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5월16일 후기 및 공지 (by 최정옥)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7-05-23 09:02
조회
368
써 놓고도 이제야 올리는 것은 뭔지ㅜ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5/16 수업후기

텍스트의 포도밭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일리치는 읽는다는 것도 쓴다는 것도 모두 특별한 기술이 장착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후고시대에서 현대까지를 읽고 쓴다는 면에서 하나의 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책이라는 테크놀로지를 기준삼아 보는 것이죠. 일리치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도구로서의 테크놀로지를 넘어 우리 의식 속에 있는 모두가 테크놀로지라고 규정합니다. 그의 기술에 대한 관점은, 목적을 두고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의식과 접합해 우연히 일어난 사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선민샘이 아주 핵심적인 포인트를 짚어주셨는데요, 그래서 ‘의식을 바꾸면 기술을 새롭게 사용 가능하다’라는 관점입니다. 뭔가를 새롭게 전망하거나 생각을 바꾼다면 새로운 기술을 더 만들 필요 없이 재활용 할 수 있는 것이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일리치는 텍스트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습니다. 단지 후고의 시대를 후고의 관점을 전하고 있지요. 후고를 통해 일리치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내지 못하는 부분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지점이었는데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대목으로 와 닿았습니다.

언어에 대한 부분도 재미있습니다. 쓰는 것과 읽는 것이 다르지 않았던 시대에 한권의 책이 나오는 과정은 지금처럼 한명의 저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구술사가 말을 하면 그 말을 빠르게 받아 적는 속기사가 있고 속기사가 필경사에게 다시 구술하면 필경사는 손에게 구술합니다. 쓰기도 구술인거죠. 이 단계들을 거치면서 구술자의 언어는 변질되는데, 모두 개의치 않습니다. 읊고 말하고 쓰기까지의 순간에 대한 시간 개념이 전혀 없는 것이죠. 신부님이 말하고 몇 달 뒤 옮겨도, 말한 그대로를 옮기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까지를 함축하는 언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당시의 언어는 한 번도 일상의 소리를 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몇 달의 시차를 감당할 수 있는 언어란 신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신의 말씀만을 적기 때문에 누가 읊어도, 언제 써도 그것은 신의 언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언어가 인간과 인간의 직접성안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과거 한자문화권에 있던 사신들이 만나 필담을 나눈다고 해 볼까요, 하고 싶은 말을 고전의 한 대목에서 뽑아 서로 필담으로 주고받는다면 그건 보통의 언어를 넘어서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 아주 다른 질감의 언어이겠죠.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안에, 중첩된 의미들 안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만남을 넘어서는 훨씬 외연이 넓은 언어가 되는 것이지요.

