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12.05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2-01 14:44
조회
335

많은 꼬맹이들이 그렇듯, 어린 시절 그런 걸 궁금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기 전에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지?(난 볼 수 없었는데, 그런데도 세상이 정말 있었다는 건가?) 나는 어떻게 해서 지금 여기에 있지?(전에는 없었고, 나중에도 없을 거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이런 궁금증이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인식하지 않는 여타의 생물종과 인간의 차이겠지요. 종교와 철학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함이고요.
그런데 채운 쌤 말씀대로 같은 물음에서 시작하되 역사, 문화적 조건 등등에 의해 각각의 사상들은 아주 상이한 길을 걷습니다. 가령 공자는, 서구 철학이 출발점으로 삼는 지성에 대한 믿음과는 아주 다른 문제의식으로 '천명'을 말했지요. 같은 인도에서 출현한 것이라 해도 붓다가 완전한 무상으로서의 우주를 말할 때 그것은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과 큰 차이를 갖습니다.


채운 쌤 설명에 의하면 이 지점에서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주 독특한 지점이 포착됩니다.
기억하다시피 우파니샤드는 세계를 존재케 하는 것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이라는 실재입니다. 지지난 시간에 배웠듯 아트만과 브라흐만은 동일한 것이되 전자가 소아, 주관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대아, 우주, 객관의 영역이라고 했지요.
채운 쌤은 이에 대해 내재성과 초월성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사유라 정리해주셨습니다.


불교적 세계관은 완벽한 내재성의 철학이죠. 어떤 바깥도 따로 상정하지 않으며, 하여 세계 내의 모든 존재는 서로에 의거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발생하고 소멸한다고 말합니다. 발생시키고 소멸시키는 다른 힘이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발생과 소멸을 비껴가는 본질 혹은 실체도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세계와 이와 같음을 여실히 보고 알아야 한다고만 반복해 설법했지요.
이와 달리 기독교적 세계관은 초월론적 철학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쿨렁대면서 변화하는 현상 세계를 가능케 한 다른 세계, 현상 세계보다 더 본질적이고 영원한 세계가 선재합니다. 고로 현상 세계는 영원의 세계로 가기 위해 필요한 길이 되지요.
그런데 우파니샤드를 보면 이 두 가지 감각, 내재성에 대한 감각과 초월성에 대한 감각이 동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가 가능한 기반으로서의 아트만이 있고, 이를 가능케 하는, 다시 말해 그런 ‘나’의 바깥에서 나를 가능케 하는 힘으로서 브라흐만이 있지요.
‘나’의 세계가 생주이멸하는 현상 세계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세계는 그런 생주이멸의 세계를 아우르는, 변치 않는 것 또한 있습니다. 그것이 곧 라다크리슈난이 말하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브라흐만이지요.
모든 게 생주이멸하지만, 브라흐만만은 여기서 제외됩니다. “궁극적 실재는 이 범주들을 벗어나 있”답니다. “그 속에는 인과 관계로 묶인 세계 과정이 들어 있지만, 그 자체는 인과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다. 자존하는 브라흐만은 시공간과 인과 관계에 독립적이다.”
(불교보다 힌두사상이 더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건 그러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말보다는, 공한 가운데 어떤 것이 진리로서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편이 인간의 상식에 더 부합하니까요. 자기를 ‘있는’ 것으로 인지하고, 그것을 출발점 삼아 세계를 재단하는 인간으로서는 ‘있음’의 사유에 훨씬 친숙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이처럼 브라흐만이 인과적 세계의 바깥에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궁극인 만큼 그것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는 지성적 범주 외의 것이 요구된답니다. 우파니샤드는 이를 직관의 영역으로 간주합니다.
이 대목에서 채운 쌤 설명이 흥미로웠어요. 평소 직관이라고 하면 대충 직감 같은 것과 비슷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뭔가 합리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주의적 지평 같은 것으로 퉁치고 넘기기 쉬운데, 채운 쌤께서는 직관을 ‘사유의 비약’으로 풀이하셨죠. 어떤 사건에 당면해 그것을 문제화해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 그것이 직관적 사유라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기존의 전제가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 생각이 비약하는 것, 그건 직관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자면 직관, 그것은 근본적인 지점까지 내려가 문제를 통찰하는 것.
그러니 공부란 곧 직관을 사용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말이 되지요-_- 아무리 글줄을 읽어도 전제가 안 깨지고 도통 생각이 안 나간다면… 그건 우리가 공부를 안 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는;
채운 쌤 왈, “문제는 공부를 수행으로 안 만드는 그 태도에 있다!”
…우파니샤드가 이상하다는 둥 어렵다는 둥 하는 소리를 할 수 없게 되는 이야기지요.


자, 암튼 이렇게 해서 인도철학사 1권이 어떻게 끝나버렸네요. 우파니샤드를 읽으면서 함께 병행해 다시 찾아 읽어보심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힌두 경전을 읽습니다. 훑어보니, 대강대강 읽었다가는 별 것 아닌 소리로 듣고 넘기기 십상인 문장들이에요. 정신 바짝 차리고 읽고 생각합시다.(직관!!)
아시다시피 5개씩 필사해오고, 질문 준비해서 모입니다~!


담주 간식은 미영쌤께 부탁드렸어요.


그럼 담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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