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니체4주차 후기

작성자
혜가
작성일
2017-08-19 15:54
조회
261
“태양은 바닷물을 빨아들여 그 심연을 자신의 높이까지 들이마시려 한다. 이에 천 개나 되는 젖가슴을 갖고 있는 바다가 갈망으로 부풀러 오르는구나.

바다는 태양이 목말라 자신에게 입맞춤해주는, 그리하여 자신이 빨려 들어가기를 소망한다. 대기가 되어 높이 올라 빛이 흐르는 길이 되고 스스로 빛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진정, 태양이 그러하듯 나 또한 ‘생을, 그리고 깊은 바다를’ 두루 사랑한다.

(때묻지 않은 깨달음에 대하여)

 

수요일 종일 수업 들은 이튿날은 자신에게 선물로 산행을 한다. 매번 가던 코스에서 반대 코스로 내려오다가 니체의 저 구절이 생각나면서 산 전체가 ‘아 살아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늘 메마른 등선이나 골짜기에서 졸졸 물길들이 소리를 내며 흘러내고 있었다. 하늘과 대지가 함께 생명을 창조하는 느낌이었다. 밤새도록 하늘의 주는 생명을 품고 있다가 산은 토해내듯이 여울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수북이 쌓인 낙엽사이사이로 물을 먹은 흙에서 달달한 냄새가 감지된다. 난 스틱으로 낙엽을 헤집어 보고 그곳에 미물들이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생명을 머금은 미물들은 나 살아있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뜩 이들은 죽음을 긍정할까?

생명수는 산 전체를 흠뻑 적시고 다시 골을 따라 도시로 내려간다. 도시에 도착한 생명수는 온갖 쓰레기와 먼지들을 품에 안고 다시 저 심연의 깊은 지하로 데려간다. 그 곳에서 맑고 깨끗하게 정화해서 다시 우리에게 생명수로 되돌려 준다. 심연의 저 깊은 곳에서 정화된 물은 빛으로 생성하는 모든 것들에게 젖가슴 역할을 하지 않을까?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생’의 철학이 이런 것이 아닐까 잠시 상상을 해보았다.

 

들뢰즈가 말하는 니체의 힘의지

 

니체는 인간의 본성은 힘에 의지 있다고 한다. 인간은 어느 장소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힘의 지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 힘이 강하던 약하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니체는 우리는 대체적으로 기존에 자주 쓰던 힘을 습관적으로 쓴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쓰는 힘도 기존의 방식대로 쓰지 말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라고 하는 것 같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에서 니체의 힘에 의지를 능동적인 힘(active),반동적인 힘(reactive)인

두 유형으로 분석한다.

능동적인 힘은 자신의 힘에 긍지를 가질 수 있는 힘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명령하는 힘이며 창조하고 탈취하는 힘으로 설명한다. 반동적인 힘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쪽으로 힘을 쓴다. 그러한 힘들은 능동적인 힘을 뺏거나 약화시키는 수동적 힘으로 발현된다. 반동적인 힘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정적인 가치들을 규정해 놓고 그 안정을 해치는 능동적인 힘을 배척하고 단죄하는 쪽으로 힘 의지를 발현한다. 선과 악이란 것도 약자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으로 반동적 힘을 유지하고 보전하려는 힘 의지의 일종이다. 루쉰의 예를 들어보면 중국 혁명세력들이 이제 그만하고 안정을 유지하는 쪽으로 끌고 가려 할 때마다. 루쉰은 그 반동적인 힘을 비난했다.

니체는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 궤도를 이탈하려는 힘을 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성이란 것은 늘 우연적으로 이탈하고 신체들의 복합체에서 나오는 상이한 힘들이 생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성과 신체는 생성되는 힘들의 접선과 이탈과 충동을 통해 준 안정적인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다양한 힘들은 새로운 창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또 순환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니체가 경계하는 것은 생성하는 힘에 의지를 길들이려는 반동적 힘을 말한다. 이들은 선, 악이라는 어떤 신념 체계를 만들어 도덕이라는 울타리를 덧씌워 그 속에서 안정적으로 보전하려는 힘을 사용한다.

 

교재로 돌아와서 가치평가란

 

평가라는 것을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민족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규칙과 문화를 만든다는 것은 세계를 평가하려는 해석을 전제로 한다.

A가 B를 본받아 B에 가치평가들을 그대로 가져오면 A는 B가 되는 것. A가 B에서 살아남으려면 A 자신의 독특한 평가와 해석을 만들어내야 한다.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에는 이미 거기에 가치가 부여된다.

