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절탁M] 02. 14. 첫 수업 후기 및 공지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7-02-16 15:38
조회
512
드디어 절차탁마 M 수업이 시작되었어요!!

문학수업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역사수업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내가 알고 있던 그 역사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 ‘신들의 계보’를 읽다보면 문학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문학과 역사의 경계가 없이 이것저것이 두루섞인 낯설고 이상한(!) 것을 배운 느낌입니다. 폴벤느의 역사 이야기의 인트로를 읽고 나눈 토론과, 실증주의나 아날학파 등의 역사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강의와, 신들의 계보 낭송 및 토론으로 이어진 수업은, 거의 모든 것이 새로웠기 때문에 하루에 배우는 양 치고는 엄청나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저의 접시 같은 깊이, 혹은 소주잔의 크기를 진작 채우고도 줄줄 흘러넘치는 분수 앞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느낌이랄까요. 대접이나 냄비까지는 아니더라도 밥공기 정도만 되도 훨씬 좋을 텐데요! 줄줄 흘러 넘치는 것들이 너무 아깝지만, 주제 넘는 욕심은 내려놓아야겠죠..). 소화가 되든 안 되든 그냥 꾸역꾸역(?) 따라가기만 해도 올해가 지나고 나면 뭔가 많이 남을 것 같아 기대가 됐어요. 물론 과제를 충실히 해오지 않으면 따라가는 과정이 무척이나 버겁(고 고통스럽)겠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요. 토론이 익숙하지 않은 저에겐 이 소규모로 진행되는 세미나가 강도 높은 트레이닝 같이 느껴집니다. 수경언니의 웃음으로 위장한 날카로운 질문들엔 땀이 뻘뻘 나서 매번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되더군요. 아, 정말로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더울 때 쉽게 벗을 수 있는 지퍼달린 옷도 함께 준비하고요.

 

1, 2, 3교시가 서로 무관하지 않은 것 같으니, 그냥 전체적으로 기억나는 것들을 정리해 볼게요.

 

우리가 아는 ‘역사’라는 것을 말할 때는,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떨어져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전체의 시간을 조망할 수 있다는 시선을 전제하고 있는 것인데요. 이렇게 시간의 깊이가 생겨난 것은 근래의 일이라고 해요. 19세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니, 마르크스니 하는 인간과학을 통해 인간이 비로소 깊이를 갖게 된 것이죠. 생물학적으로도, 시간이나 공간적으로도 내면의 깊이를 가진 근대적인 인간이 탄생하게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역사라는 것도 근대에 이와 함께 탄생한 것이고요. 이전까지의 역사는 과거의 일을 단순 기록한 것, 조사나 탐구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같은 것은 그 시대의 채집기록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요. 지금과 같이 민족적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둥의 깊이를 가지고 서술하게 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고요. 서양에서도 국민국가(nation)가 형성된 19세기에 공간, 민족, 국경의 문제가 생겨나고 개인의 정체성을 국가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면서 역사가 만들어져요. 국가와 민족의 문제가 역사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19세기 독일, 프랑스 등에서 대학 중심의 역사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으로서의 역사, 실증주의 역사관(훔볼트, 랑케..)의 출발이죠.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역사를 정립하면서 어떻게 과거를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규명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돼요. 이때 어떤 관점에서 역사를 쓸 것인지의 방법론이 중요해지고요. 당연히 그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료(일차적으로 실록과 같은 공문서) 중심의 역사학을 강조하게 되는데, 공문서를 사료로 삼았으니 국가의 학문, 즉 보수적이고 발전사적인 관점의 역사, 왕조의 시간이라는 하나의 단선적인 시간만 있게 되죠.

이에 문제를 제기하며 19세기 말, 20세기에 아날학파가 등장합니다. 아날학파는 과연 역사가 과학인가, 공문서의 기록만을 사실(fact)이라고 취급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해요. 사람의 삶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역사의 서술을 일원적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사료 자체를 확장시키자는 발상을 한 것이에요. 그래서 문인들의 일기나 편지, 민간인들의 문서나 심지어 문학작품까지 사료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이전까지와 달리 사료의 내용들이 급격히 재미있어집니다. 이제는 그 시대의 다층성을 보게 된 것이죠. 기존의 실증사관이 통사라면 아날학파는 특정시대를 다룹니다. 기록된 표면의 사건들은 더 심층적인 구조들과 함께 가는 것으로, 무관해 보이는 심층의 다른 기록들을 다각적으로 함께 보아야 한다는 획기적인 생각을 한 것이에요. 아날학파는 1세대(루시앙 페브르, 마르크 블로크), 2세대(페르낭 누구?), 3세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이번에 과제로 읽게 된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의 저자인 폴벤느는 3세대입니다.

