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에티카 7주차 후기

작성자
키키이림
작성일
2017-06-25 08:45
조회
154
고작 사랑에 빠지지 말고, 사랑을 이해하라 그것이 너를 자유케할 것이다.

1632년에 태어난 스피노자가 현존한다면 385살 즈음이겠지요? 385살 된 철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신체 변용을 겪어 본 적 없는 가난한 신체변용자인 저에겐 상상조차 어렵지만 저는 스피노자에게 경외의 정념을 쏟아냈을 거 같습니다. 채운쌤이 대상에 고착화되기 쉬워 가장 경계해야 할 감정이라고 말씀하셨던 ‘놀람’의 한 모습이지요. 그러나 저는 독특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그를 7주 동안 공부하며 오래 바라보면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고작 사랑이겠지만 이 사랑을 이해해 보렵니다) 스피노자는 사려깊음과 근면함으로 저의 마음이 동요하는 출렁이는 파도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정서의 본성과 기원을 명쾌하게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주의자인 우리는 의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이길 수 있다고 여기지만 우리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강렬하게 느끼는 감정은 인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감정도 정신과 같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합니다. 감정을 이해해서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 그래서 정서와 이해의 일치로 우리가 완전하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왜 정서를 중요하게 다루었을까요? 이것은 예속을 벗어나 자유로 이행하는데 인식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외부에 의한 억압을 예속이라 생각하지만 스피노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정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와 무능력을 예속이지요. 정서 즉 욕망의 힘은 막강합니다. 스피노자는 정서를 이해하는 만큼 자유롭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능동적으로 구성해야 합니다.

 

코나투스, 실재를 재생산하는 근원적인 힘

코나투스는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하는 실재의 현행적 본질”입니다. 실재를 계속 실재이게 하는 근원적인 힘, 실재들이 가지고 있는 능동성의 근거이자 실존하는 것의 행위 역량입니다. 이 역량 안에는 능동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재의 독특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항상적으로 유지하는 능동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능동성은 주체의지가 아니라 다른 것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역량을 말합니다. 너무 데카르트적인 우리는 늘 주체를 소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정의를 곧잘 오해합니다. 존속을 상태를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노력을 주체의지로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3부 정리9 주석에서 노력이 정신에게만 관련될 때는 의지, 정신과 신체에 관련 될 때는 욕구, 욕구에 대한 의식과 결합될 때는 욕망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코나투스는 주체보다 태초에 존재했던 들뢰즈가 그것이라 명명했던 욕망 기계, 니체의 힘 의지와 비슷하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어떤 것이 좋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려고 노력하고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추구하려고 노력하고 의지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판단은 욕망과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뻐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니까 예뻐 보이는 겁니다. 실재의 본질이 코나투스라면 신의 본질은 신의 역량입니다.(1부 정리34) 신은 생주이멸 바깥에 있지 않고 변화의 장 그 자체입니다. 사유와 연장을 통해 신이 펼치는 것입니다. 모든 실재나 양태에는 신의 능동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코나투스는 실재에 깃들어 있는 신의 능동성을 보여주는 스피노자의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정신과 신체에 모두 관여하는 정서를 이해한다는 것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정서는 이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상정되어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터부시되어왔습니다. 최초로 정서를 다룬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1649년에 쓰인 데카르트의 『정념론』에서 신체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 정념이라고 정의합니다. 신체와 관련되기에 습관이 되기 쉽고 이를 제어하는 것이 자유의지라고 했습니다. 데카르트에게 정념은 늘 수동이었습니다. 영향을 주는 경우는 없고 늘 영향을 받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정서는 정신과 신체 모두에 관여합니다. 또한 정서의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을 강조합니다. 스피노자는 정서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로 정의했지요. 2부에서 강조했듯 관념은 모두 신체의 변용입니다. 모든 관념은 신체의 변용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신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스피노자는 아직까지 누구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규정하지 못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신체의 이러저러한 작용은 신체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는 정신에서 생겨난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은 욕구와 다르지 않으며 정신의 결단과 욕구, 그리고 신체의 규정은 본성상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기억하거나 망각하는 것도 정신의 자유로운 능력에 달린 게 아니라 신체의 변용에 달려있습니다. 자유로운 결단 속에 이미 신체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의지 이전에 그의 신체가 반응하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결국 얼마나 더 많이 변용될 수 있느냐는 변용역량이 중요합니다. 스피노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역량의 증대냐 감소냐입니다. 정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실천적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의지로 억누르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정서를 이해해서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정신과 신체가 비례하듯이 정신의 많은 역량들 간의 관계도 비례합니다. 즉 이해, 정서, 인식은 비례합니다. 많이 이해하는 만큼 많이 느낍니다. 정념이 커지면 의지가 강해집니다.

