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301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2-16 18:55
조회
307
지난 시간에는 들뢰즈가 보여주는 철학과 예술의 새로운 이미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자, 철학이란 무엇인가? 채운 쌤은 선문답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셨지요.
일상적 대화를 한 번 떠올려볼까요. 우리가 말이 잘 통한다고 할 때 그것은 상대가 나와 공통된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죠. 그래서 서로 공감하기 쉽고 어떤 사안에 대해 합의에 이르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대화 도중 실은 전제가 불일치함이 드러났을 때가 있는데, 그때 우리는 상대에게 실망하거나 혹은 화를 내겠지요. 만약 처음부터 공통된 전제를 찾을 수 없는 상대와 만났다면 아예 무시하거나 회피하기 십상입니다.
단지 공부할 때만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그야말로 숱한 전제들 위에서 보고 말합니다. 이 길 대신 저 길을 택할 때, 이 말 대신 저 말을 옹호할 때, 부지불식간에 여러 전제들이 작동하지요. 내 습이 된, 너무 자연스러워 공기 같고 피부 같이 들러붙어 있는 전제들이 소위 말하는 ‘인격’을 이룹니다.
선문답은 바로 그 전제들을 아작 내기 위한 방편 중 하나지요. 그것은 문답 내지 소통이라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부수고, 말[言]에 대한 믿음을 부수고, 질문자가 가지고 있던 온갖 전제들을 벼랑 아래로 추락시키고 맙니다.
사실 선문답을 보고 있노라면 스승이 제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충격을 선사하는 게 전부가 아닐까 싶어집니다. 스승은 앎을 전수하는 자가 아니라, 제자가 그간 가지고 있던 온갖 전제와 습을 대면하게 하는 자, 제자가 그에 놀라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자처럼 보이니까요.
소크라테스가 한 것도 그것이지요. 젊은이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를, 자기 앎이 놓인 허방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 소크라테스가 시장에서 한 일은 그것이었으니까요.

기실 모든 공부란 이처럼 충격으로 시작해 질문하고 사유하는 과정인데, 채운 쌤 설명에 의하면 이 같은 충격과 폭력의 좋은 제공자(?)를 니체와 들뢰즈는 예술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미의 재현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먼저 상정한 뒤 그와 닮은 것을 재생산하고 위계 짓는 것은 예술과 아주 동떨어진 일로 들뢰즈는 여기지요.
채운 쌤 설명에 의하면 들뢰즈의 예술론은 '생성'을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술, 그것은 재현불가한, 고유한 생성, 생성되는 힘, 생성시키는 힘에 다름 아닙니다.
고흐가 남긴 화폭을 보며 우리는 이것이 태양빛, 이것이 카페테라스, 이것이 밀밭… 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햇살과 카페를 그려놓은 소위 ‘이발소 그림’과 고흐의 그림이 주는 정서의 울림, 힘의 강도상 차이를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감지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고흐의 그림이 현재 아트 옥션에서 얼마를 호가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무관하게 그것이 위대한 것일 수 있는 것은, 그 위에는 우리가 아는 햇빛, 우리가 아는 별빛, 우리가 아는 농가가 아니라 뭐라 말할 수 없는 힘 자체가 뭉개진 물감과 격렬한 터치로 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흐는 햇빛을 그린 게 아니라, 그때 자기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중인 어떤 고유한 빛깔을 좇습니다.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 꽃이 아니라 자기 눈이 감지하는 미묘한 진동을 따라갑니다.
해바라기와 자기 눈이 만났을 때 만들어지는 그 고유한 순간의 정동, 고흐의 화폭에는 그것이 담겨 있을 따름이지요.
그래서 다양한 쪽빛, 다양한 노란빛의 온갖 힘들이 소용돌이치는 그의 그림에 사람들은 그토록 매혹되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감응하는 것은 재현된 해바라기와 밤하늘이 아니라 힘의 생성입니다.

그러므로 예술은 폭력적으로 육박해오기 마련입니다.
내가 생각한 아름다움, 내가 생각한 자연, 내가 생각한 인간, 내가 생각한 사랑의 이미지를 박살내고, 모든 아름다운 것/고귀한 것을 부정하는 것과 더불어서만 새로운 생성이 가능해지는 탓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은 언제나 낯설지요.
베이컨의 고깃덩이, 아르또의 비명, 존 케이지의 노이즈… 이런 작품과 맞닥뜨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사유를 시작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사유의 주체가 '주체'(동일자)가 아님은 물론이고요.

채운 쌤 설명 중 들뢰즈와 밥 딜런의 상호 되기가 개인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고원>을 읽으면서도 늘 뭔가 안 잡힌다 싶었던 게 상호 되기 내지 이중의 되기였거든요.
채운 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들뢰즈가 밥 딜런의 리듬, 억양, 깊이 등등을 훔침으로써 밥 딜런-되기를 했을 때, 밥 딜런도 들뢰즈-되기에 이른다.
이 말만 들으면 이해가 잘 안 되지요. 훔친 한쪽이 달라지는 것이야 그렇겠습니다만, 어째서 다른 한쪽도 변이한단 말인가.
아마도, 되기를 주체의 되기로 받아들이는 한 이것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듯 싶습니다.
채운 쌤께서 잠깐 <앙띠>의 도입부를 언급하셨었죠. 모든 것은 작동 중인 기계다. 카프카의 말을 빌려오자면 세계 자체가 수많은 기계들에 의한 끊임없는 프로세스다.
그러니까 여기 이런저런 기계들로 이루어진 들뢰즈가, 수많은 다른 기계에 접속될 수 있는 기계의 집합인 들뢰즈 기계가 있습니다.
들뢰즈는 때로는 카프카의 기계와 연결되고, 때로는 세잔과, 때로는 아르또, 고다르 기계 등등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새로이 연결접속될 때마다 하나의 기계는 다른 기계의 어떤 것을 훔쳐오고 어떤 것을 흘려보내면서 새로운 것을 생성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기계의 연결접속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어느 한쪽만의 생성변환이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두 기계 모두 새로운 생성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 그게 연결접속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므로 들뢰즈가 밥 딜런의 리듬과 색채를 훔쳐왔다는 것인즉, 그것은 밥 딜런의 사유의 파편, 리듬, 어떤 속도가 또 다른 생성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들뢰즈가 밥 딜런의 무언가를 훔침으로써 밥 딜런-되기에 이르렀을 때, 밥 딜런 또한 새로운 생성 속으로 들어갑니다. 왜? 반복하지만 되기란 주체의 되기가 아니라 각각의 기계의 고유한 되기니까.
세계는 기계들의 부단한 되기에 의해 운동되고 매번 새롭게 구성되면서 스스로를 지속시킨답니다.

다음 주는 채운 쌤의 스케줄 상 안타깝고도 아쉽지만 휴강합니드아~~~(^0^) (>0<)
달력을 보니 다음 수업은 3월 1일이네요. 두 주 간 즐겁게 책-기계, 들뢰즈-기계와 접속하셔요.
담 시간에는 카프카 수업 마저 진행됩니다. <중첩>과 <디알로그>도 수업 때 함께 다룬다 하시니, 도전해보시길^^

후기는 곧 혜원이가 올릴 테고, 간식은 현옥쌤+태욱쌤께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3월에 만나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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