가치의 변천은 그것을 창조하는 자들이 변천이기도 하다. 사물의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적인 의미를 창조하고 평가하다가 어떤 상황이 달라지면 변화하는 것이 가치라는 것.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도 니체가 보기에는 다 자신을 보전하려는 힘에 의지로 보았다. 그러나 보전하는 것조차도 먼저 평가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먼저이다. 니체는 지켜야 할 가치는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가치도 변천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평가된 가치가 전환이나 변화를 시도하지도 모험하지도 않는 것은 반동적 힘, 즉 안정적이고 보전적인 가치 속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니체는 제때에 죽는다는 것은 죽음을 축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문제가 삶에 연장선상 안에 있다면, 살아서 삶을 긍정하면 어느 때 죽어도 제때에 죽는 것이 되는 것인지? 채운 샘은 ‘만약 삶을 긍정하지 않는 자가 150살을 산다고 한들 죽음을 긍정으로 받아들일까요?’ 하신다. 삶의 다양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삶이 무상으로 우리에게 준 것이라는 것도 긍정해야 한다는 것. 즉 무상으로 주는 것이 좋은 것만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속에는 고통과 질병 즐거움과 죽음도 같이 준다는 것이다. 무상으로 주는 삶의 다양성을 우리는 왜 죽음이나 고통은 안 받으려 할까요? 삶을 긍정한다면 이것 또한 다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 그래서 살아서 삶을 긍정한다면 죽음 또한 삶에 포함된 축제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예수는 살아서 삶을 긍정하며 고결한(Active) 힘으로 살았지만, 반동적인 (Reactive)힘에 의해 능동적인 힘을 빼앗긴 자이다. 예수를 못 박은 자들은 자신과 신을 배신하고 기존의 가치들로 무장하여 반동적인 힘을 쓴 자이다. 이들의 죽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두려움에 떠는 자들이다. 무상으로 주는 삶의 다양성 속에 죽음에 대한 답이 있는 것 같다.

 

자기극복 이란

 

독일어로 극복이란 Uberwindung로 넘어간다. 선회하다, 돌다 이런 뜻이 있다고 한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자기극복의 이미지는 지금은 힘들어도 앞으로 점점 삶은 낳아질 거야 하는 직선적인 개념들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니다. 퇴보하는 것을 극복을 통해서 잘 되어가고 있다고 이런 것이 극복이 아니다. 자기극복이란 창조와 연결시켜야 하고, 임신이나 분만과 연결시켜야 한다.

“더없이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이여, 너희의 위험은 강에 있는 것도 선과 악의 종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저 의지 자체에, 곧 힘에의 의지, 지칠 줄 모르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 의지에 있는 것이다.”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생산해 내려는 생의 의지(힘의지)는 멈출 줄 모른다. 안주 할 줄도 모른다. 인간은 끝없이 생산되는 힘 의지를 자기들 방식대로 해석하고 규정짓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의 본질은 힘에 의지이고, 이 힘은 생성을 원한다. 반동적인 힘으로 인간은 안정을 원하고 보전과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는 힘에게 니체는 질문한다. 너희가 안정을 원한다고 생명도 정말 안정을 원할까. 또 안정과 보전을 노래하는 너희들은 그래서 행복하냐고 질문하고 있다. 안정된다고 해서 삶이 행복할 것만 같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제일 못 견디는 것이 지루함과 권태로움이라는 것. 아이들의 속성만 보아도 잠시도 지루함을 못 견디고 움직인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영원회귀는 삶의 다양성을 이야기 한다. 내가 어떤 순간에 경험하는 힘이나 느낌들이 그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게 된다. 예전에는 A로 평가했는데 지금은 극복해서 B라로 평가해 이게 아니라 내가 A라고 평가하는 힘 자체가 과거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를 포함하는 것이 영원회귀라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에 가면 영원회귀란 결국 디오니소스적 감정이라고 한다. 이 감정은 항상 두 번째 긍정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괜찮아 좋아 이런 차원의 긍정이 아니라. 니체가 말하는 긍정이란 또 다른 긍정을 촉발할 수 있는 긍정이자 이전의 힘을 비틀 수 있는 긍정이다. 내가 반동적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마주침을 통해 긍정적 힘으로 발현된다면 긍정적 힘에 의지가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힘 의가 Reactive에서 Active한 힘으로 전환이 되었다면 이게 가치의 전환이며 영원회귀와 연결되어 있게 된다.

