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천개의 고원> 에세이 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17-01-13 20:58
조회
354
1월 11일 <천개의 고원> 세미나가 5명의 발표자와 5명의 미발표자(?) 그리고 채운샘을 모시고 진행되었습니다.

에세이를 쓰지 않고도 참가하는 뻔뻔함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애정과 의리라고 주장하면서^^

사실 거저 얻어 온 것만 같아 죄송 감사 쑥스러운... 복잡한 감정입니다.

특히나 부끄럽지만 들뢰즈 강좌가 끝나고 빠른 속도로 들뢰즈를 잊어 가던 일인으로서 여러모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채운샘의 코멘트를 들을 때마다 매번 내 글이 아닌데도 나를 향한 지적이라고 느껴지는데 이번에도 물론 그랬습니다.

칭찬은 각자의 발표자들 몫이고 지적은 모두 제 것인양 듣게 되는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락쿤샘과 현옥샘은 ‘되기’개념을 가지고 에세이를 쓰셨습니다.

채운샘께서는 두 분 다 ‘되기’를 특별한 존재양식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를 지적하셨는데요.

‘되기’는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를 설명하는 개념이며 보편적 존재의 상태를 뜻하며, 단지 중심을 향하느냐 소수적인 것을 향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개념들에 비해 친근하게(?) 들리는 ‘되기’ 개념이 실재적이라는 말을 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왔는데요, 저 또한 되기를 어떤 다른 상태라고 상상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락쿤샘 제목의 경우 되기를 通할 줄 아는 역량으로 정의한 것은 좋았으나 통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왜 우린 통하지 못하고 사는 것인지가 공부와 연결되어서 구체적으로 쓰여져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개체가 왜 무리이고 다양체인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자신의 절실한 경험과 배운 개념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를 찾는 일은 저에게도 늘 숙제입니다.

텍스트를 만나고 그 개념으로 기존의 생각을 해체시키고 나의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개념을 통해 사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얼마나 꼼꼼하고 치밀하게 사유해야 하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매번의 고통스러운 실험입니다. 저에게도 말입니다.

현옥샘은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공부와 접목시켜 밀고 나가시는 힘이 대단하시다고 생각됩니다.

생성으로서의 되기라는 제목이 갖고 있는 동어반복을 채운샘께서는 지적하시면서 철학의 개념은 도구나 사유의 방법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해석이고 세계를 새롭게 출현시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생성은 곧 욕망의 과정이고 욕망하는 존재의 본질이 생성이다. 생성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왜 고통이고 공포인지에 대한 설명이 좀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되기’는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끊임없는 운동이라고 강조하셨지요.

다시 수정해서 쓰겠다고 하시는 현옥샘 참 멋지십니다.

두 분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있는 자신을 또 확인하곤 했습니다. 본질주의나 목적론적 사고는 얼마나 시시때때로 제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또 발견했다고 해야 하나요.

혜원샘은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주제로 글을 쓰셨습니다.

3장 도덕의 지질학은 들뢰즈가 존재를 바라보는 자연주의 기획이라고 하셨지요.

사실 저도 이중분절이나 왜 내용과 형식이 아니라 내용과 표현인지가 아직도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는데요. 혜원샘 글에서도 개념이 실제 자신의 삶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가 나와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존재는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런 걸까 이게 인간주의적 사고가 아닐까 하는 사유를 좀더 밀고 나갔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저도 3장을 읽으면서 자연학적 개념을 빌려서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흥미롭게는 생각되었지만 더 나아가진 못했었는데, 지층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경험으로 가져와서 분석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채운샘은 정리는 글을 쓰기 전 단계라고 하셨죠. 글은 가장 수렴적인 자기 생각이라구요. 그런데 저도 항상 글을 쓰며 개념 하나를 절실하게 생각하고 살아내지 못하고, 정리하는데 그치는 일을 자주 저지르기 때문에 여러 번 들어도 샘의 코멘트는 늘 새롭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이 자기와 결별하는 과정이라는 말씀.. 아 이것이 참으로... 실험이고 혁명이 아닐까요?

건화샘은 일상의 지속 도주의 지속이라는 제목으로 미시정치와 절편성을 다루었는데요.

