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6.29 절차탁마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6-25 19:52
조회
163
170629 절차탁마 Q 공지

 

정서란 신체, 그리고 신체에 대한 관념과 연관됩니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의 행위역량 모두를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것은 정서의 변이와 연관된다고 했습니다. 감정을 다스리는 문제는 이런 점에서 중요했죠. 그는 정서를 기하학, 즉 자연의 법칙 안에서 규명하여 정서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이전까지 감정은 이성을 가리는 것이고 수동적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면 스피노자는 그것을 억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이해하고 정의해서 우리의 역량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현자는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을 일치시키는 자라고 합니다. 스피노자는 정서와 이해를 일치시키는 문제를 말합니다. 정서와 상상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이고 부적합합니다. 하지만 이해하여 적합한 관념으로 전환을 꾀합니다. 우리는 정념이 의지를 억제하므로 그것을 덜 느끼고 이성을 더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일시적인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정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한다면 그런 말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체와 분리된 의지를 갖지 않으니까요. 신체를 무시하고 의지만 낸다고 해서 자연 법칙 안에 있는 우리가 갑자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의지하는 일을 성취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나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서의 차원 역시, 그것을 억제하기 보다는 정서와 정념을 제대로 잘 이해하는 자는 더 완전하게 느낀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과제에 썼듯 우리는 의지를 내서 그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입니다. 더 잘 이해할수록 우리는 기쁨의 차원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에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쁨의 차원에서 우리는 실존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적합한 관념을 가질 때, 즉 그 결과를 만들어낸 필연적 법칙으로부터 이해할 때입니다. 우리는 단편, 부분적인 우리 경험을 원인으로 대상을 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마음은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수동적인 정서를 갖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능동과 수동을 구분합니다. 능동이란 어떤 결과를 완전히 전유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결과를 단편적으로 전유하는 수동성은 역량의 축소를 초래하는 반면 어떤 결과를 전유하는 경우 우리는 더 많은 실재성을 갖게 됩니다. 이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슬픔은 우리의 행위역량의 감소를 가져옵니다. 이대 분노와 슬픔은 무기력과는 다릅니다. 편안하지 못하고 항상되지 못한 상태라고 하는 편이 낫습니다. 분노와 슬픔은 예측할 수 없는 폭력성으로 발전되기도 하니까요. 이때 중요한 것은 나에게 분노와 슬픔을 가져다 준 사건을 어떻게 분노와 슬픔만으로 가져가지 않을 수 있는가?입니다. 행위역량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갇히는 경우 변용능력은 감소되고, 그럼 실재는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존속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중요한 윤리적 질문입니다.

코나투스란 실재들의 최소치 운동성입니다.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의지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고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신의 본성이 곧 역량이기에 실재 안에는 능동성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행위는 역량 자체, 그 실재들이 갖는 능동성의 근거가 우리의 본질이며 코나투스입니다. 세포들이 계속 활동하면서 피를 계속 흐르게 만드는 것처럼 복합체인 우리 신체는 항상 외부와의 관계를 만들며 운동하여 존속합니다. 변용되면서도 그 변용들을 항상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실재들의 노력, 이것이 실재의 능동성이자 본성입니다. 그런데 슬픔은 이 외부와의 끊임없는 관계를 차단하여 실재의 역량, 즉 존재 자체를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인간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면서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슬픔이나 분노에 빠질 때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전부인양 온 에너지를 거기에 집중시키곤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순수한 의지인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스피노자가 보기에 그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자신의 역량을 축소시키며 부분적인 것에 얽매여 있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슬픔을 없던 일로 치고 상황을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도 아닙니다. 기준은 오로지 실재의 역량. 실재의 변용을 이해하고 보는 것입니다.

 

다음은 4장 읽어옵니다.

과제는 왜 인간이 예속에 빠지는지 쓰기.

간식은 혜원, 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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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7 20:46
    이해한다! 이해만이 정서를 완화할수도, 능동으로 역량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 참 좋네요.^^ 이해하기 전까진 이 모든 걸 유보해도 된다고 자의적 해석까지 곁들이니 더 안심도 되고...^^; 에티카를 4부까지 읽고 이런 마음을 내면 안될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