는 해석으로

‘모든 것에 의존하는 존재만이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의존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인과법칙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전체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떤 것도 단독으로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브라흐만은 모든 변화속에서 나타나지만(모든 변화가 브라흐만에 의존해 있지만) 브라흐만은 이 모든 변화를 다 포용하면서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현상은 구체적인 시간성을 겪고 있지만 브라흐만은 이 현상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시간성이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 의존해 있는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데(여기에서 기독교의 ‘신이 애초에 있다’는 전제와 다른 지점이라고) 어디에 의존해 있다고 규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라는 매번의 상태 상태에서 변화자체로 존재하면 변화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쌤은 재차 자기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하셨는데, 자기원인적이라는 말을 이렇게 가져와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고민이 듭니다....유한한 개체의 차원에서는 어떤 것이 자기원인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에 의존하지만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기원인적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등등......

라다크리슈난 인도철학사 첫권이 이렇게 끝났습니다.
전체 1

  • 2016-12-01 11:05
    웅? 후기의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끝났습니다'?ㅋㅋㅋ 담에는 한층 산뜻하고 읽기 쉬운 후기로다 잘 부탁드려요오오. 월욜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