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516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5-14 16:05
조회
3462
아이고... 공지가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 또 죄송. 5일만에 다시 보는 구절들이니 훨씬 새롭고 신선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말씀 드리며...
아울러 이번 주 후기 담당인 안명애쌤에게도 염치 없지만 재촉 한 번 날립니다. 왜 자꾸 글쓰기를 미루시는지 ㅎㅎㅎ 쓰시다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 정말로 온답니다.
담주는 <인간> 끝까지 읽어오시고요, 모두 공통과제 가지고 만나요.
간식은 현옥쌤께서 해주시겠습니다.
자, 그럼 뒤늦은 수업 정리 들어갑니다... ㅜ

15. 持經功德分 (경을 가지는 공덕)

須菩提 若有 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布施 後日分 亦以恒河沙等身布施 如是無量百千萬劫 以身布施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다시 저녁에도 또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무량한 백천만억 겁 동안을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受持讀誦 爲人解說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않으면 그 복이 저 몸을 보시한 복보다 수승하리니, 어찌 하물며 경을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해설해줌이겠는가.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有 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
수보리야, 요약해서 말할진대 이 경은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끝없는 공덕이 있느니라.

如來 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여래는 대승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이 경을 설하며 최상승에 발심한 자를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느니라.

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不可量 不可稱 無有邊 不可思議功德 如是人等 卽爲荷擔 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모두 알며 이 사람을 모두 보나니,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끝이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모두 성취하게 되리라. 이런 사람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짐이 되느니라.

何以故 須菩提 若樂小法者 着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작은 법을 좋아하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게 되므로 곧 이 경을 능히 받아들이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서 해설하지 못하느니라.

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天人阿脩羅 所應供養 當知 此處 卽爲是塔 皆應恭敬 作禮圍繞 以諸花香 而山其處
수보리야, 어느 곳이든지 만약 이 경이 있는 곳이면 일체 세간의 천상과 인간과 아수라 등이 응당 공양하게 되리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탑이 됨이라. 모두가 공경히 예배하고 돌면서 여러 가지 꽃과 향으로써 그곳에 흩으리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몸으로 보시를 한다 해도 금강경을 듣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수승할 것이니 읽고 외워 해설까지 한다면 그 공덕이 어떻겠느냐, 금강경의 공덕은 불가사의하고 말로 다 할 수도 없다…….
지난 시간에 재미있었던 설명은 바로 이 ‘不可思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불가사의한가? 이는 경이 들려주는 바가 결국 ‘원래 있는 그대로’라는 것, 고로 달리 사량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랍니다. 신비롭고 알 수 없는 것이라 숭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는 것이니 이를 듣고 거스르는 마음이 없다면 그때 이미 우리는 청정한 눈을 얻은 것이요 부처의 세계에 있는 것이라는 거죠.
헌데 원래 그렇게 태어났는데도 어째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살 수 없는 거지? 이미 불교 수업을 들어온지라 이에 답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든 환상, 바로 我相에 그 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我가 시공을 한정시킨 데서 나온다는 설명이 흥미로웠어요. 일요일에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수업에서 우리가 오늘 피곤한 이유를 설명하자면 결국 빅뱅, 아니 아직 수프 상태였던 우주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지요. 채운쌤 표현에 따르면 인과는 결코 우리 한정에 갇히지 않습니다. 세계는 늘지도 줄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그런 한에서 천변만화하는데 우리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시공을 한정시키고 자신이 포착한 몇 가지만을 연결시켜 이 일은 저것 때문이라고, 너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맙니다. 이렇게 보건대 우리가 말하는 시공이란 我가 만든 한정이요, 동시에 우리가 세운 我는 한정된 시공의 산물… 고로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바로 그 사실, 세계의 진면목에 무지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곧 我相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듯합니다.
이런 한에서 우리는 결코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텐데, 왜냐하면 한정시킨 과거가 다시 현재를 한정시키고 이게 다시 미래에 투영되는 게 무명의 삶이기 때문이랍니다. 늘 이것 때문에 뭐가 안 된다 하고, 저것만 얻으면 모든 게 잘 될 것 같고, 안달복달하고 마음 졸이고 지쳐버리길 반복하는 우리네! 그래서 붓다는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불가사의하다… 딱히 머리로 재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어디 달리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있는 그 자리를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금강경이다. 그러니 경전이 말하는 바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시공 자체를 깨치는 것, 무아의 상태에 이르는 길이다…….

16. 能淨業障分 (능히 업장을 깨끗이 함)

復次 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 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輕賤 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다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지니며 읽고 외우더라도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이 사람은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로되, 금생의 사람들이 업신여김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須菩提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 於燃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 諸佛 悉皆供養承事 無空過者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을 생각하니, 연등불을 뵙기 전에도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서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겼으며 헛되이 지냄이 없었노라.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能得功德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 不及一 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그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산수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有受持讀誦此經 能得功德 我若 具說者 惑有人聞 心卽狂亂 狐疑不信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받아지니며 읽고 외워서 얻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은 듣고 마음이 몹시 산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須菩提 當知 是經義 不可思議 果報 亦不可思議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뜻도 가히 생각할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생각할 수 없느니라.

