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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과 노자 1강 후기 및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5-20 02:38
조회
220
첫 후기가 이렇게 늦어버리다니 죄송합니다. ㅠㅜ 얼른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노자사종』의 책 구성을 살펴보면, 왕필의 노자주가 있고, 하상공의 노자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왕퇴 백서 갑,을본과 곽점죽간본이 있습니다. 왕필은 정치에, 하상공은 양생에 초점을 두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왕필의 주석을 볼 때, 거기에는 양생의 단면이, 반대로 하상공의 주석에서는 정치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노자라는 텍스트가 정치와 양생 두 가지 측면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쌤은 이에 대해 노자라는 텍스트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학파의 학자들이 개입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혹은 제 생각이지만, 노자에게 정치와 양생이 구분되지 않는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노자를 도가의 텍스트로 분류하지만, 그 안에는 원시 도가의 모습과 병가, 유가, 법가, 농가 등 다양한 학파의 사상과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처음 노자를 볼 때 의아했던 것은 특히, 왕필의 주석을 보면 가끔 이 구절은 주역 계사전의 어느 구절을 바탕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가와 유가의 사상은 대립하고 있지 않았던가요? 어떻게 대립하고 있는 사상으로 텍스트를 읽었는지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가의 텍스트라고 해서 정말 도가의 것만을 담고 있지 않고 다양한 학파의 내용이 함께 접속됐다고 하면, 도가의 텍스트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제 왕필주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면, 도덕경의 시작인 1장은 81장 전체 중에서 가장 유명하면서 동시에 가장 난해한 구절인 것 같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도를 도라고 이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상도(常道)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상명(常名)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이름하고,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이름한다.

 

여기서 ‘이름할 수 있다(可)’는 것은 인간의 인식으로 특정의미나 주장으로 규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도(道)는 더 이상 상도(常道)가 아니게 된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이게 뭔 말인지 몰랐고, 사실 지금도 그렇게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선생님의 말씀을 빌려 이해를 해보자면, ‘상도’란 자연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이란 어떤 휴양림처럼 피톤치드가 넘실대는 곳을 가리키지 않고, 운동을 의미합니다. 노자는 그것을 40장에서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고 표현합니다. 우쌤은 이때의 반(反)은 대립된 것보다는 돌아간다(返)는 뜻이 더 정확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도의 운동, 자연은 돌아감이라는 것이죠. (마오시대에서는 이 반을 정반합이라는 헤겔의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반대(反)의 것으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도덕경을 보다보면 극단에 이른 것은 반대되는 것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구절들이 나오는데, 그런 운동들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양에서 쓰이는 ‘상’의 이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상’이란 어떤 고정불변의 것을 말하지 않고 변화를 내포한 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굳이 ‘상도’라고 표현하긴 했는데, 이미 ‘도’ 자체에 ‘상’이라는 글자가 포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시작이 무(無)라는 것은 세계가 생기기 이전의 ‘무’라는 영역이 있었고, 만물의 어머니가 유(有)라는 것은 만물이 있는 영역을 말합니다. 여기서 유가와 결정적으로 엇갈리는데, 유가에서는 하늘 이전을 말하지 않습니다. 유가는 천지가 있고 그 다음에 인간세계로 내려오는데, 노자는 ‘무’를 말함으로써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에서부터 철학을 시작합니다.

우쌤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도’ 안에 이미 ‘무’와 ‘유’가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역에서도 하나(태극)가 있고, 그 하나가 둘(음과 양)로 나뉜다고 하는데, 이것을 도덕경으로 보면 하나란 ‘도’를 말하고, 둘이란 ‘무’와 ‘유’를 뜻합니다. 즉, ‘무’와 ‘유’가 함께 있기 때문에 천지가 시작될 수 있고 만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그러므로 항상 무욕으로 묘(妙)를 보고, 항상 유욕으로 요(儌)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나왔지만 이름은 다르고, 둘을 같이 부르면 현(玄)이라고 하며, ‘현’하고 또 ‘현’하니 모든 ‘묘’의 문이다.

