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길 위의 생] 헨리 밀러와 그리스 거인

작성자
선민
작성일
2017-03-09 18:26
조회
454
◎ 길 위의 생_헨리 밀러_<그리스 기행>

헨리 밀러와 그리스 거인

1. 경작된 땅 너머로

1941년 헨리 밀러(1891.12.26.~1980.6.7.)는 한 편의 여행기를 발표합니다. 미국에서 발표하게 된 첫 책이었고, 자아의 또 다른 차원이 쓴, 온전히 즐거움으로 가득 찬 책, 그 스스로가 만족했던 단 하나의 작품이었습니다. 제목은 『그리스 기행 – 마루시의 거상(巨像)』. 1939년에 그가 다녀왔던 그리스 여행에 대한 글이었지요. 그리스로 떠나기 전 그는 파리에 있었습니다. 프랑스 생활은 10년 째로 접어들고 있었어요. 창작에 있어서는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북회귀선』(1934), 『검은 봄』(1936), 『남회귀선』(1939)에서 밀러는 뉴욕과 런던에서의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도시적 삶이 은폐한 경이로움, 한계 없는 즐거움, 깊은 아름다움을 탐구했습니다. 작품에서 표현된 도발적이고도 과감한 외설성은 성과 죽음의 ‘급진적 자연스러움’을 문제 삼으며 문명이 내세운 모든 상식을 뒤집어보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밀러는 미국과 영국에서 소란스러운 외설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지요. 미국에서는 그의 모든 작품이 금서로 분류되었습니다.(『북회귀선』은 1961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밀러의 급진적 사유는 은밀한 경로로 계속 미국으로 흘러들어갔고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1939년 밀러는 돌연 휴식을 선언합니다. 유럽에는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지요. 근대 문명의 비인격성, 이념의 살육전이 곧 시작될 태세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에게 창작의 영감을 준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언론과 편견에 찬 비평가들이 그를 파렴치한으로 몰면서 책의 출간과 독자와의 만남을 방해했을 때, 파리의 지성인들은 문화의 터부에 대해 서슴없이 밀러와 대화를 나누려 했었습니다. 덕분에 밀러는 파리에서 정신적 안정을 취한 뒤, 자신감을 갖고 창작을 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고상했고, 친절했으며, 정치와 예술을 비판할 수 있는 온갖 철학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시민들의 도시. 모든 제도는 합리에 또 합리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밀러는 안정된 사회 제도, 고상한 이론들, 교양있는 친구들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이 서서히 굳어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습니다. ‘다시 친구를 사귀고 적을 만들자. 경작된 땅 너머를 바라보자. 나 자신을 시험하자!’

나는 프랑스라는 정원이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조국에서 받은 충격과 상처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다시 건강하고 튼튼해지는 순간이 오고, 그때가 되면 프랑스의 분위기가 더 이상 자양분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갈망을 품는다. 이 단계에서는 프랑스의 정신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친구를 사귀고 적을 만들고 담장과 경작된 땅 너머를 바라보고 싶어진다. 생명보험이니 질병 수단이니 노령연금이니 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어진다.(헨리 밀러,그리스 기행)

2. 이야기, 무한으로의 초대

파리에서 나와 같은 집에 살았던 베티 라이언이라는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리스에 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백포도주 한 잔을 마시면서 세상을 떠돌아다닌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의 대화는 독특했다. 우리가 먼저 그녀가 공부하기 시작한 중국어와 중국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다 금방 북아프리카와 사막으로 넘어가서 내가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부족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가 갑자기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 강가를 걷던 이야기를 꺼냈다. 햇빛이 아주 강렬했다. 나는 눈이 멀 것 같은 그 햇빛 속에서 최선을 다해 그녀의 뒤를 쫓았지만 그녀가 길을 잃어버리자 나 역시 낯선 땅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에 귀를 기울이며 방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그리스 기행)

헨리 밀러가 그리스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파리의 하숙집 친구가 묘사해준 그리스는 너무나 독특했거든요. 미국으로 돌아와서 쓴 이 여행기의 초반부는 그리스로 자신을 이끈 것은 오직 이야기였음을, 그리스에는 환상과 현실이, 거짓과 참이, 중국어와 그리스어가 서로를 타넘는 마법 같은 시간이 있었음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로 가득합니다.

