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0626 수업 공지 나갑니다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6-22 18:54
조회
2707
지난 시간 드디어 1품 전체가 끝났네요. 다음 주에는 2품 16경까지 함께 읽고 만나요.
간식은 현정+현숙쌤(이렇게 써놓고 보니 자매 같네요) 후기는 이미 계숙쌤과 성희쌤께서 올려주셨으니 다들 확인 부탁드려요. (눈팅만 말고 댓글을 달아주는 쎈쓰를~)

두 분 모두 성실하게 글을 올려주셨으니, 저 역시 생각나는 이야기를 쪼끔 해보겠습니다.

붓다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또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으나(나는 이미 부처~), 경전을 보면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하지도, 같은 강도로 말하지도 않았던 것 같지요.
무릇 선지자라면 모두를 끌고 가야 한다는 우리네 통상적인 생각과 달리 중생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여긴 불교는 꽤나 시크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지난 수업에서 채운 쌤께서 강조하신 것이 이와 연관됩니다. 기억하기로 두 개의 키워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발심 그리고 출가.

그러니까 깨닫고자 한다면 결정적인 문턱을 자기 스스로 넘어야 합니다. 스스로 넘고자 하는 결심, 용기, 그에 따른 결행이 요구됩니다. 채운 쌤께서는 이를 배우는 자에게 필요한 능동성이라고 지지난 수업에서 말씀하셨었는데요, 지난 수업에서는 이 주제가 보다 전면적으로 드러난 것 같지요.
불교에서 발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저러한 주의자, 이러저러한 종파의 신도와 다르답니다. 그건 붓다 곁에 있고 싶다, 붓다를 따라가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붓다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래요.
표면적으로는 두 경우 다 붓다 곁에 있는 것이더라도 한쪽은 붓다를 숭앙하며 그것에 만족해 안도하는 것인 반면, 다른 한쪽은 붓다 곁에서 배우고 촉발 받아 마침내 붓다를 버리고 그 스스로 붓다가 되는 것이니 서로 아주 다르지요.

채운 쌤께서는 이를 ‘기적’과 연관 지어 풀어주셨습니다.
기적을 원하는 께밧따에게 붓다가 뭐라 답했었죠? 계정혜의 수호가 곧 기적이라는 거였죠. 아마도 께밧따는 다소 실망했을 텐데,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기적은 일상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죠.
일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 일상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중생은 결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중생은 일상 안에서, 말하자면 자신의 시공간, 자신이 처한 구체적 조건들을 사유 대상으로 삼지 않거니와 그러므로 그 자신을 통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상은 놀랄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일상은 그냥 주어진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서는 압력을 받지 않습니다. 외부의 압력이 주어져야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에게 일상은 정말 공기처럼 아무 존재감 없는 어떤 것이 되지요.
하지만 내가 기대고 싶어질 만큼 놀랍고 강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런 사람이 눈앞에 출현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때 대중은 크게 환호하며 그를 맞아들이겠지요(그 반대편에서는 고래고래 욕을 하 거고요).
어찌되었든 대중은 놀랄 만한 비일상적 사건 앞에서만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대중의 이 같은 속성을 정말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대혁명의 결과는 무엇이죠? 소위 근대 민주주의 사회의 정립과 나폴레옹의 출현입니다. 민주주의와 근대적 양식에 의해 삶을 보장받게 된 데 대해 안도하게 된 '시민'들은 이제 신이나 루이 왕을 대신해 나폴레옹이라는 평민 영웅에 환호합니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그가 기적을 행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왜소한 체구의 평민 남자가 유럽의 국경선을 제맘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민중의 감동은 실로 대단했겠지요.
채운 쌤 말씀대로 대중은, 사회를 한 번에 바꾸는 존재를 꿈꿉니다. 께밧따가 이를 잘 보여주지요. 그냥 누구 뒤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나약하고 무지하고 겁 많은 사람들, 그게 중생이랍니다. 니체는 이를 무리 군중 내지 양떼라 했던 거겠지요.