‘일상이 도주다’라는 말을 다시 읽어보니 멋있네요. 일상을 자기 식으로 다르게 규정한 것을 구체적으로 밀고 나가서 썼다면 그리고 청년 세대 욕망이 어떤 배치에서 이루어지는지, 금수저, 헬조선 같은 담론이 배치로서의 욕망을 못보고 있는 점들을 분석하며 글을 전개해나갔더라면 좋은 글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하셨지요.

채운샘이 말씀하신 대로 경험적 사안이나 분석하고 싶은 문제를 놓치지 않고 가면서 배운 개념들로 계속 봐야 한다는 말씀은 제게 와서도 콕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하고 항상 문제는 한쪽에 밀어 넣고 개념차원에서만 정리하고 마지막에 그 문제와 개념이 이어진 걸 분석했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에 뜨끔하기도 했구요.

어찌 되었든(이 말을 쓰게 되네요^^) 청년 두 분은 제겐 많이 이뻐 보입니다.

수경샘은 얼굴성을 가지고 에세이를 쓰셨는데요. 잘하는 부분을 좀 참고 못하는 부분에 매달리라고 하셨지요.

채운샘은 얼굴성 장에서 탈영토화 공식을 얘기하는 건 인간이야말로 가장 탈영토화된 것이 가장 재영토화됨을 보여준다고 하셨습니다. 비인간이 무엇인가 얼굴의 해체를 의미화하기 위해서도 얼굴에서 문제삼는 게 뭔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마지막 부분에 얼굴 해체로 가면 좋았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얼굴성이라는 개념이 저는 쉽지 않았는데요. 얼굴 해체는 소수자 되기이고 코드화를 벗어나는 흐름이다. 끊임없이 달아나는 게 중요한 것이지 아무 코드도 만들지 않는 것은 허무주의라는 말씀도 남습니다.

언어를 사용해서 언어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얼마나 언어에 얽매여서 살아가는지요. 욕망하는 힘이 주체적으로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욕망하는 배치 위에서만 욕망한다는 것을 배웠으면서도 종종 배치를 사유하는 것을 잊곤 합니다.

채운샘은 들-가의 철학은 뭘 일차적으로 보느냐의 문제라고 하셨지요. 양자택일의 철학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 뭘 하느냐가 중요하다구요.

존재들과의 마주침에서 나의 최선을 다할 뿐, 이게 목적론을 갖는 게 아니라는 말씀.

존재가 규정되서 존재가 아니라 규정할 수 없는 뭔가가 나로부터 흘러가고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걸 배우는 것이다. 이랬을 때 열리는 지평이 다르다는 말씀이 크게 와닿습니다.

받으신 코멘트들은 이미 각자 새기셨을 터이고 저는 제게 와닿는 부분들만을 중심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에세이야말로 우리의 실험의 장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말입니다.^^

각자 에세이를 갖고 씨름하고 몸부림친 시간만큼 써내고 발표하신 샘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하고 수고하셨습니다.

끝나고 음주없이 건전 모드로(늘 그런 건 아니겠지요?^^) 맛있는 만두와 딤섬으로 유쾌한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락쿤샘 감사해요~^^

사실 으~ 제가 규문에서 글을 처음 써보는데 홀랑 날렸습니다. 이런 경우가 잘 없었는데 완전 의욕이 상실되었다가 다시 쓰면서 여전히 날린 글에 미련을 한동안 갖고 씩씩거렸습니다. 그 전 글이 특별히 나은 것도 아닐 텐데도 말입니다. 갖고 있던 것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게 뭐 이리 힘든지 새삼 배웁니다. ㅎㅎ
전체 3

  • 2017-01-14 13:46
    생각보다 일찍 올려주셔서 감사할 따름 ^^ 수요일에 계속 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많이 바쁘실지... 그러시다면 아쉬울 따름! 즐공하십시다 선생님.

  • 2017-01-15 18:01
    에세이 발표는 정말 좋은 복습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꼼꼼한 후기 덕분에 복습을 한 번 더 한 기분이네요ㅎㅎ. 감사합니다~ 절탁Q에서 봬요^^

  • 2017-01-18 11:02
    미발표자로라도 참석하여 배우고 또 익혔어야 했는데...라는 씨잘데기 없는 후회를 마구 불러일으켜 주신 현정쌤! 후기만 읽고서도 참 많은 걸 배우고 느꼈습니다. 고맙,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