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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3-28 01:18
조회
193
이번 주에는 제물론의 앞부분(전통문화연구회의 분류에 따르면 「제물론」의 1, 2장)을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고, 채운쌤은 지난주에 못 다한 소요유 뒷부분과 제물론의 앞부분을 강의해주셨습니다. 우선 장자의 텍스트에 나타나는 大와 小의 구분을 이야기하셨는데, 장자가 대/소를 말하는 방식이 노자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점에도 주목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노자는 커다란 것과 작은 것은 같다는 식으로 논의를 진행시킵니다. 이에 비해 장자에서는 대/소가 대립적인 것으로 나타나죠.(그렇지만 태산과 가을털의 끝, 일찍 죽은 아이와 팽조를 비교하는 「제물론」의 몇 구절에서는 상대적 차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대/소의 관계가 다루어지기도 합니다.)

곤-붕과 매미, 참새의 비교가 그랬고 제물론에 등장하는 대지(大知)와 소지(小知)의 구별이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노자와 달리 상대적 차이에 의한 분별을 긍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채운쌤은 여기서 드러나는 大/小의 구분을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경계의 유무로 이해해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작은 것들, 매미나 참새, 멧비둘기로 비유되는 것은 정말로 포부가 작고 재능이 미미하며 존재감이 미약한 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장자가 작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지식은 한 관직을 맡아 공적을 올릴 만하고 행실은 한 고을의 인망에 비합하며 능력은 군주에 마음에 들어서 하 나라에 쓰여지는 사람들”입니다. 그 재능이나 존재감이 작은 자들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가 이들을 작다고 한 것은 이들이 어떤 경계 안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곤-붕의 묘사를 보면 이들은 단순히 큰 것들일 뿐만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존재들로 나타납니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어느날 이 물고기가 변신을 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이 붕새의 등 넓이는 이 또한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곤-붕은 표상이 불가능한 존재들입니다. 참새나 매미, 메추라기는 몸집이 몇천 리가 된다고 해도 우리가 표상할 수 있는 반면, 곤-붕에 대해서는 흐릿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데 그칠 수밖에 없죠. 곤-붕은 우리 인식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경계에 갇힌 존재인 매미나 참새로서는 무엇 때문에 붕새가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갈 필요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경계에 갇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송영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러한 경계가 사회적으로 주어져 있는 가치들일 수 있겠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송영자는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무심하죠. 그는 내면과 외물의 구분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지만 장자는 타인들에 의해 주어진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장자가 넘어서야 할 것으로 본 경계는 단순히 사회적 가치들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가치들이 만들어 내는 의지처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가치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억압인 동시에 하나의 의지처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장자적 의미에서 자유는 의지하는 바가 있는 동안에는 불가능합니다. 장자는 송영자에 이어서 열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바람을 타고 다니는 열자는 걷는 일로부터조차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바람이라는 의지처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의지처로 삼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거기에 자기 자신을 투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장자는 至人은 자기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때 자신이 없다는 것은 곧 의지처가 없다는 것이고, 의지처를 없애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장자적인 자유의 이미지는 가장 초연한, 온갖 구속들로부터 벗어난 자리에 있는 열자의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이하는 곤-붕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굉장히 비약이 많은 것 같지만, 서둘러 제물론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제물론은 장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의 핵심을 포함하고 있는 장이라고 합니다. 그 유명한 호접몽도 곧 나오겠죠(!) 이번 주에는 남곽자기와 안성자유의 대화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채운쌤은 남곽자기가 이야기하는 구멍의 비유에 주목하셨습니다. 남곽자기는 존재들을 바람이 통과하는 구멍으로 설명합니다. 주체를 구멍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몹시 낯선 방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라는 독립된 항과 외부의 타자 사이의 만남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체가 그 자체로 바람이 관통하는 구멍이라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타자들의 관통이 있을 뿐 그것과 별개로 존재하는 ‘나’는 제거됩니다. 바람이 불기 이전에 피리에 내재해 있는 소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체가 구멍일 뿐이라면 그것을 관통하는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요? 안성자유는 남곽자기가 말하는 인뢰, 지뢰, 천뢰를 따로 독립된 것들로 이해하고 천뢰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나 남곽자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불어대는 소리가 일만 가지로 같지 않지만 그 소리는 그 자신의 구멍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인데 모두가 다 그 스스로 취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 구멍으로 하여금> 힘찬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그 누구인가?” 남곽자기가 이렇게 말할 때 존재와 작용의 구분은 무화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소리를 주관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과 구멍의 만남, 소리의 울림이라는 작용을 주재하는 어떤 존재 혹은 원리에 대한 믿음은 버리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신을 떠올릴 수도 있고, 구조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며, 어떤 변하지 않는 원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곽자기가 말하는 천뢰는 작용 자체일 뿐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장자의 존재론이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아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실체인 신은 생성/소멸하는 양태들의 세계 바깥에 있지 않으며, 매순간 양태들에 의해서 남김없이 표현되죠.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세계에서도 작용(양태)과 존재(실체)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는 인뢰, 지뢰, 천뢰를 동일시하는 장자의 관점과 굉장히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내재적인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장자는 우리에게 무의미에 직면할 것을 말한 게 아닐까요? 우리가 소리를 내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고, 어떤 주재자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 우리가 내는 소리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저절로’ 생겨났을 뿐이라는 것. 제물론에서 장자는 사물들의 구별에 의해 성립하는 ‘의미’라는 망상이 제거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한 것은 아닐까요? 어떻게 의미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며 살 수 있을지, 세속의 쓸모에 갇히지 않고 어떻게 독특한 쓸모를 구성할 수 있을지. 장자를 읽으며 계속 고민해야겠습니다.

 
전체 2

  • 2017-03-28 08:49
    여러 생각들을 해보게 하는 후기로군요. 특히, 장자적인 자유의 이미지가,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리에 있는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이하는 곤-붕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 좋네요 ㅎ

  • 2017-03-30 22:55
    소요유가 장자의 목소리에 가장 많이 담긴 텍스트라고 해서 제물론과는 뭔가 단절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더군요 ㅋㅋㅋㅋ 어쩌면 소요유는 장자 자신의 철학의 정수를 담아낸 것이고 나머지 편들은 이것의 주석이라고 해도 될까요? ㅋㅋ 다 안 읽어서 엄청 조심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