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2.15 절차탁마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2-19 16:30
조회
275
170215 절차탁마 후기 / 혜원

 

선문답에서는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똥 막대기’라고 대답합니다. 이건 부처가 정말 똥 막대기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처’가 ‘무엇’이냐는 어떤 고정된 진리에 이르려는 질문의 의도 자체를 깨버리는 ‘한 방’입니다. 철학은 한 가지 진리에 이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무엇인지,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이 무엇인지, 이런 ‘무엇’에 이르려는 순간 치고 들어오는 ‘똥 막대기’, ‘삼 세 근’과 같은 대답. 이러한 대답들은 단지 ‘무엇’만을 구하는 질문자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전제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되묻게 만듭니다. 이렇게 철학은 진리라는 종착지가 아니라 막다른 길 앞에 서도록 만듭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것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니체의 철학>에서 “아무도 언짢게 하지 않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질문의 대답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기쁘기보다는 막다른 길에 서게 되어 침울하게 되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 그 끝에서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막다른 길을 뚫고 나갈 새로운 개념을 하나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철학이 SF 소설과 같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SF 소설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그것이 개입한 세계를 창조해 냅니다. 그리고 그 개념을 써보니 좋다고 설득하는 것이죠. (어쩐지 광고 문구 같은^^)

그런데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늘 막다른 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익숙한 것에서부터 사유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여기 익숙한 것에는 진리에 대한 의지뿐만 아니라 상식, 혹은 재인식 따위도 포함됩니다. 이런 것들이 아니라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마주침들, ‘똥 막대기’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 그리고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건들에서 사유는 발생합니다. 들뢰즈는 이렇게 작동하는 것, 익숙하지 않은 지점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작동을 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예술을 듭니다.

예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철학에서 ‘진리’와 같은 ‘美’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이든지 그것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봐야 하는 반면 그것의 이미지는 영원한 것으로 붙들고 싶어 합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썩을테지만, 그 와중에도 ‘진리’라든가 ‘美’를 추구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술은 그것들을 부정한 자리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생성들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예술이 “우리가 진리로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합니다. 진리라는 종착역, 안정을 추구하는 전제에서 벗어나는 사유의 발생, 예술은 그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힘들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늘 진리에 대한 선의지가 있다고 상정되는 형이상학 전통을 깨부수는 외부성이 바로 예술인 것.

그런데 이런 창조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들뢰즈는 ‘훔침’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들뢰즈는 밥 딜런의 즉흥성, 리듬, 깊이를 훔쳐내는 강의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들뢰즈의 밥 딜런-되기. 그리고 ‘-되기’는 늘 이중적이어서, 들뢰즈가 밥 딜런을 훔쳐내는 순간 밥 딜런 역시 들뢰즈가 됩니다. 이 둘 사이의 마주침 ‘사이’에서 생성은 일어납니다. 들뢰즈는 생성이 시작도 끝도 아닌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는데요, 가령 수영을 할 때 물에 들어가기 위해 나만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 또한 우리가 들어갈 때 조성이 바뀝니다. 나와 물의 신체가 다른 신체로 생성되는 사건, 그것이 나와 물 ‘사이’에 일어난 생성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리듬을 배우고 또 서로에게서 훔치면서 생성이 일어납니다.

로렌스는 휘트먼을 훔쳐 ‘공감’이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공감은 흔히 말하는 동감과 다릅니다. 공감은 마주침을 통해 다른 정서가 생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들뢰즈는 온갖 예술가와 철학가에 대해 쓰고, 또 영화관에 가지도 않으면서(!) 영화에 대한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끌고 들어온 예술과 철학을 자신의 개념의 근거, 그러니까 예시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끌고 들어온 작품 속에서 개념을 만들고, 또 그 작품 속에서 개념이 작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가 만든 개념들은 진리를 추구한 결과가 아니라 마주침의 결과, 공명 혹은 공감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공감의 조건은 마주침에 자신을 내던질 용기. 자신의 영토를 떠나는 자들에게 새로운 진동을 마주칠 기회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니체는 예술가가 ‘의사’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세계가 앓고 있는 낡은 감각들의 징후를 참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도하게 보고 느끼고 사유한 삶으로 인해 으스러집니다.” 이때의 과도함은 힘의 과도함, 모든 것을 심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건을 포착하고 징후들을 포착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행위가 예술인 것. 아무리 평화롭고 안정된 곳처럼 보이더라도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먼저 균열의 징후를 읽어냅니다. 달아나는 것. 이때의 도주는 다른 길이 있어서 그쪽으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달아나는 것이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주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다른 길을 상정하고 달아나는 것, 도피처를 찾아 달아나는 것이라고 여겨질 때입니다. 예술이 현실의 도피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가장 위험한 오해입니다. 도주는 실재적인 문제이며, 삶을 창조하고 또 무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예술은 저항이며 생성, 일정한 방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을 그만두는 저항행위입니다. 채운쌤은 여기서 예술가의 금욕을 읽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금욕이란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풍요로운 금욕을 구성하는 행위이며 가장 저항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체 2

  • 2017-02-19 17:17
    예술톡톡 강의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위대하다고 불린 작가들의 작품 그 어떤 것도 모두 영감을 받아 뿅! 하고 나타나지 않았군요. 전시회를 가서 작품을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무에서 무엇을 창조해내는 것처럼 극한의 고통을 감당 해야겠죠. 그러니까 그만큼 위대하다고 얘기할 수 있겠죠. 흠....... 전 고통스러워지면 당장 편해지고 싶은 육체이건만 ㅋㅋ;;

  • 2017-02-23 22:00
    프린트를 훑어보니 형광펜을 꽤 많이 사용했네요 ^^ 알고 있지만 자꾸 까먹는 문장 하나 옮깁니다.
    예술은 "우리가 진리로 죽는 것을 막기 위해(도덕의 계보학)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