 

판본마다 무욕(無慾), 이관기묘(以觀其妙)으로 읽을지, 아니면 무(無), 욕이관기묘(慾以觀其妙)로 읽을지 차이가 있습니다. 유욕, 이관기요(有欲, 以觀其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왕필은 ‘무욕’과 ‘유욕’을 한 덩어리로 봤는데, 우쌤은 ‘무욕’은 ‘무’의 영역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은 아직 있지 않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유욕’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인식함을 말합니다. 좀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무욕’은 아직 있지 않은 영역을 상상하는 것이고, ‘유욕’은 만물이 형태를 가진 영역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묘’와 ‘요’(徼, 이 글자를 ‘교’로 읽을지 혹은 ‘요’로 읽을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우쌤은 ‘요’로 보셨습니다.)를 각각 보는데, ‘묘’는 만물이 시작되게 하는 ‘도’의 작용을 말하고, ‘요’는 끝으로 돌아가는 복근(復根)을 말합니다. 그런데 끝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르게 보면 새로이 시작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실 아직도 알쏭달쏭한데, 저는 ‘무’와 ‘유’가 어떻게 작용되는지, ‘도’의 작용은 ‘무’에서 ‘유’로 가지만 또한 ‘유’에서 ‘무’로 가는 순환성을 ‘무욕’과 ‘유욕’으로 보여준 것 같습니다.

‘무’와 ‘유’가 같은 곳에서 나왔는데 그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도’ 안에 있지만, ‘도’의 작용이 때로는 ‘무’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유’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현(玄)하고 ‘현’하다고 합니다. 이 ‘현’은 ‘검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색을 넘어서 인식 불가능성을 뜻합니다. 문(門)은 ‘도’가 출입하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이 통로는 ‘묘’, ‘도’의 작용이 일어나는 통로이니 그 작용이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지우현’, ‘도’는 분명히 있긴 하지만, 그것을 아무리 인식하거나 이해하려해도 그것은 항상 우리의 감각과 사고를 넘어서는 지점에 있습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천하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추함이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만들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되며, 높고 낮음은 서로 판별되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2장의 이 구절은 2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좋게 여기고 따르는 것은 실상 나쁜 것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을 좋다 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하는 그 구분하는 기준을 버리라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떤 하나가 생기는 것은 동시에 그것의 대립되는 것까지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 하나를 고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生), 성(成), 교(較), 경(傾), 화(和), 수(隨)는 모두 동시에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 居是以不去.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니, 만물을 양육하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생겨나게 하면서도 소유하지 않으니, 만들면서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니, 공이 이루어져도 그 자리에서 누리지 않는다. 머물지 않으니 그러므로 떠나지도 않는다.

 

저는 2장의 이 구절이 도덕경 전체에서 가장 좋았는데, 성인이라고 하는 고원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이 사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차근차근 풀어보면,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위(爲)는 ‘하다’라는 의미보다는 거짓僞)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되지 않은 태도로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불언지교’의 언(言)은 법령과 같이 쓸데없는 것을 가리키는데, 편의상 ‘무위’에 반대되는 말로 인위(人爲)라고 하면, 자연과 반대되는 작위적인 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음을 말합니다.

성인은 만물을 자라게 하지만 그것을 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핏 보기에 공을 이루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성인은 만물을 자라게 하는 일등공신처럼 읽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철저한 통치의 관점에서 보면 백성들이 전혀 눈치를 못 채도록 잘 살게 해주는 군주를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도’라는 우주의 운행에서 보면, 모든 것이 자라고 잘 되는 것은 무엇이 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도’의 작용 결과로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자연(自然)이란 단어를 음미해보면, 일이 잘 풀리는 것은 누군가가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도’의 작용을 통해서 ‘스스로 그러하게 될’뿐입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잘 되는 것은 누군가의 공으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나쁘게 되는 것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어찌 가능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부유(夫唯)라는 글자가 나왔는데, 우쌤은 이 글자는 앞의 것을 받아서 그것을 요약할 때 사용될 뿐이지 글자 자체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굳이 이것을 다른 글자로 바꾼다면, 이(以)나 인(因)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쌤은 ‘부유’와 ‘이’, ‘인’이 몇 번, 어디서 나오는지 한번 체크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최진석은 시이(是以)를 천지가 ‘도’를 본받아 운행하는 것을 인간세계에 연결시키기 위해 사용됐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유’, ‘이’, ‘인’ 역시 그런 의미가 있는 걸까요? 그건 남은 시간 동안 고민해야겠습니다.

왕필은 “공을 자신에게 있도록 하려고 하면, 공이 오래갈 수 없다.”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인의 태도는 어떤 공도 다 거절한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공에 유난히 집착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不尙賢, 使民不爭 ;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하지 않게 하고, 욕심이 생길 만한 것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한다.

 

현명함을 숭상하는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재를 높이고 받아들임으로써 국력을 증진시키는 것. 유가의 철학 역시 인재양성이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자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현명함이 생기면 현명하지 못함이 생기고, 그것은 곧 우열을 낳고 경쟁, 나라 간의 전쟁을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부쟁(不爭)을 말합니다. 이것은 81장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성인지도, 위이부쟁(聖人之道, 爲而不爭)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위(爲)는 필요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77장을 참고해서 말하면, 성인은 넘치는 사람의 것을 덜어내서 부족한 사람을 채워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툼을 종식시키는 것이지 넘치는 사람에게 더욱 넘치게 하는 것은 다툼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난득지화’나 ‘가욕’ 역시 2장에서 사람들이 ‘미’ 혹은 ‘선’이라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인이라는 통치계층에서부터 자신의 행동거지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뭔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是以聖人之治 : 虛其心, 實其腹 ;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고, 의지를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여, 스스로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인위’적이지 않게 하라. 무위(無爲)로 행하면, 즉 다스리지 못함이 없다.

