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0619 불교와 글쓰기 수업후기

작성자
최계숙
작성일
2017-06-21 20:14
조회
2929
맞게 적은 것인지 걱정도 되지만,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고요한 한주 되세요.

 
  • 우리 세미나는 글쓰기 세미나이고 앞으로 에세이를 쓰게 될 건데, 불교가 주는 위안에 고착되지 말고 지혜로 돌파해야 합니다.

  • B는 지난 수업후기에서 선정에 든다는 것을 특이하고 이상한 감각처럼 쓴 부분이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수업에서 선정을 설명하면서 예를 든 것은, 감각으로 구성되는 인지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특별한게 있다는 식의 생각을 버리기가 싶지 않습니다. ‘뭐’가 ‘있다’, ‘확실하다’ 보다는 실체적인 것이 어떤 조건 속에서 생겨나는 것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 그런 점에서 출가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가는 자기가 매어있는 영토, 관계(사람, 사물, 사건)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조건화 지어진 곳으로부터 벗어나는 시험이자, 얽매여 있는 곳으로 부터의 탈출입니다. 이런 조건이 달라지면, 사람과 사물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생각과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그런 점에서 삶을 던지는 승가공동체는 계를 따르지만 능동이고, 복종이지만 능동적 복종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에 대해 이해하겠다는 발심에서 나온 것이기 이것이야 말로 능동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선정은 나를 변용하고 지혜에 집중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계율을 지키는 자기변용의 과정 속에서 마음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혜(慧)는 계와 정 사이의 어디쯤(?)으로 생각하는데, 개체성을 넘어서 나와 전체를 보는 통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를 따르는 능동성, 모든 순간에 이 삶을 이해하겠다는 절실함으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 11경 <께밧다의 경>에는 기적을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 나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은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기적을 바랍니다. 이런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무지, 두려움, 나약함에 근거합니다. 내가 하기 보다는 남이 하는 것을 보기를 바라고, 의지하려고 합니다. 능동성은 자신의 존재자체를 걸어야 하는데, 능동성을 요구하는 지점에서 주저앉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인간이 근대사회에서 영웅을 바라는 것과 동일합니다. 중세시대의 신이 영웅으로 옮겨간 것일 뿐 마음은 동일합니다.

  • 부처님은 께밧다에게 기적(신통, 예지)에서 ‘위험’을 보기 때문에 기적을 말하기 싫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말한 위험은 기적의 결과만을 보는 사람들의 위험으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어떤 수행을 해서 그런 기적을 행하게 되었는지는 관심이 없고 결과나 주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번뇌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께밧다에게 ‘교계의 기적’을 말해줍니다. 이 기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는 기적이 아닌 ‘배운다’는 기적에 대한 것입니다. 교계의 기적은 바로 계.정.혜입니다. 이것(배우고 계를 따름) 말고 기적이 뭐가 있겠냐고 말입니다.

  • 두려움은 삶에 대한 몰이해, 무지에서 비롯되는데 두려움에 휩싸이면 또 다른 무지를 낳게 되고 이런 악순환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우리가 삶을 이해하려고 해도 나 자신의 견해의 그물로 가득 차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내 의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연의 조건이 와서 확 깨져야 합니다. 우리자신의 신체를 변용하는 미디어, 가족, 제도, 직장 등 조건화된 삶을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해야 하고, 선정을 통해 인간의 감각을 넘어서는 통찰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C는 지옥과 하늘나라에 대해 썼는데, 이는 중생들에게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지옥과 하늘나라는 실제로는 우리가 겪는 마음의 세계입니다. 이를 일체 유심조라고 합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펄펄 끓는 물 등)이 아무리 끔찍해도, 사람들은 그런 지옥보다 당장 지금 눈앞의 현실이 더 끔찍하기 때문에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국 지옥이란 마음이 겪는 것인데, 의심이나 질투, 거짓말을 했을 때 마음이 어떤 상을 만들어내는지 생각해보면 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겪는 것보다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긴 것은 없으며, 반대로 인간의 마음보다 더 찰나와 같이 짧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결국 좋은 것, 나쁜 것을 만들어낸 것이 나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면 지옥도 천국도 없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육도의 세계입니다.

