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1012 셈나에서는요...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10-16 15:31
조회
95
10.12 카프카 세미나 후기

소설을 좋아하니 카프카도 좋아할 게 분명해, 쉽게 생각하며 세미나를 시작해서 벌써 세 번째 시즌을 맞이했습니다^^; 다른 소설들은 읽고 또 읽으면서 친숙해지고 윤곽이 잡히고 하는 맛이 있어 무언가 알아간다는 느낌을 받게도 되던데, 카프카는 여전히 잡히지 않고 낯설고 서먹서먹한 기계 같네요ㅎㅎ 좀 더 공부하면서 차차 익숙해질지 아니면 매번 하나하나 낯선 것들을 발견해나갈지 알 수 없습니다만, 기약 없이 소설책을 읽어나가는 게 저로선 아주 놀라운 경험 중 하나랍니다.

이번 주에는 총 네 편의 단편을 읽었더랬습니다. <유형지에서> <신임 변호사> <법 앞에서> <만리장성의 축조>.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고, 심지어 가장 짧은 작품인 <법 앞에서>가 가장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요.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해석이 크게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시골 사람(왜 ‘시골’인가에 대한 오선민 선생님의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도시에 대한 대립어가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떠나온 자들이 카프카의 시골 사람들이라고 하셨네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 말씀대로 시골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네요.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떠난 사람도 엄청 많습니다0.0)이 연구자, 관찰자이자 투쟁가다. 그는 법 안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 문지기를 그 자리에 꼼짝 못하게 만들고 끝내 법의 문 하나를 닫는 성과를 올렸다. 오선민 선생님은 그래서 시골 사람을, 연구자 내지 관찰자라는 측면에서 <만리장성의 축조>의 작중 화자와 연결시키셨고요, 또 카프카의 가장 유명한 장편 <성>의 클람이 시골 사람과 포개진다고 하셨습니다. 시골 사람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방식, 그러니까 법을 일시적이나마 부분적으로나마 중단시킨다는 해석과 달리 제게는 시골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법을 작동시키고 유효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첫 번째 법의 문 바깥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늙어 죽을 때까지 한 것이라고는 누군가가 자신을 법 안에 들여보내주길 바란 것, 허가를 기다린 것밖에 없는 것처럼 보여서. 그 어디에도 명령권자가 보이지 않는데도 법이 작동될 수 있는 건 시스템 안에서 명령어를 실어 나르는 문지기 같은 자가 있기 때문이고, 문지기의 말을 수신하고 받아들이는 시골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네요.

<만리장성의 축조>는 읽으면서 대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 건가 잡히지가 않아 무척 당황스러웠던 소설입니다. 만리장성이 부분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언제부터 누가 무슨 의도로 이런 시도를 하는지 나는 이를 연구하고자 한다… 이것이 작중화자의 말입니다. 그런데 애초 막아야 한다는 북방 민족은 그 꼴을 본 적도 없고, 어떤 책의 저자는 사실 만리장성의 축조는 바벨탑의 토대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생각해보니 축조를 결정한 최고위 지휘부를 보았다는 사람도 그들이 어디서 모이는지 안다는 사람도 없는 겁니다. 대체 우린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리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또 뭐지? 우리는 어디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거지? 0.0;;
대략 이런 소설인데, 뭔가 하나의 키워드로 잡아보려 하면 다른 데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아주 난감했답니다. 그래도 세미나 시간에 다른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새로 하고 정리할 수 있었네요.(역시 책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저는 수많은 방들을 통과해 황제의 칙명을 옮길 의무가 있는 칙사를, 당장의 문 하나를 통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인간의 모습을 구상화한 것인가 짐작했었어요. 인간은 그런 식으로, 정해진 의미라곤 없는 이 세계 안에서 나름으로 의미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고, 무의미해 보이거나 일견 관료주의 시스템의 상징처럼 보이는 만리장성의 축조도 더 크게 보면 그런 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칙사를 장성 축조에 동원된 수많은 일꾼으로, 또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왔어요. 또 문지기로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 그 안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자, 그런 자들에 의해 사회 기계는 굴러가지요. 지휘부는 알려진 바 없고 황제가 누구인지도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러나 일은 착착 진행됩니다. 문서들을 나르는(벽돌을 나르는 일꾼들처럼)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 루트 안에서 흘러 다니는 문서들에 의해.

이와 연결해 오선민 선생님의 <유형지에서> 해석이 재미있었습니다. 시스템을 아는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무지한 채 살아 돌아다닌다... 그래서 처형 기계의 유일한 조작자이자 이론가인 장교는 죽고, 죄수였던 자(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자!)와 사병은 풀려나 섬 안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카프카의 연구자들은 연구를 위해, 혹은 연구하는 과정에서 대상과 독특한 거리감을 만들어냅니다. <유형지에서>의 탐험가가 방문자인 것도 그런 까닭이고, <만리장성의 축조>의 화자가 축조하는 사람의 자리에서 떠나게 된 것도, 또는 원숭이 피터가 인간도 원숭이도 아닌 존재인 것도 그와 연관됩니다. 그런 거리감이 없는 자, 그런 자는 무지하므로 시스템에 동화된 채 살거나 아니면 완벽히 다 알아 합일되어 죽나봅니다-_-;;
저는 장교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장교가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기계가 완성되어 자동운동을 시작하는 장면이 아주 매혹적으로 느껴졌어요. 하나의 기계가 다른 하나의 기계와 접속해 각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리듬으로 운동하면서 변신하는 과정이 그려지는 듯.

이응 선생님께서 공지하셨지만 다음 시간에는 꽤 많은 단편을 함께 읽고 만납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재미난 키워드와 독해와 만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읽고 또 읽어도 어려운 카프카, 이것이야말로 마성이 아니겠습니까 ^^;

참, 한 가지 더. 세미나 시간에 종종 관료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는데요, 이번 주에 특히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각자 이러저러한 이미지만 어렴풋하게 있는 듯해 다음 주에 모두들 숙제를 해오기로 했어요. 카프카의 단편 속에 묘사된 관료주의에 대해 각자 분석해오기. 저는 <만리장성의 축조>를 가지고 조금 더 생각해볼까 싶습니다.

모두 다음 주에 만나요!

 

 

 

 

 

 
전체 1

  • 2017-10-17 10:06
    손에 잡히지 않는 마성의 문학 맞네요ㅋ 그래서 카프카 문학에는 더더욱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한가봐요! 어떤 연구자가 <법 앞에서> 문지기 수염을 섹슈얼하게 해석한건 동의가 안되지만ㅋㅋ 선민샘의 적극적인 해석은 흥미진진했다는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