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1.30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2-02 11:36
조회
284
1. 존재의 일의성

우선 지난주에 다뤘던 10장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를 마무리하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채운쌤이 이번 주에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은 ‘존재의 일의성’이었는데요, 이것은 말 그대로 ‘존재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 들뢰즈·가타리는 존재와 생성을 동시에 사유하는데, 그러한 존재론의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존재의 일의성’입니다.

존재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개별자와 절대자, 본질과 생성, 신과 개체 사이에 위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채운쌤은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사유로부터 이 개념을 발전시켰다고 말씀하셨으니 스피노자의 사유를 통해서 이것을 이해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신과 인간 사이에 실체적 구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신과 신이 생산한 것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 생산한 양태들, 즉 우주 만물은 매순간 신을 온전히 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한한 모든 것들의 총합이 곧 신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창조주-절대자인 신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라는 구도를 깨버립니다.

이러한 구도는 개체의 본질과 실존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채운쌤은 달을 예로 드셨는데, 우리가 표현된 달과 별개의 달의 본질(이데아, 형상 등)을 전제할 때, 매번 초승달, 반달, 상현달 등으로 바뀌어가는 달의 모습들은 달의 본질이 덜 표현된 것이거나, 혹은 우리가 달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경우가 되겠지요. 그러나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 상이한 방식으로 변화하며 표현된 모든 것이 달의 표현이 됩니다.

그런데 존재의 일의성이 꼭 차이나 생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번 다른 조건 속에서,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계절은 순환합니다. 매번의 다른 드러냄 속에 어떤 독특한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겠죠. 예로 든 달도 항상 변화하면서 자기 주기를 지닙니다. 지난 시간에도 봤지만 이것은 어떤 전제나 구조, 다른 층위, 초월적인 어떤 것 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관성이 아닙니다. 생성과 차이를 동력으로 하는 독특한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번 주에 읽었던 11고원을 보면 리듬이란 메트로놈에 의해 주어지는 박자와 구분되는 것으로, 이행을 동력으로 삼습니다. 악기 연주 프로그램에 값을 입력하고 기계적으로 완벽한 박자에 따라 연주하게 하더라도 인간이 연주할 때 생겨나는 리듬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존재의 일의성 안에서 독특한 리듬, 일관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다른 윤리를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푸코가 말한 ‘삶의 미학화’를 말씀하셨는데요, 푸코는 여기서 윤리나 도덕 대신에 ‘미학’을 삶의 문제로 가지고 옵니다. 어떤 보편윤리에 의한 당위적 삶이 아니라 매번의 차이를 미학적으로 직조하는 것. <이것임>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직화의 문제가 아니라 조성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조직화의 경우에는 항상 어떤 중심에 의해 목적이나 방향에 의해 부분들이 배치되고 기능, 목적을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조직’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그런 식으로 기능하죠. 그에 비해 조성을 이야기할 때에는 주체나 중심에 복무하지 않는 각각의 세포들, 부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성질을 부여받은 유일한 주체가 해체될 때, 이러한 부분들에 의한 독특한 조성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채운쌤은 되기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셨는데요, 우선 되기의 이중적인 측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되기는 항상 이중성을 지니는데, 이것은 모방과 되기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방의 경우 모방되는 모델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방물에 의해 모델은 더욱 견고한 통일성을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되기의 경우 되기를 하는 쪽이나 되기의 대상이 되는 쪽 모두 변이를 겪게 됩니다. 채운쌤은 디오게네스를 예로 드셨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나는 개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개처럼 네발로 걷고 꼬리를 흔들고 다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누구도 개의 고유한 특성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개로부터 ‘훔쳐’옵니다. 디오게네스가 이렇게 함으로써 디오게네스 자신 뿐 아니라 개 역시 새로운 생성을 겪게 되는 것이겠죠. 들뢰즈가 철학을 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스피노자 자신도 몰랐던 스피노자를 이야기하고, 니체 자신도 몰랐던 니체를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이 들뢰즈가 철학하는 방식입니다. 멋있네요;;

채운쌤은 되기 고원을 마무리하시면서 ‘사이’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애매모호한 것,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등을 표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영역으로 여기죠.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사이를 말할 때 그것은 그러한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니고, 과정과 이행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사이 자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횡단함으로써, 부단히 과정을 지속함으로써 중간에 있는 존재를 나타내는 말이 바로 ‘사이’라는 것입니다.

2. 리토르넬로

리토르넬로가 뭘까요. 솔직히 전 아직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어려워서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ㅋㅋ;) 여전히 감은 잘 안 오지만, 다음 주도 리토르넬로를 마저 다룬다고 하시니 다시 읽고 강의를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일단 11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카오스모스’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가타리의 개념인데, 코스모스, 즉 질서 있는 세계는 항상 어떤 규정성이 없는 차원, 즉 카오스와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는 규정되지 않은 것으로서의 타자와 항상 결합되어 있습니다.

가타리는 사회생태학이 “인간관계의 재구축”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환경운동’이라고 하면 왠지 녹색부터 떠오르고 윤리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타자와 맺고 있는 관계와 무관한, 기부나 자원봉사, 에너지 절약 등과 관련된 것으로 여기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양심을 자극합니다. 그런데 가타리에 따르면 생태학은 곧바로 인간관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구를 지키기’위한 윤리적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새롭게 조성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의 감수성을 바꾸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윤리적이거나 이념적인 실천이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 즉 욕망의 회로 혹은 주파수를 바꾸어 내는 것. 독특한 실존을 만들어 내는 것.

채운쌤은 리토르넬로가 들뢰즈·가타리의 예술발생론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술의 발생을 노동과의 관계 속에서 말할 수도 있고, 의식과의 관계를 통해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예술은 항상 인간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인간주의적 관점을 벗어난 예술론을 보여주는데, 이들에 따르면 예술의 발생은 영토화와 관련됩니다. 영토화를 실행하는 모든 행위는 곧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토화는 나뭇잎을 뒤집는 것과 같은 기능으로부터 벗어난 행위가 만들어내는 표현성에 의해 이뤄집니다. 개체들이 형성하는 고유한 리듬이 곧 영토화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영토가 개체들 사이의 임계적 거리를 표시한다고 말합니다.

이번 주에는 영토에 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역시 강조되는 것은 영토란 코드 자체가 아니라 코드의 여백(탈코드화)에 의해서 출현되는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채운쌤은 이것을 주어진 코드에 의해 영토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코드에 대한 해석이 영토를 만든다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영토를 만드는 행위조차 우선은 코드를 벗어나는 힘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점점 코드/ 탈코드, 영토/ 탈영토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것 같습니다. 영토는 항상 영토 바깥의 힘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은 이만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주에는 리토르넬로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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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03 08:00
    '되기'를 예술에 접목시키면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고 말해도 될까요? 개나 새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짖고 지저귀는지를 표현하는 가를 보는 작업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해석된 것, 이미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무엇일지...... 어렵네요. 뭔가 노자랑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