내가 아는 그리스어 단어는 대략 열 개쯤 되고, 그가 아는 영어 단어는 세 개쯤 되었다. 이렇게 제한된 어휘를 감안할 때, 우리는 놀라운 대화를 나눴다. [촌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나의 중국인 흉내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나는 중국어를 한마디도 모르면서 그에게 중국어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역시 자기만의 중국어로 내게 대답했다. 나 못지않게 훌륭한 실력이었다. 다음 날 그는 통역을 데려왔는데, 순전히 내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기 위해서였다. 나는 중국에 가본 적이 있다면서(이것도 거짓말이었다), 그 나라를 묘사한 뒤 아프리카로 넘어가 피그미족과도 한동안 같이 살았다고 말했다. 촌장은 이웃 마을에 피그미족이 몇 명 있다고 했다. 무도병 환자 같은 우리의 춤은 한없이 계속되다가 결국 바다에서 끝났는데, 우리는 물속에서 게처럼 서로를 물고 비명을 지르고 지상의 온갖 언어로 고함을 질러댔다. (그리스 기행)

유럽 문명에 질려버린 작가들이 비서양 세계를 일부러 찾아가서 신선한 공기를 맛보려고 했던 일은 종종 있었지요. 헨리 밀러가 좋아했던 D.H. 로렌스도 사르디니아 지방을 비롯해 이탈리아 곳곳을 돌며 여행기를 썼습니다. (『이탈리아의 황혼』(1961),『바다와 사르디니아』(1921)) 그런데 로렌스가 주로 문명 밖 세계의 요모조모를 묘사하기에 주력했다면, 헨리 밀러는 그리스인듯 그리스 아닌, 문명도 야만도 아닌 인상들로 자신의 여행기를 채웁니다. 그래서『그리스 기행』을 읽고 그리스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지요. 게다가 이 인상은 늘 그리스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는 지상의 모든 말이 오고가는 길목이었어요. 이 책의 부제도 ‘마루시 지방의 위대한 인간’입니다. 그 인간은 지상 최고의 이야기꾼이었죠. 헨리 밀러는 그리스라는 도화지 위에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흘러넘치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럼 밀러가 만난 이야기의 달인에 대해 한번 살펴볼까요? 그는 마루시 사람 카침발리스입니다. 황소 같은 체격, 맹금의 끈기, 표범의 민첩성, 양의 부드러움, 비둘기의 수줍음. 몸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작고 섬세한 손. 대단한 동정심의 소유자지만 인정머리라고는 한 털도 없는 존재. 애인도 자식도 없고, 맥주를 마시고 바지에 오줌을 싸면서도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나이. 그는 풍경 발견의 귀재였습니다. ‘그가 찾아낸 풍경’ 안으로 걸어 들어가 새의 노래를 듣고, 바람 냄새를 맡고, 강물에 발을 담그기를 좋아했지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카침발리스가 어느날 베이징을(물론 그는 중국어도 모르고 베이징에 가 본적도 없었습니다만) 묘사했습니다.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중국 지도를 면밀히 연구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는 교묘하게 도시의 골목과 건물의 위치를 바꾸어버림으로써 ‘카침발리스의 베이징’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를 낮이나 밤이나 걸어 다니는 게 아닙니까? 어찌나 열심히 베이징을 탐사했던지, 나중에는 베이징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해 며칠을 고생해야 했습니다. 카침발리스는 실제와 꿈을 분리하지 않았고, 정보로 덕지덕지 뒤덮인 현실 너머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오직 더 잘 느끼기 위해 잠을 자고, 새벽에 문득 자다가 깨서는 이야기 나눌 사람을 찾기가 일쑤였지요. 매순간을 황홀하게 느끼는 카침발리스! 그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는 카침발리스! 헨리 밀러는 그의 작은 입을 보며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세계, 말을 넘어서는 무한한 세계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은 지상의 공기 때문에 질식한 물고기의 입처럼 소리 없이 계속 벌어져 있었다. 한번은 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이고 입안의 그 소리 없는 공간을 사진처럼 면밀히 살펴보기도 했다. 목소리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도대체 어떤 기적으로 지구의 뜨거운 마그마가 이른바 말이라는 것으로 변하는가? 우리가 원자, 분자, 육체, , 신 등 모든 생명체를 다시 배열한들 무엇이 우리를 막겠는가? 우리의 행보가 말에서, 행성에서, 신성(神性)에서 멈출 이유는 없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아직 말해야 하는 위대한 것들, 말을 넘어서는 것들, 무한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 그 어떤 언어의 술수로도 포용할 수 없는 것들이 남아 있다.(그리스 기행)