 

모든 정서는 수동이며 기쁨과 슬픔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스피노자는 세 가지 기본 정서를 욕망, 기쁨, 슬픔이라 말합니다. 실재가 그 실재를 계속 재생산하려는 힘을 욕망이라고 합니다. 욕망은 기쁨과 슬픔과는 다른 근본적인 것이기에 기쁨과 슬픔이 감정의 전부이며 나머지 다른 감정은 기쁨과 슬픔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기쁨은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이고 슬픔은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들”입니다. 두 가지 주요 정서의 정의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정서는 기본적으로 수동(passion)입니다. 즉 겪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서는 이행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자기 방식으로 정서를 정의하는 부분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기쁨과 슬픔에서 파생되어 나온 여러 가지 감정 중 모두가 가장 쉽게 사로잡히는 사랑은 “외부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라고 정의합니다. 외부 원인 즉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내 신체의 역량을 높이는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고작 사랑입니다. 일시적이고 간지러운 기쁨일 뿐입니다. 동의보감에서 여성의 많은 병이 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이 감정을 잘 이해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로 느끼는 감정의 습관은 내 신체의 변용의 습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주 일으키는 감정으로만 변용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필연적 법칙과 원인으로부터 전유하는 적합한 인식만이 능동이다.

그렇다면 수동과 능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원인자신에 의해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이 적합한 원인, 원인 자신 만에 의해 이해되지 않는 것을 부적합한 원인이라고 합니다. 관념의 매커니즘과 동일합니다. 적합한 원인에 의해 따라 나오는 것이 능동이고 부적합한 원인으로 따라 나올 때 수동적입니다. 적합한 원인은 필연적 법칙과 전체의 시간 속에서 완결된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신체의 변용은 단편적이고 부분적이기에 부적합합니다. 어떤 결과를 대상과 연관시키지 않고 1부 정리 28의 단독으로 실재할 수 없는 존재 자체의 타자성을 환기해야 합니다. 결과를 원인으로부터 인식하는 것. 모든 원인은 이미 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수동과 능동에 대해서도 표상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능동적인 것을 활동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것이 무기력하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수동적인 정서인 분노와 슬픔은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편안하게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동도 많습니다.

 

스피노자가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정서와 이해의 일치입니다. 뭔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기쁨입니다. 기쁨은 더 큰 실재성과 완전성입니다. 더 많이 이해할수록 더 기쁠 것입니다. 이제 예속과 자유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가볼까요(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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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7 21:02
    오늘 하루도 나의 코나투스는 정념에 휩싸여 요동을 치네요.....더 읽어야 할 것 같은 불안과 시간 안에 마무리해야할 것 같은 글쓰기에 정념은 수동적인 슬픔의 정서와 주로 같이 했네요...이렇게 지난 수업 후기를 읽고나서야 능동의 정서를 생각하게 되네요...역쉬~ 배움은 같이 하는 학우들이 있어야하는듯요. 정서를 이해한다는 것이 녹녹치 않은 작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