우리가 과거의 사건들 때문에 부정적인 힘 의지에 휩싸여있다면, 우리는 반동적인 힘을 사용하고 있고 현재도 계속해서 과거의 해석을 부정적인 힘 의지로 해석해 내게 된다. 따라서 과거를 변환시키는 것은 내가 그렇게 하길 ‘원했어’ 라고 힘의 의지를 다르게 작동해야 한다. 영원회귀는 예스(긍정)이다. 예스라고 하는 순간 삶이 나에게 선사한 모든 다양성들을 내가 원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긍정의 힘이다. 삶의 다양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생성이 내포하고 있는 생주이멸과 고통과 즐거움까지도 다 긍정한다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설명하기가 싶지 않다. 그러나 주사위 놀이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극복은 해석이 달라지는 것, 과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 다른 힘으로 평가하는 것이 자기극복이다.

“모험과 위험, 목숨을 건 주사위놀이가 된다는 것, 이런 것들이 더없이 큰 자가 하는 헌신이다.” 주사위 놀이가 상징하는 것은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없다. 매번 달라지는 배치만 있다는 것. 하늘이 나에게 매번 다른 숫자를 던져 준다 하더라고 나도 매번 상관없이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던질 때마다 매번의 눈이 다 같이 않다고 해서 더 가치가 있는 것도 더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 삶은 정해진 어떤 것은 없지만 매번 목숨을 걸고 주사위를 던질 뿐이다. 이것이 삶에 대한 헌신이다 우리가 헌신할 것은 삶 말고는 없다는 것.

“진정, 몰락이 일어나고 낙엽이 지는 곳에서 생명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니. 힘을 확보하기 위해” 희생과 몰락이라는 것은 헌신이 일어나고 낙엽 지는 곳에서 일어난다. 생명의 희생해야 꽃으로 피어나고 잎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꽃과 잎은 힘이다. 이 힘은 또한 낙엽으로 몰락이 있어 가능하다. 그러니까 몰락과 낙엽이 지는 사건은 슬픔도 아니고 꽃과 잎의 관계 속에서 해석된다. 그러니까 꽃과 잎은 떨어질 때 되면 떨어지고 낙엽으로 몰락으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는 과정이다.

“나 투쟁이어야 하며 생성과 목표, 그리고 목적 사이의 모순이어야 한다는 것, 아. 나의 의지를 간파하는 자는 나의 의지가 그 어떤 굽은 길을 가야 하는지도 간파하리라”

여기서 투쟁은 대립적인 것과 싸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투쟁은 다양성들 사이에 힘의 차이를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이한 힘들은 그냥 끊임없이 변이하면서 제압하기도 하고 정복하기도 하고 훔치기도 하면서 생성되는 것 이런 의미의 투쟁이다.

“내가 창조한 것과 나의 사랑에 대적하는 적이 되는 않을 수 없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창조한 것에 고착이 되지 말고, 새롭게 모험과 시도를 떠나야 한다고 한다. 동양식으로 자기극복을 해석한다면 무집 착히 아닐까? 극기란 사욕을 부리지 말고, 자신의 고집하는 바가 없는 것. 공자님은 義必古我(의필고아)가 없었다고 한다. 반드시 목적을 달성해야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야 하고, 근거 없는 억측을 부리는 의필 고아를 없애는 것도 자기극복의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옳다고 믿는 것을 꼭해야하고, 반드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고, 난 이런 사람이야 하고 뽐내고 싶어 하고, 자기가 소유한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러니까 자기 창조한 곳에서 안주하고 절대시하게 된다. 뭘 창조하고 넘어가는지가 자기극복과 자기경멸을 시작하게 되는 지점이다. 자기극복의 이행하는 자, 몰락하는 자, 건너가는 자, 위버멘쉬는 자기극복으로 가는 자이이다. 극복이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시라...

 
전체 2

  • 2017-08-22 03:12
    죽음에 꽂히신 것 같네요...! 확실히 동양에서도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니체도 왠~지 비슷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에게는 삶 가운데서 죽음, 몰락을 경험하는 게 자기극복의 열쇠가 된 것 같기도 한 것 같습니다. 흠흠.... 어렵군요.

  • 2017-08-22 09:00
    '극복은 창조다' 그렇다면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인간은 창조되어야 할 무엇이다"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산행 중 니체를 만나시다니 멋지십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