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유학일기 - 4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1-09 15:01
조회
448
 안녕하세요. 4번째 유학일기입니다. 6번의 강의라는 숫자가 짧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벌써 4번째네요. 이제 2번밖에 남지 않았네요. 아쉽습니다. ㅠㅜ 유학일기 내용은 사실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강의는 매우 좋습니다! (좀 더 길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러면 오늘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제목은 “재조합 DNA에서 인간유전체계 계획까지”입니다. 여기서 인간유전체계를 익숙한 단어로 바꾸면 게놈 프로젝트입니다. 저번시간과 이어지는데, 사람들이 신체를 이해하고 정복하려는 욕망이 어떻게 나타는지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우리 몸에서 단점이라 생각하는 부분들을 제거하고 장점이라 생각하는 부분들만 남겨두는 것, 건강상태를 통제하여 결국 죽음까지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 이것이 게놈 프로젝트가 나올 수 있는 기반이었습니다.


이번시간에는 생명을 분자적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욕망이 말 그대로 생명을 ‘재조합’하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맥락으로 살펴봤습니다. 시작은 1972년에 개발된 DNA 재조합에 대한 얘기입니다. 몬산토의 GMO식품들도 이때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목적은 강력한 살충제에 죽지 않는 작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뿌려진 고엽제도 몬산토의 살충제에 해당됩니다.) 과정을 잠깐 얘기하자면, 일단 살충제를 뿌립니다. 그러면 거의 모든 작물들뿐만 아니라 땅에 있는 박테리아까지 죽는데, 여기서 아직 살아있는 박테리아들을 조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살충제에 대한 내성을 작물의 DNA에 붙입니다. 그러면 박테리아라는 균과 식물의 합성, 마치 종을 뛰어넘는 교배가 일어납니다. 유전자 조작의 다른 예도 있습니다. 만약 토마토에 추위에 대한 내성을 입히려고 위해 심해에 사는 넙치의 유전자를 붙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강한 추위에도 얼지 않는 토마토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면, 생명이 ‘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종을 뛰어넘는 무분별한 교배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말할 때 ‘순수한 나’를 얘기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렇다고 ‘나’와 타의 구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외부의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면역체계(압력이나 농도의 조절까지 포함해서)를 통해 ‘나’라는 개체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은 이런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면 이제 ‘나’는 무엇인지, 생명은 무엇인지....... 복잡합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정교한 기술로 유전자 조작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가위(CRISPR-Cas9)라 불리는 기술인데, 이것을 사용하면 원하는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붙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생태계에는 항상 먹이사슬 꼭대기에 머무는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천적이 있을 수도 있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멸종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계속 변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서는 무엇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생존의 이점이 되었던 것이 순식간에 죽는 요인이 될 수도 있고, 불필요한 부분이 반대로 생존의 이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무엇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전자를 조작합니다. 작물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손에 닿는 모든 생명을 인간의 편의에 맞게 개량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개량을 해야 할까요? 이런 논리에 의해 미국에서 단종법, 강제 불임시술을 시행하는 법이 통과됐고,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일어났습니다. 과학기술이 분명 인간에게 편리를 주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윤리가 무엇인지를 항상 되새기지 않으면 제2의 단종법이나 홀로코스트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게놈 프로젝트의 목표, 유전자를 해독하는 것 자체는 2000년 6월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유전자들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김동광 선생님은 ‘창발’에 대해 얘기하셨는데, 이것은 하부구조에서 나타나지 않는 특성이 상부구조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원자에서 나타나지 않는 특성이 분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게놈 프로젝트는 하위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할 뿐이지 좀 더 상위단계에서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개미 한 마리만으로는 ‘개미’라는 집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개미가 있으면 여왕개미가 있듯이, 각자의 역할과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성까지 알아야 ‘개미’라는 곤충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원론적 사고는 작은 것이 근본적인 것, 쪼갤 수 없는 그 무엇이야말로 본질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작은 것일수록 본질에 가깝다는 것은 단순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각각의 단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성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체와 유전자는 도식적으로 대응될 수 없고 거기에는 어떤 목적성도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됐음에도 여전히 유전자를 정복하지 못한 까닭은 DNA에 어떤 목적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DNA를 분류하자면, 실제로 우리의 몸을 움직이는데 실질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3% 정도이고, 정크DNA라 불리는 나머지 97%는 중복되고 기능하지 않습니다. 