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3.21 절탁m후기

작성자
미리
작성일
2017-03-27 23:38
조회
392
3.21절탁m 후기

후기가 늦어 정말 죄송합니다.

 

주중에 에세이 주제가 주어지고 이번 시간엔 주제에 따른 대략의 개요를 잡아오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먼저 에세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공통적으로 지엽적인 문제를 얘기한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어요. 역사팀은 투키디테스의 역사기술에서 연설을 관통하는 힘에 대해 보려고 하면서도 그가 역사를 서술하는 관점이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 나는 역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등의 의문에까지는 도달하기 어려웠고요. 신화팀은 주로 철의 종족에 관심이 많았는데, 역시 헤시오도스가 그려내는 신화의 이야기에서 고대인들의 삶의 관점을 찾아내는 것, 텍스트 분석을 세밀하게 하지 못하는 것 등이 문제로 지적 되었지요. 에세이 주제에 대한 이해와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모두 부족하여, 각자의 주제를 심화시키지 못하고 수경샘의 의문에 질문과 답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다 보내게 되었어요. 텍스트를 더 꼼꼼하게 분석하여 다음시간에 개요를 다시 잡아오기로 하였습니다.

 

이어 베르낭의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유> 1장에 대한 발제와 토론을 진행 하였지요. 1장은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의 종족신화에 대한 분석이었는데, 토론의 많은 부분이 철의 종족과 디케와 휘브리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일과 날>에 보면 5가지의 종족 유형이 나옵니다. 황금종족-은종족/ 청동종족-영웅종족/ 철의종족이 그들이죠. 이들 다섯 종족은 종족간 서열이나 비교급의 관계가 아닙니다. 종족들의 관계에는 두 가지의 구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각 쌍이 올바름과 오만(디케와 휘브리스)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금 종족에 대해 은 종족이 오만으로 인해 열등하고, 청동종족이 영웅종족보다 더 지나침이 있는 관계이죠. 다른 하나는 각 쌍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차원이라는 것인데요. 한 쪽에선 금-은의 한 차원이 있고 다른 쪽은 영웅과 청동의 두 번째 차원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라고 헤시오도스가 말하는 철의 종족의 영역이 있습니다.

 

철의 종족은 첫 번째 분류에서 짝을 이루는 종족이 없었는데요, 철의 종족의 자신 안에 디케와 휘브리스를 모두 가지고 있는 종족이죠. 이 이중성을 가지는 철의 종족에 대한 토론이 가장 많이 이루어졌는데요.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철의 종족에 속하는 것을 무척 슬퍼하며 철의 종족 보다 더 빨리 죽거나 더 늦게 태어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을 텍스트로 토론할 땐 유한한 인간 세계와 판도라가 열어버린 재앙에 대한 한탄이 아니냐 했었는데요, 베르낭의 해석은 재미있습니다. 베르낭은 순환적 시간이 있다고 해석합니다. 각 종족마다 고유한 시간과 시대를 가지며 이 시간은 도식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이고 가역적인 시간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헤시오도스의 그 말은 다른 측면에서는 희망으로 읽힐 수도 있는 것이죠. 이 시간의 순환은 현재와 미래라는 구조로 선과 악을 말하는 다른 이중성이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더불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준 것에 대한 복수로 제우스가 인간에게 재앙을 주기 위해 보낸 판도라도 이중성의 의미가 아닐까 이야기했지요. 그녀는 불사의 여신을 닮은 아름다운 아름답고 사랑스런 모습으로 여신에게 수공예 기술과 매력을 부여 받았지만 헤르메스는 ‘개의 마음과 교활한 기질’도 함께 넣어주었죠. 그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재앙을 껴안으며 기뻐하고’ 늘 이중적 상황에 처하게 되죠. 풍요를 원하면 노동을, 삶은 늘 죽음과, 자식을 가지기 위해 여자를 얻으면 책임도 함께 따르는 것 등이 그것이지요. 헤시오도스는 매일 노동을 해야만 한 철 끼니를 미련 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무척 고통스럽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미 프레임이 짜여 진 조건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중의 선택지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철의 종족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헤시오도스에게 성실한 노동은 최고의 정의이죠.

 

그는 제우스의 질서를 따라 성실하게 노동하며 사는 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동생 페르세스에게도, 재미있는 것은 왕에게도 한다는 것이죠. 그가 부당하게 소송을 통해 형의 상속 재산을 갈취하려는 페르세스를 계속 부르는 것도 헤시오도스-페르세스의 이중성으로 보이는데요, 인간은 누구나, 자신도 예외 없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철의시대를 살아 가야함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종국에는 폭행보다 정의가 우세’ 하므로 정의에 귀기울 일 것을 말하지요. 그러면서 왕들에게는 굽은 판결을 하지 말고 정의를 구현하라고 경고 합니다.