폴벤느는 정통역사학에서도, 프랑스의 주류역사학인 아날학파에서도 이단이라고 해요. 실증주의는 표면적인 사건들을 인과관계로 연결했고, 아날학파가 표면의 기록뿐 아니라 심층적인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둘 다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가의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면, 폴벤느는 역사는 현재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순수한 호기심으로 보죠. 즉, 폴벤느는 역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관점을 완전히 버린 것으로, 역사학 자체가 실천임을 온몸으로 보여주던 아날학파(아날학파는 과거를 가지고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했는데, 마르크블로크 같은 사람은 레지스탕스 활동도 했대요)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아날학파 이전, 사건 자체로 다시 복귀하는 느낌도 있는데요. 그는 사건을 어떻게 ‘줄거리화’할 것인가는 역사학자의 주관이라고 봤어요. 그러니까 역사학자가 사건을 ‘엮어내는’ 방식, ‘이야기’에 강조점을 둔 것이죠. 역사는 사료로 존재하는 팩트와 팩트 사이의 공백들을 엮어내는 것이기에 허구적인 것을 포함하며, 그 중간의 공백들을 얼마나 잘 메꾸느냐가 역자학자의 이야기능력이라고 본 거예요. 얼마나 그럴듯한 논리로 전체의 줄거리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들을 ‘이해’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 공백들은 아직 계열화되지 않은 것, 그의 표현으로는 ‘비사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폴벤느에 따르면 대문자 역사, 역사의 주류였던 하나의 역사, 오랫동안 지속된 실증주의적 역사만이 아니라 역사가가 사실들을 얼마나 잘 엮어내고 사람들을 이해시키느냐에 따라 다양한 역사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료로 남아있는 흔적들을 엮어내는 방식은 사실도 실측도도 아닌 다양한 이야기로서의 역사인 것이죠. 그래서 역사에 소설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야기가 구성되기 전의 단순한 정보들의 나열 상태에서, 그 정보들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맥락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에요. 그런 면에서 보면 상상적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게 되고요. 물론 맥락화의 과정에는 역사가의 해석이나 관점, 문제의식이 들어가는 것이 필연적인데요. 그가 사료를 채택하는 관점, 그러니까 역사가가 무엇을 사료로 간주하느냐에는 그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무엇을 궁금히 여기는가, 왜 그가 하필이면 그 시기의 그 공간을 문제 삼게 되었는가, 현재를 사는 그에게 그 과거가 무슨 의미인가 등의 문제들이 연결돼요.

여기서 토론 시간에 수경언니가 해준 말들이 떠오르는데요. 우리가 역사를 안 한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었어요. 남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들, 사건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건화하고 그것들을 맥락화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일이라면, 우리는 역사학적인 질문과 관점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다고요. 모두가 당연하게 느끼는 것들로 둘러싼 현재를 살지만, 질문을 가진 자에겐 이질적이고 돌출적인 부분들이 느껴지게 되고, 그것들을 사건화시키고 붙잡고 가는 것이 역사학적인 공부일 수 있다고요. 우리의 에세이도 그런 것이죠(그런 것이어야 하겠죠. 너희들은 도대체 생각이 없냐고, 왜 절실한 질문이 전혀 없냐고 울부짖는 채운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상식과 관습이 편안하기만 한 사람에겐 질문이 없고, 사건화를 시키는 게 쉽지 않게 돼요(저의 요즘 고민도 이런 종류의 것입니다만..). 우리가 하는 공부의 의미는, 이렇게 당연하게 지나갈 수 있는 일상에서 이질적이고 낯설게 보이는 것들을 발견하는 것, 나의 시공간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만나는 사건들을 맥락화하는 것, 우리 시대에 대한 역사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 도무지 빤한 생각 말고는 그 어떤 새로운 발상도 떠오르지 않는 채로 계속 ‘새로운 발상을 써오라’는 과제를 떠맡는 고통과 벗삼은 요즘의 저에게 특히나 절실하군요. 오늘도 여전히 괴롭습니다.. 아무튼, 채운샘께선 ‘역사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일 년 내내 품고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 여러분 모두, 일 년 내내 파이팅입니다.

 

다음 주 과제는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부(처음부터 139p까지) 읽고 사건 정리 및 함께 얘기하고 싶은 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 몇 줄을 적어오는 것이고요. 신들의 계보는 68쪽 506행까지 읽는 것인가요..? 페이지랑 분량이 계속 바뀌어서 제 책엔 표시가 서너 개 되네요... 잘못된 공지는 댓글로 수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간식은 윤순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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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6 15:57
    신들의 계보는 403행, 스튁스와 팔라스의 자녀들까지 읽어오심 됩니다. 다음 시간에도 해당 부분 전체 낭송한 뒤 함께 토론하기로 해요. 각자 인상적인 구절, 의문나는 대목들을 잡아오심 좋겠죠^^ 투키디데스 역사가 이제 드디어 시작인데 두근두근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