게놈 프로젝트와 같은 환원론적 사고로는 정크DNA의 역할을 규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 기능한다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태껏 개체가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정크DNA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의 몸이 지금 환경에 꼭 맞게 기능하고 적응했다면, 새로운 상황에 닥쳤을 때 적응할 여력이 있을까요? 중복되고 당장 쓸모가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변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생명복제 자체는 불가능한 기술은 아닙니다. 미국의 ‘돌리’처럼 인간도 복제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지 않는 것은 복제생물은 기형이 많기도 하고, 태어난다 하더라도 얼마 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을 복제하는 것은 그만큼의 윤리가 걸린 일입니다. 도중에 ‘실패’한 것을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어디서부터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과연 생명이란 무엇일지, 인간의 윤리라는 것이 인간의 존엄만 지켜지면 되는 것인지, 그런데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또 무엇일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어쨌든 초기 연구자들도 유전자 조작 기술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졌습니다. 이미 발명된 기술, 그것도 매우 유능한 기술을 다시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유용한 만큼 위험성도 크다고 생각한 과학자들은 세계적으로 모여서 회의를 했고(아실로마 회의라고 하는군요.) 유전자 조작에 관한 방침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없던 생각이 갑자기 생겨서 세계회의를 열고 과학기술을 규제하지는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이슈화되기 전까지 유전자 조작에 대한 개인들의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살피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간편하게 다양한 식품들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만의 음식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도 그 지역에서만 날 수 있는 식품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지역을 넘어서 지구 반대편의 식품까지도 쉽게 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희귀했던 식품을 지금은 너무나도 흔하게 접합니다. 과연 이런 편의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자동으로 딸려온 것일까요? 과학기술의 발전에는 노력 외에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았을까요? 편리함에 익숙해져서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DNA에 대한 환원론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쌍둥이만 봐도 우리는 선천적인 비슷함이 있기 때문에 둘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쌍둥이를 키우는 과정을 보면, 주로 똑같은 옷을 입히고 똑같은 교육을 받게 합니다. 어쩌면 똑같은 환경 속에 계속 몰아넣는 결과로 비슷하게 자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범죄나 열등함의 요인을 주로 개인의 DNA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사실 범죄가 발생한 것은 사회적 제도의 실패의 결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만 해도 실제로 흉악범들이 있기 보다는 벌금을 내지 못해서 수감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열등하다고 낙인찍는 것도 사실은 기득권층의 이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김동광 선생님은 강의 도중 여러 책을 소개해주시는데, 그 중 폴 뇌플러의 <GMO 사피엔스의 시대>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맞춤형 아기’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맞춤형’이라고 할 때 그것은 누구의 ‘맞춤형’일까요? 흔히 우리는 내 아이가 머리 좋고, 운동을 잘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 ‘좋음’들은 과연 어떻게 규정됐을까요? 첫 시간에 살펴봤듯이, 그것은 분명 기득권의 관점과 다르지 않고 곧 우생학의 논리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나치가 채용한 것이 우생학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DNA나 어떤 본질적인 것이 우리의 몸을 기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김동광 선생님은 단지 우리 신체만 봐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현재 우리의 시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지하철이라고 했습니다. 지하철 노선표를 보면 출발지에서 목적지에 이르는 공간과 걸리는 시간이 명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의 약속은 거의 역 근처로 잡고, 자신의 시간을 얘기할 때 역에서 걸리는 시간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있는 수많은 공간을 놓칩니다. 그래서 역에서 멀어질수록 낯선 세계를 만나고, 지상에서 길을 찾을 때도 핸드폰 어플을 통해 길을 찾지 헤매면서 찾지 않습니다. 예전에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만 했습니다. 방향은 어디인지, 교통편은 무엇이고, 근처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만 그나마 덜 헤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핸드폰이 정확히 알려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묻는 것보다 핸드폰으로 검색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빠르고 간결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리함을 얻은 대신에 이런저런 만남들을 잃어버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웃이란 것도 남는 것이 있어서 나눈다기보다는 부족한 것을 서로 주고받으며 도울 수 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엘리베이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스마트폰을 봅니다. 저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제 스마트폰으로 별걸 다 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동영상을 보는 것은 기본이고, 배달음식을 시키고, 선물을 하고(선물코드를 보내는 것), 계좌이체를 하고 요즘은 결제까지 됩니다. 어떤 광고는 아예 여러 카드나 편의시설을 다 스마트폰에 넣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만큼 스마트폰이 만능도구라는 것을 알려주는데, 이것도 우리의 욕망과 분명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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