법칙 안에서 사는 것이 덕목이라는 일상의 윤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철의 종족의 자율성에 대해 이런 논의가 끝나는 말미에 수경샘이 정리를 하며 종족이 3분 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지요. 인간의 질서에서 3개의 구조(금-은, 영웅-청동, 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왕, 사법/ 전사/ 농부/에 대한 예시인거죠. 금-은종족이 신을 모시는 것과 관계된 종족이라면, 청동-영웅 종족은 곡식도 먹지 않고 싸움만 하는 전사 종족이지요. 그리고 현세의 농부가 있는데 민주정의 구조와 닮아 있죠.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종족이 두 번째 종족인데 여기에서 악이 생겨났다는 거 였지요. 토론할 땐 정의가 모두의 관심사라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은 데 깊이 들어가진 못했네요. 동일한 얘기를 반복한 거 같네요. 또 신들의 계보를 만들고 <일과 날> 앞에 배치한 이 구조와 신들이 계보 지어지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했지요. 토론을 많이 한 것 같은데 해결 안 된 문제들을 그대로인 것 같은 느낌으로 종료했는데요, 문제는 신들의 계보를 더 꼼꼼히 읽는 것과 거의 관계가 있는 것이었지요. 그래도 베르낭의 명쾌한 해석 덕에 조금 흥미 있는 접근을 해 본 것 같습니다.

 

외부강의가 끝나신 채운 샘 강의가 마지막 시간에 있었는데요, 에세이 주제에 대한 또 한 번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근본적인 것들을 계속 놓치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신화에 대한 에세이는, 헤시오도스가 어떤 관점에서 인간을 보는가? 인간이 삶을 질서화 하는 근거로써 신을 요구하는데, 인간을 보는 어떤 지점에서 신적인 질서를 끌어오는 것인지, 왜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는지가 드러나게 써야 한다는 말씀이셨구요, 역사도 투키디테스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전쟁, 죽음 약속 등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장치들이 있는데, 이것을 끌고 가는 힘은 무엇인지? 또 이를 통해 투키디테스로 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잘 정리하며, 구체적 사건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역사관점을 끌어내 보는 걸 목표로 쓰라고 하셨네요.

 

투키디테스의 역사의 5장에는, 라케다이몬의 이주민인 멜로스인들을 공격하러 온 아테나이와 멜로인 의원들이 협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화에 많은 것들이 가로지르고 있는데요, 노모스와 퓌지스, 정의냐 힘과 이익이냐, 티케(운)과 그노메(지혜)의 대립 등이 그것입니다. 잠깐 보면 절대적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아테나이와 라케다이몬 사이에서 중립을 원하는 멜로스인들에게, 아테나이는 말합니다.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 통하는 이야기이다. 정복당하여 목숨을 잃지 말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살아남아 달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멜로스인들은 보편적인 선(善)을 지키는 것이 이익이라고 합니다. 운(티케)를 보는 입장도 다릅니다. 멜로스인들은 전쟁의 승패가 수의 많고 적음보다 운에 따라 결정되므로 행동할 때 희망이 있다고 하지요. 이에 대해 아테나이인들은 예언이나 신탁이 괜한 희망을 품게 하여 파멸로 인도한다는 입장입니다. 아테나이는 정의보단 이익과 힘을 노모스보다 퓌지스를 따르고 있지요.

 

아테나이인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끌고 가는 방향과 의도가 있습니다. 그노메가 그것이죠. 노모스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신들이 인간의 질서에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아테나이인들은 그러한 관습을 깬다는 측면에서 그노메를 지향하지요. 그렇게 보면 그노메는 휘지스에 가깝지요. 그노메에 대해선 소포클레스가 잘 설명하는데, 오디푸스왕의 문제는 자신이 아무도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오만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한 오만을 안 순간 자신의 눈을 찔렀고, 이것은 밖을 보고 있던 한계가 있는 앎을 자신의 인식을 안으로 수렴하는 행위였던 거죠. 인간의 그노메가 어떻게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지 잘 보여주고 있죠. 결국 소포클레스의 질문은 ‘모든 것을 안다는 인간의 지혜는 신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벗어 날만한 앎인가?’ 하는 건데요. 그렇게 보면 모든 것이 대립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노메가 오만을 낳고 그 때문에 파멸하는 운명이 작용한다면 티케와 오만은 묘하게 겹쳐 작동하는 관계네요.

그 시대는 노모스의 기존 입장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 함께 작동하기 시작하던 때였지요. 투키티테스도 아직은 그노메가 세계의 전부라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노모스와 함께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 한 것이죠. 그러니까 운도 그냥 무작위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인간의 인과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은 것입니다.

계약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인간 사이에서 약속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깰 때는 그냥 깨는 것이 아니라 조약을 깬 것에 대한 벌을 감당해야 합니다. 벌을 내리는 것은 무엇일까? 조약은 늘 신들 앞에서 하는 것이죠. 신들이 그 계약의 증인이 됩니다. 당시는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것으로서의 신적인 것을 모두 부정하지는 못했던 거지요. 페리클레스와 같이 인식의 힘을 믿는 자들이 있지만 서로 다른 힘들이 맞부딪치는 안에서 승리하는 자와 패배자가 있게 마련이고 그 사건을 가지고 역사를 쓴 투키디테스의 관점은 무엇인지, 그것을 보는 것이 중요한 관건으로 남았습니다. 텍스트를 메타적으로 읽어라 라는 주문이 있었는데요, 협소한 시야를 넘기가 참 어렵습니다. 다음 시간은 근본적 관점을 가지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담 시간에 에세이 개요 다시 잡아오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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