  • C는 무상과 선행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 것이 선이라고 보는 것과 달리, 무상의 세계에서 그 자체로 선행은 없으며 선이 무엇이라고 결정된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윤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조건화된 곳에서 조건마다 윤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조건화 되어 있기 때문에 조건마다 윤리가 있고, 모든 곳에 조건이 있습니다. 즉 인연조건에서 윤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윤리가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또 선행을 타자에게 좋은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타자가 조건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윤리적 조건, 인연조건 속에서) 어떻게 해야 번뇌를 없앨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상황에 맞춰 억지로 받아들이는 척 하거나 억누르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란 인연을 보는 것이고 나를 구성하는 인연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원인)을 보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을 조건 속에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습관에서 나오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나의 자유의지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축적을 원한다’는 욕망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조건화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기업의 이윤은 당연하다거나 사장은 종업원보다 많이 벌어야 한다라든지, 내가 벌은 돈은 내 것이라는 생각은 모두 자본주의가 조건화한 예일 것입니다. 인연조건을 본다면 내가 이 조건이 아니면 돈을 벌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벌어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내가 잘 하는 어떤 것을 능력이라고 알아봐주는 시대가 있어야, 내가 능력을 인정받고 돈을 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불교를 현대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앙띠 오이디푸스와 연결지어 사고하는 나까자와 신이치와 같은 학자도 있습니다.

  • 완벽하게 인연조건으로부터 사유하라. 인연조건으로부터의 사유, 이것이 불교의 윤리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을 체화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 훈련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배우는 게 바로 기적(교계의 기적)입니다. 선행을 베풀 때의 마음 역시 선을 베풀었다는 마음 자체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보살은 주고도 주었다는게 없다고 합니다. 비대칭성, 즉 우리는 수많은 인연조건 안에서 어디든 받고 있고 있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 B는 글에서 가족에 대해 썼는데, 가족 안에서 정서적 집착이 강하면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집착은 가장 안 좋은 인연이며, 이런 집착으로 인해 부모-자식 관계는 전생의 원수라는 표현이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만적 긍정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해 놓칠 수 있는 것이 있으므로, 감정적인 것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거리를 두어 그것 외에 다른 것도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것에 상처를 받고 애착한 만큼 상처를 받는 다는 점에서, 상처를 주는 것은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자신을 보는 훈련을 글쓰기를 통해서 해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 Y는 찰나에서 느끼는 희열과 행복감에 대해 썼는데, 이런 순간은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쁜 것만이 고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았던 순간의 연기조건을 보지 못하면 좋았던 것으로 인해 괴로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에는 글쓰기가 잘 된 것 같은데, 왜 이번에는 글쓰기가 안되는 것인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글쓰기가 안 되었던 것을 보지 못하는 것도 있고, 글쓰기 잘 되었던 조건을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 그리고  대부분은 분들은 9경 <뽓따빠다 경>에 대해 썼는데, 유행자 뽓따빠다는 재가신자가 되겠다는데 반해,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부처가 되겠다는 능동성으로 누구를 따르겠다는 **교도나 **주의자의 수동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부처가 되겠다는 것은 깨어있는 자가 되겠다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이 인생의 고진멸도와 연기를 이해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나 자신이 되어라!). 그런 면에서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너 자신을 의지하라’는 말은 ‘너 자신이 부처가 되어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 짓는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기도 하는데, 거기에서 마음하나 더 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연조건이 있으나, 인연조건 안에는 나 자신도 원인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원인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전생의 업으로 얘기하기도 하나, 일종의 설명의 방식입니다.