당시 언어는 알파벳으로 쓰였습니다. 이때의 알파벳은 소리값으로서의 알파벳이 아니었습니다. 라틴어가 유럽의 공용어였고, 모든 기록은 라틴어로만 이루어졌지요. 이것을 기록하는 것이 알파벳이었던 거죠. 그러던 것이 13세기 책의 형태가 나오고 자아가 생기면서 자신의 얘기를 기록하고픈 욕망이 함께 생기게 되죠. 알파벳은 내 얘기를 쓰는 도구가 되고 또 씌여진 걸 내 생각과 주제에 맞게 편집하는 것도 가능해진 겁니다. 읽기와 쓰기는 여기서 분화하고, 오직 쓰기만 하는 집단이 생겨나게 됩니다. 공증인, 변호사들, 성직자등등. 쓰기를 전유하면서 같은 해석과 주제 의식을 가진 집단들이 생겨나고 계파를 형성하게 됩니다. 일리치는 이를 통해 우리시대의 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네요. 함께 읽고 함께 공부하는 것이 배움의 지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후고가 추구했던 것은 선(善), 지혜였습니다. 일리치는 왜 우리 시대에는 이런 추구를 하지 않는가 반문합니다. 어느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다. 우리는 더 격하게 의미를 느끼고 겪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책 제목처럼 한 알 한 알 포도알을 따 듯, 한 골 한 골 이랑을 거닐 듯 지혜를 찾기를 게을리하지 말라고요. 후고가 자기 시대에 찾은 의미는 읽기였습니다. 읽기 위해 수사가 되고 수도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변화 속에서 모두가 읽는 시대가 올 것임을 알았던 거죠. 그래서 읽는다는 것을 통해 시대를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후고의 언어는 자기공동체에 한정되지 않고 도시공동체를 향해 있죠. 물론 일리치가 보기에 이 계획이 성공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시대에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란 자신만의 언어로 읽는 자를 소외시키고, 위계지우는 또 그렇게 만들어지는 자신에 대한 돌아볼 것은 요구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책 안에서 일리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형식적으로도 자기 언어를 최소화 하고자 한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거죠. 자신의 생각에 맞춰 논리적 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후고가 인용했던 것과 후고 주변에 있었던 일들, 모두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그들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글을 쓴 것이죠. 내용적으로도 후고 시대에 함께 읽고 썼던 고민과 내용을 공유하면서 - 라틴어를 그대로 가져 온다거나 - 글을 쓰고 있는 것이죠. 저자인 자신을 그런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시대는 고착된 자아를 버리는 것이 큰 공부거리지요. 현대의 스크롤이라는 책읽기는 페이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산만해서 자신이 흩어져 버리는데, 그렇게 흩어지는 것이 지혜의 길은 아닐 것입니다. 의식을 바꾸어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일리치의 가르침을 다시 새긴다면, 이런 산만한 시대는 또 다른 가능성일 수 있다고 샘은 강조했지요. 그러면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페이지를 하나하나 넘기지 않아도 되는 이 시대는 모든 것이 가능한 분수령이 아닐지. 이런 페이지의 점프는 언어를 가리지 않고, 책을 가리지 않으며, 또 유투브 스크린 등 영상과 소리가 책을 매개하기도 해서 말의 경계도 넘어서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거죠. 읽고 쓴다는 것의 실험을 해보자는 제안으로 수업을 마무리 했습니다.

문학수업은 두 번에 나누어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를 읽기로 했는데 그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신곡에 비해 읽는 집중도가 확연히 떨어졌었는데, 다른 분들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해서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토론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발표 후 800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살아남았는지 그 힘을 이해 할 수 있었어요. 아직 읽을 게 반 남았지만 기회가 되면 읽어보시길 조심스레 권해봅니다. 우선 두 책이 모두 순례를 떠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비교하면서 얘기를 시작했는데요, 신곡이 13세기 중세의 선택된 한사람이 시인의 인도를 받으며 지상 어디에도 없는 물리적 환경을 경험하며 그 속에서 배움과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린 노래라면, 캔터베리는 14세기 중세 말 민중들의 의식과 욕망을 가감 없이 이야기로 풀어내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한꺼번에 30명의 사람들이 우연히 여관에서 만나 캔터베리를 향해 말을 타고 가면서 내기처럼 쏟아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해서 신곡이 신의 은총을 향한 숭고한 순례의 여정을 보여준다면, 캔터베리는 밑도 끝도 없는 아무말대잔치의 향연처럼 보입니다. 쏟아내는 이야기 속에 수많은 힘들이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그래서 하나로 꿰지지 않고계속 어긋나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1372년 씌여진 캔터베리 이야기에 접근하기 위해 중세말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중세를 이해하는 두 축은 기독교와 봉건제이겠죠.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과 면죄부 판매를 통한 과잉 과세로 이미 신망을 잃었고, 봉건영주의 노동력 착취와 과잉 세금으로 농민들도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 알고 있듯 14중엽 흑사병이 유럽 인구의 1/3~1/4이 목숨을 잃었지요. 기아 상태로 면역력이 떨어진 농민들이 흑사병 앞에 속수무책으로 죽어 간 거죠. 이런 노동력 상실은 물가 상승을 동반했고,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있던 도시로 대거 이주하게 됩니다.

