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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2탄 <1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2-01 10:00
조회
596
이번 시간은 ‘니체와 철학하기 2탄’의 첫 날이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예상했음에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것들은 (아마 전원이?) 감이당을 거쳐 오셨다는 것(!) 이런 걸 두고 ‘낙수효과’라고 하나요? 아무튼 지난 시즌을 함께하신 분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오신 분들 모두 반가웠습니다^^ 중도하차하지 마시고 남은 7주 내내 함께해요~~
  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


이번 주에 만나 본, 그리고 이어서 다음 주까지 만나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책일까요? 이 책은 니체가 1883년에서 1885년 사이에 집필한 책입니다. 채운쌤은 <차라투스트라>에 니체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 한 권만 읽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책이라고도 말씀하셨죠. 초인과 영원회귀를 비롯한 니체의 핵심적 개념들이 이 책에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니체 스스로도 너무나 아끼는 (“내 작품 중에서 <짜라투스트라>는 독보적이다.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이 책의 위대함, 그리고 난해함이 단순히 어려운 개념이 많이 등장한다는 데에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채운쌤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 전체에 걸쳐,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인간적인 가치들을 전도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진짜 난점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채운쌤은 우리 모두가 고수하고 있는 인간적 가치들이 전도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하지 않으면 <차라투스트라>는 들어갈 틈이 없는 텍스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쌤은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음악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정답, 해답을 구하는 읽기가 아니라, 음악을 들을 때처럼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을 통과해야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모두를 위한,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전제하고 있는,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인간적인 가치들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모두를 위한 책입니다. 특정한 사유의 경향을 지닌 사람들과만 접속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얘기겠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견고하게 ‘자기 자신’에 머무는 그 누구와도 접속할 수 없는 책이기도 할 것입니다.

2. 초인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려니 너무나 어색하군요. 군대에 있을 때 부대 도서실에 있는 몇 권 안 되는 책 중 하나가 <차라투스트라>였는데, 그때 좀 읽어놓을걸 그랬네요(ㅠㅠ). 그러고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모두가 제목은 알고 있지만 직접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인 것 같습니다. 많은 서재를 장식하고 있겠죠. 그리고 또 이 책의 제목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바로 니체의 ‘초인’ 개념일 것입니다. 니체의 철학을 ‘초인사상’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러한 초인 개념 또한 <차투스트라>라는 책 자체처럼, 모두가 들어만 봤을 뿐 실제로 어떤 맥락 속에 있는 개념인지는 대부분 모르고 있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채운쌤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제가 ‘초인’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에 의해 많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초인으로 번역되는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독일어는 사실 supermen 보다는 overmen에 가까운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니체의 초인은 우리가 히어로 무비에서 만나는 수많은 ‘맨’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채운쌤은 위버멘쉬가 능동적인 개념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위버멘쉬는 인간을 초월해서 어떤 경지에 이른 자(말하자면 superman)가 아니라 계속해서 인간을,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떠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버멘쉬는 인간과 다른, 인간보다 우월한 영토에 이른 자가 아니라 계속해서 떠나기를 반복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니체는 왜 이렇게 집요하게 인간으로부터, 인간적 가치로부터 떠나고자 했을까요? 이때 니체가 문제 삼고자 했던 것은, 인간에게 가장 견고하게 주어져 있는, 선과 악(=도덕), 가치체계,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등입니다. 니체가 이것들을 문제 삼는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항상 현상세계 바깥에 무언가를 수립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플라톤이 가변적인 현상세계 바깥에 불변하는 이데아를 상정했을 때, 이러한 이원론에 의해 세계에는 위계가 생겨납니다. 바로 잠재적이며 불변하는 ‘진짜’세계에 의해 우리 앞에 존재하는 현상세계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에 의해 항상 당위와 도덕이 성립할 것입니다. 불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본받아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관념이 성립하고, 이것이 나타남에 따라서 우리는 보편 윤리를 벗어난 것을 배제하려고 합니다.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오거나 배제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죠. 채운쌤은 이러한 점에서 이상주의는 항상 국가의 논리와 통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국가를 말하고 이상을 말하면서도 실질적 통치와는 거의 인연이 없었던 공자님의 이상주의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그런데 니체의 독특함, 탁월함은 이러한 본질주의, 형이상학, 이원론과 진리를 두고 싸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니체가 비판하는 것은 거기에 깃든 욕망, 힘의지입니다. 힘의지라는 개념이 낯선데, 채운쌤은 이것이 의도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힘의지란 이성, 욕망, 의지 등이 모두 동시에 작동하는 커다란 차원의 몸을 통해서 이야기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성, 의지, 의식 등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서의 욕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니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힘의지, 힘의지의 질을 질문합니다. 그것이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존재의 고양으로 나아가는가 축소로 나아가는가.