  • 이제까지 1품 <계행다발의 품>을 읽었는데, 다음 주 부터는 마하(Maha, 크다는 의미)라는 말이 들어간 <큰 법문의 품>입니다. 1품 전체적으로 봤을 때, 1경과 2경, 9경이 많이 논의되는 주요한 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경 <하느님의 그물의 경>은 여러 견해와 그 근거들의 관계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2경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은 과정이 열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목적론을 거부한다고 할 수 있는데, 내가 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동양의 道는 말 그대로 길입니다. 길에는 우연성이 열려있으며, 삶 자체를 과정으로 보는 사고입니다. 열려있다는 것은 인연조건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것들이 그 자체로 길의 일부가 되는 것이며, 길에서 없어야 되는 것은 없습니다. 9경 <뽓따빠다의 경>은 자아와 연결지어서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아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식입니다. 우리는 감각대상과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하고, 그 감각을 통해 판단을 하며 상을 만드는데, 이런 정보들의 응집력있는 상태 즉 인식의 형성이 자아를 만듭니다. 이런 응집력있는 정보들이 우리의 무의식이나 기억인데 이것이 유식론에서 말하는 아뢰야식입니다.

  • 9경 432에서 부처님은 우리의 번뇌와 번뇌의 소멸에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런 것들은 유익한 것이 아니고 원리에 맞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사다리와 미녀의 비유를 통해서 굉장히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기도 하시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스에도 세계의 기원이나 구성에 대해 생각한 철학자들이 많이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좋게 사는 것인가’라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을 했다는게 다릅니다. 부처님의 독화살에 대한 비유처럼 독화살에 맞았으면 독이 퍼지지 않게 화살을 빨리 뽑는게 중요하거늘, 사람들은 화살의 재질이나 특징 등 유익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살피느라 시간을 보냅니다. 영혼이니 사후세계니 하는 탁상공론은 쓸데없는 일종의 유희와 같은 희론(戱論) 일 뿐입니다. 이에 반해 위대한 철학은 인간이 겪고 있는 문제로부터 시작합니다.

  • 12경 <로힛짜의 경>에서 로힛짜는 착하고 건전한 것을 타자에게 알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습니다. 그것은 예전의 속박을 끊고 다른 새로운 속박을 만드는 것과 같다며 타자가 타자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아마 부처님도 깨닫고 난뒤 이와 비슷한 마음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 역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중생들에게 말했을 때, 과연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법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그것은 중생이 깨닫지 않으면 번뇌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자비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러 다니라고 하면서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말라고 한 것은, 파를 만들지 말고 한사람에게라도 더 법을 전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로힛짜의 경에 나오는 ‘질책받을 만한 세 종류의 스승’ 부분은 재미가 있었습니다. 수행자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면서 가르침을 베풀고 제자들도 알기 위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스승, 수행자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제자들은 잘 알기 위한 마음을 일으키는 스승, 그리고 수행자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제자들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 모두 질책받을 만한 스승인 것입니다.

  • 1품 전체적으로 계행에 대한 것인데, 짧은 크기의 계행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해 준다면, 중간크기의 계행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계행입니다. p.412에 유행자 무리의 왕에 대한 이야기, 도적에 대한 이야기 등 27가지 잡담에 대한 장면이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 5가지를 더해 32가지의 쓸데없는 담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붓다가 좋아하는 고요함은 어떤 물리적인 고요함이 아니라 마음의 고요함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 속의 번뇌를 표현할 때 마음에 원숭이가 산다라고도 하는데, 이때 원숭이는 서유기의 손오공과 같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존재로 마음의 요동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의 요동으로 실수가 생기고 자만심이 생기고, 살면서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품은 어떤 질문에도 계.정.혜로 답하며, 여기에 덧붙여 사성제와 팔정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계행다발 p.160~184를 매주 월요일 아침 30분 할애해서 읽으면 앞으로의 공부를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복사물로 나눠준 자료도 읽어보고 적어도 오온, 사성제, 팔정도가 무엇인지 외워오시길 바랍니다.

전체 3

  • 2017-06-22 01:56
    자세한 후기 감사합니당~~

  • 2017-06-22 10:10
    와 ^^ 수업 내용이 저절로 복습되네요. 지혜 공부는 계행과 선정을 가능케 하는 지반이면서 계와 정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지요. 우리도 한 학기 열심히 읽고 쓰며 계정혜를 도모해보아요ㅎ

  • 2017-06-22 10:36
    잘 읽었습니다. 결석생을 위한 배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