채운 쌤은 기독교를 비롯한 대개의 종교들에 이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된다고 보셨지요. 종교는 인간의 무지에 기반해 성립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 중생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시시하게 여기니까요. 그들은 기적을 바라는데, 실상 기적이란 건 일어난 일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소외를 증거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나치 시대의 독일 국민을 생각해도 이는 잘 들어맞는 것 같아요. 그때 독일 국민이 바란 건 독일의 기적이었지요. 독일의 기적을 곧 자기 삶의 기적으로 받아들인 그들은 당연히 그 꿈을 실현시킬 만한 비전을 가진 존재로서 히틀러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그들은 자신을 무지 상태에 놓아둘 필요가 있었지요. 히틀러가 일궈낸 꿈이 사실 히틀러가 만들어낸 이 세상의 지옥(아우슈비츠 및 홀로코스트)임을 모르고 있어야만 자신들이 제자리에서 평안하게 살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전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 몰랐다고요!")

발심이란 아마 다른 게 아닐 거예요. 특정한 누구를 따라가서 편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을 알아내고 말겠다는 마음, 더 이상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겠다는 마음, 이게 발심이겠지요. 세계와 나에 대해 통찰하고자 하는 것, 온전히 내 힘으로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 그게 발심입니다.
채운 쌤 말씀에 의하면 바로 여기서 능동성이 필요하다고 해요. 알고자 하는 마음! 이 마음 앞에서는 어떤 것도 장애가 되지 않지요. 그래서 뛰어나가는 겁니다. 그게 곧 출가지요. 내가 집처럼 여기던 것들, 내 가족, 친지, 습속, 관계 맺는 양상, 사유 방식, 이 모든 것들로부터 탈주하는 것.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영토화된 것으로부터 벗어나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것.
채운 쌤은 이를 ‘나를 조건화하는 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 표현하셨습니다. 나(I)도, 이 세계도, 그 어떤 사건들과 사물들도 자성(=개체성)이 있는 게 아니니 모두 특정한 조건들 안에서 그렇게 발생하고 스러지는 것이라는 게 불교가 말하는 세상의 이치죠.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내가 옳고 네가 그르고, 그 일이 어떻고 운명이 어떻고를 가르는 게 아니라 '조건을 사유'하는 것이고, 더 적극적으로는 '새로운 조건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 일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우리가 그나마 윤리적인 삶을 도모하는 길은 조건의 사유, 그리고 조건으로부터 탈주를 꾀하는 것뿐이라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랍니다.

그래서 발심하고 출가한 수행승들을 기다리는 것, 이게 무언지를 1품 내내 물리도록 보아왔네요. 네, 계정혜의 수호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체성을 중시하는 불교에서는 신체 변형을 통해 감각을 다르게 감수할 때 존재의 변형이 온다고 여깁니다. 하여 자기 변화의 과정으로서 계율을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집중을 꾀합니다. 이 둘 모두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 있는 통찰력, 그게 혜라고 하고요.
발심한 이는 때가 언제인지 기약이 없지만 매번의 발심 속에서(왜 안 그렇겠어요? 한 번의 발심으로 인간이 확 변하고 자기 자신과 쓱 결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을 바라는 심보) 바로 지금에 철저하게 집중하면서 세계를 감수합니다. 이것 말고 다른 할 게 없다는 마음, 이것 말고 다른 순간이 없다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투철하게 깨닫는 이 세계와 삶에 대한 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붓다야말로 모든 행 가운데에서 온전히 그 순간에 주의를 기울인, 그래서 아무 잉여도 없이 인식하고 행한 이 아니었을까요?

2품에서는 또 어떤 배움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저 매번 한 페이지, 한 행, 한 구절씩 묵묵히, 찬찬히 읽어나갈 수밖에 없네요. 즐겁게, 기꺼이 그렇게 해보도록 해요^^
그럼 다음 주 월욜에 만나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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