이 배경 안에서 캔터베리가 씌여졌고 등장인물들도 30명중 기사만이 귀족계급이고 수도원 신부를 빼면 모두 중산계층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말기’가 갖는 혼란과 들끓는 담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신흥 세력이었던 중산계층들이 담론 주도층으로 부상했고, 주류상의 아들이었던 초서도 이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지요. 이 부분에서 수경샘은 ‘자기 계층을 위한 담론을 자기 계층이 체현하고 있는 과정’이 아닌가 라는 해석을 해 주었죠. 즉 아직은 중세라는 틀이 남아 있는 안에서 모두가 절대적으로 가난해져가는 시기에 ‘돈’이 필요했던거죠. 그래서 순례길이라는 기독교 배경위에서 여러 인물들의 입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 생활 방식을 말하게 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것이 초서의 서문인 것 같은데요, 캔터베리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초서의 창작은 아니랍니다. 있는 이야기를 모아 편집해 놓은 것이지요. 요즘의 ‘지적재산권’ 사고에 민감한 우리들은 토론 시간에 편집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설왕설래 했지만 초서가 영향을 받았다는 데카메론도, 세익스피어도 편집본이며 당시의 일반적인 조류(?)이고 문제 될 일이 전혀 아닌 것이었죠. 그 보단 당시의 이야기를 모아 글로 썼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모았는가 하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 되겠죠. 근데 초서는 여기에 서문을 달았습니다. 전체 서문이 있고 각장의 이야기 앞에 그 장에 해당하는 서문을 또 달아, 얘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전하는 속에 슬쩍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얹어 놓습니다. 서문을 잘 읽어 보면 초서의 관점이 보이는 것이죠.

또 재미있는 지점이 화자와 말하여지는 자의 관계입니다.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점인데요, 저도 읽을 때 흥미롭게 봤는데 토론에서도 주목되는 지점이었습니다. 예를들면 유일한 귀족인 기사는 테세우스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진지하게 아주 길게 얘기하는 데 듣던 사람들이 그만하라하죠 재미없다고. 또 장원 청지기가 방앗간 주인에 대해 말하고 방앗간 주인은 목수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자기 욕망의 지향점이라고 해석해 주셨네요.-스토리를 따라가며 읽기 바빴는데 이렇게 할 얘기가 무궁무진 할 줄이야- 그래서인지 초서도 속어인 영어로 씌여졌다고 해요. 포도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기록을 하는 언어는 라틴어 였죠. 단테도 피렌체어로 신곡을 썼는데, 언어를 선택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당시 영국이 프랑스와의 교류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발전기에 있었고 에드워드 2세가 영국의 사유 통합을 위해 영어로 공문서를 쓸 것을 명했다고는 하지만 영어로 쓰기가 일반적인 시대는 아직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눈 매우 흥미로운 주제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카메론도 이야기로 되어 있고 세헤라자데 왕비도 죽음 앞에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토론에서는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순간 이어질 수 있고 잊혀지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는 말하지 않으면 묻혔을 이야기가 말하여지는 순간 다시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자기 자리에서 떠나지 않아도 이야기를 따라 유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경샘의 해석은 무척 재미있었는데, 화자인 내가 배제된 이야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이고, 인간에겐 이 공포와 자각이 있는데 이 한계를 벗어난 세계를 이야기를 통해서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하나의 기호로 본다면,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종의 불멸성을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지요. 세계의 어떤 부분을 들려 보여주는 것이 스승이라는 얘기와 함께 말이죠. 그래서 세계를 노래하고 이야기 한 사람들이 역사의 스승으로 존재하고 있고, 우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간 하루였던 것 같아요. 다음 시간엔 봉건시대1 1부 2책과 캔터베리 이야기 마저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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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3 09:04
    모두들, 후기는 제 시간에 올려주셔요. 그리고 숙제방이 아니라 공지게시판에~ 안 그럼 노출이 안 돼 누구도 안 읽습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