 

‘허기심, 실기복’과 ‘약기지, 강기골’은 비슷한 내용의 세트를 이룹니다. ‘심’과 ‘지’를 하나로 묶고, ‘복’과 ‘골’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겠는데, 인상적인 것은 ‘심’과 ‘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노자뿐만 아니라 장자 역시 허심(虛心) 혹은 무심(無心)과 같은 것을 얘기하면서 마음에 가득한 어떤 감정을 비워낼 것을 말하는데, 그들에게 비워내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요? 우쌤은 우리가 삶을 더 낫게 해준다고 믿는 의지가 오히려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는 지점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인격으로부터 오는 어떤 의지나 욕망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의 굶주림이 해결되고 생활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하는 우민정책을 뜻하지 않습니다. 앞에 나온 ‘허기심’과 ‘약기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쌤은 또한 어떤 통치자도 그냥 탄생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어느 시대에 출세욕이 있는 정치가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백성들이 출세욕에 휩싸여있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정치의 첫 번째 과제는 삶을 어지럽힐 수 있는 것들을 통치하는 자신과 백성의 삶으로부터 없애는 것입니다.

‘위무위, 즉무불치’ 이 구절을 다르게 표현하면 무위지치(無爲之治)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무위지치’라고 하면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다스려지는 편안한 느낌을 떠올리게 되는데, 아까도 얘기했던 것처럼 ‘위’란 거짓이나 작위, 인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의 운동에 방해되는 것들을 하지 않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다스림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러면 한가한 것보다는 엄청 바쁜 이미지가 생각납니다.

 

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도(道)는 비어있지만 기운이 가득하기 때문에 작용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고갈되지 않으니, 비어있지만 꽉 찬 듯하니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 날카로움을 꺾고, 엉킨 것을 풀며, 자신의 능력 또한 조화롭게 하며, 먼지와 같게 하니, 맑은 것 속에 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도’가 누구의 자식인 줄은 모르겠지만 상제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

 

우쌤은 충(沖)이라는 글자가 ‘도’를 잘 설명해준다고 하셨습니다. ‘충’은 비어있는 상태를 말하지만 동시에 기운이 가득한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를 ‘충’으로 묘사한 것은 ‘도’가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가 아니라 그 안에 ‘유’와 ‘무’라는 에너지로 가득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유’와 ‘무’가 있기 때문에 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或)은 정말 부사 ‘혹’의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늘’, ‘언제나’와 같은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작용은 있지만 그 작용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도’를 연(淵), 마치 연못처럼 표현했습니다. 연못을 보면 그것은 투명해서 깊숙한 곳까지 다 보이지만 실제로 그 깊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아직 못합니다. 우쌤은 여기서 사(似)라는 글자에 주목하셨는데, 이것은 ‘~인 것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우쌤은 굳이 노자가 ‘사’를 쓴 것은 ‘도’의 모습이 이것이라고 딱 규정해서 보여주기보다는 ‘도’와 꼭 닮은 것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모습이 연못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이 구절은 56장에도 나오는데, 진고응은 이것이 4장에 잘못 편집된 착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왕필은 이 구절을 빼지 않고 해석했습니다.

이것도 앞에 나온 ‘허기심, 실기복’과 ‘약기지, 강기골’의 비슷한 세트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좌기예, 해기분’과 ‘화기광, 동기진’을 비슷한 내용의 세트로 볼 수 있습니다. ‘화기광, 동기진’에 주목해서 보면,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화광동진(和光同塵)입니다. 이건 자신을 사람들에게 뽐내지 않는 성인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 태도로 ‘좌기예, 해기분’을 보면, 날카로움을 꺾는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복잡하게 얽힌 사건을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맑지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도’를 형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1장에 나온 현(玄)과도 그 의미가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 안에는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여기서 노자는 그것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먼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노자가 연못 속에 무엇이 있는 것까지는 봤지만 정확히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작용은 있지만 인식할 수 없는 ‘도’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작년에 노자를 읽은 것 같은데 처음 보는 것 같은 이 낯설음은 뭘까요........ 그리고 이 어려움이란....... 이번 주(이라고 하지만 오늘이네요.....) 간식은 양언니입니다. 그러면 이따(?)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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