3. 위대한 인간을 위하여

헨리 밀러는 미국 여권 소지자라는 이유로 쫓기듯 태평양을 건너야 했습니다. 1939년 말 유럽은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돌입했고, 그리스의 외국인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가 마루시의 거상에 관해 펜을 들기 시작했을 때에는 미국도 거대한 전쟁(태평양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에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헨리 밀러는 간단히 결론 내릴 수 있었지요. 그는 자유로워져 있었습니다. 선악에 대한 이해, 문명의 공과(功過)에 대한 연구,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 모든 집착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대신 그를 채운 것은 책임감이었습니다. ‘말이나 글로는 움켜쥘 수 없는 저 무한한 삶에 봉사하자!’ ‘글로써 사유를 붙들어 매고, 이데올로기로써 사회를 장악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자!’ 헨리 밀러는 열린 삶,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갈 수 있게 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생의 증오와 비참을 뛰어넘게 할 위대함을 찾는 일에 인생을 걸기로 했던 것이지요. 『그리스 기행』을 마무리하면서 헨리 밀러는 카침발리스처럼 살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마루시를 아는 사람들은 그곳에 웅장한 면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카침발리스에게도 웅장한 면은 조금도 없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의 역사를 전부 뒤져봐도 웅장한 면이 조금도 없다. 하지만 사람이 철저하게 진정한 인간이 되면 누구에게나 거인처럼 대단한 면이 생겨난다. 우리가 아테네 중심부의 버스 터미널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 그가 내게 남긴 마지막 인상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주 충만하고 풍요로우며,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기 때문에 우리가 작별을 고할 때마다 그것이 겨우 하루 동안의 작별이든 영원한 작별이든 결과에는 전혀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속이 찰랑찰랑 차 있는 상태로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의 내면도 흘러넘칠 정도로 채워준다. 그들은 차고 넘치는 삶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어느 편이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는 편을 가르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위험에 습관적으로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스스로를 불사신처럼 강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만큼 영웅적인 인물이 된다. 내가 버스에 앉아있는 그를 두고 돌아섰을 때, 그의 둥글고 기민한 눈은 벌써 다른 광경들에 푹 빠져 있었다.(그리스 기행)

 
전체 3

  • 2017-03-09 20:07
    묘하게 동양적 분위기가 나는 얼굴..(좀 더 점잖고 슬림한 달라이라마 같기도ㅋㅋㅋㅋ) 직접 그렸다는 저 그림도 아주 좋은데요. / 소설에서는 그렇게 문장들이 속도감 있게 꿈틀꿈틀거리더니(번역본이었습니다만) 에세이는 또 사뭇 다른 스타일이네요.놀라워라. 0.0

  • 2017-03-10 11:17
    그림을 보고 사진을 보니까 옆집 아저씨 느낌이네요. ㅋㅋㅋㅋ / 여행할 때 좋은 건 낯선 공간에 내가 놓이는 순간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베티가 건넨 이야기가 참 좋았습니다. 여행하면 마구마구 길을 잃어야 하고, 잃을 수밖에 없죠. ㅋㅋ 그러면서 길을 묻고, 사람들이나 동물과 접촉하다보면 더 이상 이 낯선 곳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일부로서 녹아드는 느낌입니다. 헨리 밀러의 그리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점점 궁금해지네요 @.@

  • 2017-03-11 00:05
    70대의 헨리 밀러에게는 '불교 승려' 분위기가 났었다고 그의 친구들이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기행>에서 밀러는 예술에서 배운 것을 삶에서 실천하겠다고 선언하지요. 그것은 아마도 어디서나 길을 잃고, 어디서나 길을 닦는 식으로 수행하는 삶이었나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