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우파니샤드 11-12편 후기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7-01-17 22:28
조회
395

분명 뭔가가 있어 보이기는 한데 그 뭔가가 도무지 잡히질 않아, 꿈길을 걷는 것 마냥 허공을 걷는 것 마냥 그렇게 읽어온 우리의(저의!) <우파니샤드> 읽기가 끝을 향해 가고 있네요. 이번 시간에는 11편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와 12편 ‘까우쉬따키 우파니샤드’ 두 편을 읽었습니다. 이제 13편에서 18편까지 비교적 짧은 우파니샤드 몇 편을 읽으면 끝이 납니다. 제 경우엔, 그나마 ‘브라흐만’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말들이 좀 친숙하게 입에 붙으려고 하니 끝이라는 생각에 아쉬움도 좀 남는 것 같습니다. 원시적인 것과 고차원적인 것, 물질성과 정신성, 초월성과 내재성을 종횡으로 넘나드는 정신없는(?) 사유 체계를 보면서 덩달아 정신없어 하면서도, 어쩌면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통하는 지점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고, 모든 것을 이원화해서 바라보는 나의 고질병을 돌아보기도 했었답니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근원적 일자로 상정하고 있는 브라흐만과 그것의 개체적 표현이랄 수 있는 아트만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많은 얘기들이 오갔습니다. 일체 만유를 존재케 하는 근원적 힘이라 볼 수 있는 그것은, ‘숨’이나 ‘음식’과 같은 신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마음이나 의식과 같은 정신적인 것들을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고 헷갈리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심신에 동시에 작동하는 걸 보면 동양 철학의 ‘기’와 흡사한 무엇인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그 ‘氣’가 초월성이나 법칙성을 갖고 있지 않으니, 그렇다면 ‘理’와 연관지어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했구요.


수경샘께선 그토록 우파니샤드에서 ‘숨’이나 ‘음식’을 강조하는 것은, 외부와의 소통 없인 어떠한 존재도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외부성이야말로 어떤 존재를 그것으로 만들어 주는 결정적인 조건이기 때문일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공감들을 많이 하신 듯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동양적 수련과 명상의 현장 어디에서나 숨이나 호흡은 핵심적인 요체로 강조가 되고 있기도 하고요(은남샘~~^^).


채운 샘께서는 ‘아트만’이, 신보다 앞서 존재하는(신은 아트만의 창조물이다), 전체적인 우주의 생명력이나 에너지가 아니겠냐며, 애초부터 이 세계를 관념화한 신이라는 허구적 존재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그것(생명력)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우파니샤드 사유의 독특함이고, 신체성과 물질성이 중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셨죠. 그리하여 ‘의식’이라는 것도 단순히 정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닌, 생명의 근원적인 무의식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닐테고, 이것을 숨이나 물, 불, 마음 등과 같은 다양한 현상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아트만은 어떤 대상을 통해 설명하든, 개체로 드러난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것으로, 무지란 그 근원적인 것이 아닌 그것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들을 중시하고 전부인 양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세속적인 차원의 소유욕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당연히 공부나 수행이란 것도 결국 아트만이 세계의 본질임을 깨달아 그것과 하나가 되는 일이 될 테지요.


이처럼 아트만과 만나는 일이 개별적인 자아나 주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일체 만유와 하나가 되는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통하는 면이 없다 할 수는 없겠는데요,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얘길 해 주셨네요.


호정샘께서 과제에 쓰신 것처럼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의 내용 중에 먹는 것과 먹히는 것의 관계를 보면, 둘이 적대적이지 않고 상호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나아가 어느 한쪽에서의 生이 다른 한쪽에서의 死가 되는, 둘의 이같은 관계가 우주를 지속케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의지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연기와 연관되는 면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둘 다 삶의 지향점이 무소유로 갈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그렇고요. 그런데, 우파니샤드의 경우엔, 언어라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없이 언어로 표상된 세계 자체를 실체화하고 있는 데 반해, 불교의 경우엔 세계를 언어로 고정화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비판함으로써 일체의 분별에 얽매이지 말자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에서는 연기적인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지만, 우파니샤드는 현상의 바탕에 깔닌 근원적 일자를 상정하고 있다는, 하여 불교는 어떠한 목적지나 도달처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우파니샤드는 개체성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에 합치되는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해 주셨답니다. 그밖에도, 우파니샤드는 진짜와 가짜 세계를 구분하는 가운데 참을 지향하지만, 불교는 이 둘의 구분 자체를 넘어가고 있다는 점도 큰 차이가 될 수 있겠다고 하셨네요.


이처럼 둘 사이의 언표나 깨달음의 과정 등이 유사해 보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모든 사유체계가 그렇듯 우파니샤드 또한 어떤 식으로 맥락화하느냐에 따라 확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불교만이 아니라 다른 문명권의 종교나 사유 등과 비교해 보면 또 다른 흥미로운 면들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의 공부 과제로 삼아도 좋을 듯요~~^^.


그나저나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샘께서 택원이나 우선씨에게 던진 질문에 담긴 내용처럼, 이 우파니샤드 사유에 대한 공부와 지금 나의 삶의 연관성을 붙잡는 일일 것이고, 존재의 변환을 도모할 수 있는 키를 그 속에서 찾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자면, 누누이 지적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쉽네 어렵네 징징대지 말고 수행하는 자세로 텍스트와 맞대면하는 가운데 절박하게 질문을 끌어내고 끌어가는 힘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파니샤드 만세!!!

전체 2

  • 2017-01-18 10:14
    ㅋㅋㅋ 만세. 담시간에 공통과제 및 에세이 주제 준비해오시는 것 모두 잊지 마셔요. 저도 곧 공지 올릴게요.

  • 2017-01-18 20:10
    빠름 빠름. 퍼니 퍼니. 후기 재밌네요. 게다가 세심하게 세미나 구성원들 이름을 다 불러주시고. 접힌 페이지를 열면 현옥쌤이 나오겠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