그러므로 니체가 의도하는 것은 단순히 이원론이라는 오류의 타파가 아닙니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어려운 것은 바로 이원론이 내포하고 있는 힘의지의 극복입니다. 자기 삶, 자기 현실을 폄하하지 않는 것, 이것은 단순히 의식적으로 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힘의지를 극복하는 것은 당연히 힘의지를 바꿔내는 문제일 수밖에 없겠죠. 그러므로 우리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이원론에 깃든 병적인 힘의지에 대한 비판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의지를 문제 삼고 삶에서 그것을 응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채운쌤은 위기는 견고했던 선, 악의 체계가 무너지는 순간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러한 위기가 올 때마다 더욱 견고하게 이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그것에 맞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채운쌤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마주한 우리는 ‘진짜 민주주의’를 말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혹은 합리적 국가라는 우리 자신의 신념을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문

초인 개념까지 살펴본 후 함께 <차라투스트라>의 서문을 읽으며 강의를 들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차라투스트라>는 웃기다는 것(?) 구절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웃음은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던 것들, 혹은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던 것들이 무너짐에 따라 터져 나오는 웃음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차라투스트라가 최후의 인간, 그러니까 인간적 가치를 극단에까지 체화하고 있는 인간을 비판하자 군중들이 ‘나 그거 마음에 들어!’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그 최후의 인간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가 그대에게 위버멘쉬를 선사하겠다!”라고 말하며 환호하는 부분이 가장 웃겼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철회하는 것보다는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택합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서문에 나타나는 가장 큰 대립은 ‘하늘’과 ‘대지’입니다. 산 위에 올라 고독 속에서 십 년을 보낸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들을 만나기 위해 대지로 내려옵니다. 이야기는 차라투스트라의 하강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바로 성직자입니다. 성직자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며 ‘하늘’을 말하는 사람이고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들에게 베풀어주고자 대지로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하늘과 대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두 사람에게서 대립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베풂’입니다. 여기서는 사제적인 적선과 차라투스의 증여가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성직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그들에게 주려면 적선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위해 구걸하도록 하라!”라고 말합니다. 사제의 베풂, 적선은 구걸과 짝을 이룹니다. 적선은 그것을 받는 자들을 그 상태에 머물게 하는, 계속 구걸하게 하는 종류의 베풂일 것입니다. 이때 적선하는 자의 선함은 마치 방부제와 같은 종류의 독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둘 사이에는 권력 관계가 성립하겠죠. 차라투스트라는 적선을 모릅니다. 그는 그저 베풀고 싶을 뿐이죠. 그의 베풂은 그것을 받는 사람과 자신이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아무튼 하늘과 대지라는 대립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형이상학에 대한 니체의 비판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늘을 꿈꾸는 데에는 대지에 대한 증오가 숨어 있습니다. 땅에 가득 차 있는 지저분한 것들에 대한 증오, 즉 우리가 겪어야 하는 실존의 고통에 대한 증오, 이런 것들에 의해 우리는 하늘을 꿈꾸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완벽한 신, 완전한 이상과 현실의 삶을 해쳐나가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은 항상 세트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하늘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대지에 대한 헌신을 얘기합니다. 이때 대지에 헌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채운쌤은 우리가 대지에 온전히 남아 있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강요되고 있는 환상과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낭비하는 것’이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말과도 통합니다. ‘지금 여기’에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것,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항상 자기가 붙들려 있는 환상과 싸워나간다는 것이 되겠죠.

후기는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간식은 전연미 선생님과 홍명자, 홍명옥 선생님이 준비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아래는 첫 시간의 북적거림을 담은(?)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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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2

  • 2016-12-01 13:01
    말로만 듣던 차라투스트라가 이런 것이었군요! 니체의 초인도 능력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영토를 떠나는 자(?), super가 아니라 over라는 뜻을 가질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해보면 슈퍼맨 같은 표상도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심이지 않을까 싶군요! 하지만 그 욕심을 떨치기란 쉽지가 않네요 ㅋㅋㅋ 떠나야 하는 지점에서 자기 믿음을 견고히 한다는 말이 와닿습니다......

  • 2016-12-01 21:08
    고통도 아픔도 없는 그곳 ㅡ 평생 믿고 생각해왔던 것이, 현실을 증오하고 부정하는 것이었다는 게 계속 충격이에요. 더 아름답고 좋은 어떤 것을 상정하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