첫 구절부터 아리송합니다. 채운쌤 풀이에 의하면 경을 받아 지녔으나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는 전생의 죄업의 과보를 받는 것이나, 만약 그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이야기. 여기서 포인트는, 상대가 나를 욕하고 업신여기고 화낸다 해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라지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욕을 안 받아서 그 욕이 다시 상대에게 간다면 그냥 ‘반사~’겠지만^^; 여기선 그게 아니라 상대의 화와 욕을 소멸시키니 상대의 업도 함께 소멸된다는, 그야말로 보살행 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종종 붓다가 ‘말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게 되는데요, 여기서 말세란 특정 시대를 가리키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이 사는 모든 시대라고 이해해야 하는가봅니다. 니체가 unzeit(때에 맞지 않는 것)라는 단어를 이따금 쓰는데, 이것도 단지 반시대성이라고 번역했을 때 오해가 많지요. 니체는 자신의 사유가 특정 시대를 거스르고 특정한 조류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낯선,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더군요.불교 철학 역시 특정 시대에 빛을 발한다거나 특정 시대에 고난에 처한다기보다는 인간이 있는 한 어느 시대에나 그 혁명성을 잃지 않는다고 이해할 수 있겠죠. 보다 현실적으로 번역하자면 인간이 문명을 향유하는 한, 문명 속에서 안락함을 갖는 한, 세계를 분별하면서 하나하나 토대를 쌓아가는 한, 금강경은 언제나 낯설고 이상한 음성일 수 있다는. 채운쌤께서 말씀 중에 ‘어느 시대에도 언제나 외곽의 이야기’라는 표현을 쓰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정확한지는 자신 없음요;;), 개인적으로는 그 말이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17. 究竟無我分 (끝까지 我가 없음)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니, 어떻게 마땅히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리까.”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當生如其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면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낼지니, 내가 응당 일체 중생을 멸도하리라. 일체 중생을 멸도하고 나서는 한 중생도 멸도함이 없느니라.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것이 아니니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 所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불 처소에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 燃燈佛所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이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이 연등불 처소에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佛言 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須菩提 實無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아니니라.

須菩提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수보리야, 만약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음인댄 연등불이 곧 나에게 수기를 주면서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라”고 하시지 않으려니와 실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말씀하시되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니라”고 하시니라.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니라.

若有人言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길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아니니라.

須菩提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가운데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그러므로 여래가 설하되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하시니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수보리야, 말한 바 일체법이란 곧 일체법이 아님일새 그러므로 일체법이라 이름하느니라.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이 장대함과 같느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 사람 몸의 장대함도 곧 큰 몸이 아니고 그 이름이 큰 몸입니다.”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이런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하리라’ 한다면 곧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음이니,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名爲菩薩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보살이라 이름하지 않느니라.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그러므로 부처님이 설하되 “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수자도 없다” 하느니라.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이런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음이니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무슨 까닭인가. 여래가 설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이니라.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의 법을 통달한 자이면 여래는 이를 참다운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일체중생을 멸도했으되 한 중생도 멸도했다 생각하지 않는 것, 설의는 이를 “교화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라 말합니다. 채운쌤은 불교야말로 막강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라 하시는데, 사실 수행과 구원 그 모두가 자기를 위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아주 절묘한데, 왜냐하면 실로 ‘타인’ 내지 ‘타인을 위해’라 할 만한 것이 애초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랍니다. 우리의 분별(=해석체계)은 시시각각 주체를 강화시키지만, 붓다를 보면 알 수 있듯 이것이 분별임을 아는 순간, 내가 또 분별을 짓고 있음을 알아채는 바로 그 순간, 달리 말하면 나의 분별이 나의 해석체계에 불과함을 보고 이게 타인과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는 순간 우리는 분별을 멈출 수 있답니다. 바로 그때를 가리켜 붓다는 청정함이라 하니, 실로 분별과 청정함이, 마구 일어나는 물결과 고요한 수면이 서로 다른 차원의 두 상태가 아니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열반은 지난한 수행의 끝에 겨우 도달하는 골인지점이 아니라, 수행의 과정 안에서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기쁨이고 고요가 됩니다. 수행자가 매번 자신이 또 분별을 짓고 있음을, 또 아상을 세우고 있음을 알아채는 바로 그때마다 그는 열반에 든다는 거죠.
이에 덧붙여 채운쌤은,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가 아니라 외부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게 불교가 말하는 깨달음이라는데, 불교는 알면 알수록 생각도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군요.

18. 一體同觀分 (한몸으로 동일하게 봄)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를 부처님이 설하신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씀하셨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한 항하에 있는 모래수와 같이 이렇게 많은 항하가 있고

是諸恒河所有沙數諸佛世界 如其寧爲多不 甚多 世尊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바 모래 수만큼의 불세계가 있다면 이는 얼마나 많음이 되겠느냐.” “심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告 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가지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무슨 까닭인가.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이니라.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만 정리해볼게요. 부처는 독심술사도 아닌데 어찌 중생 마음을 하나하나 다 아누? 채운쌤 왈, 마음의 본질을 꿰뚫으면 어떤 이야기도 알 수 있고 할 수 있답니다. 케이스바이케이스로 마음 하나하나 사건 하나하나를 다 분간하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생과 멸을 알기에 중생에게 말할 수 있다는. 설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심이라 말하면 과거는 이미 멸하여 그 마음을 얻을 수 없으며 만약 현재심이라면 현재는 텅 비어 그 마음 또한 얻을 수 없으며 만약 미래심이라 하면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 마음을 가히 얻을 수 없으니, 적연히 가고 머무름이 없으며 확연하게 모든 상이 없어서 일체의 시간중에 가히 얻어 볼 수 없으며 일체의 법중에 또한 알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마음은 어디 하나 붙잡고 머무를 게 없이 계속 변하고 흐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매번 번뇌를 알아채고 그것을 쳐내려 하는 것뿐이라는.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마음이 어디에 붙들려 있을 수 없음을 아는 이, 그게 곧 부처라는군요. 우리네 하루하루가 불안한 범부들은 늘 어딘가에 마음을 매어두고 싶은데 말이죠.

19. 法界通化分 (법계를 다 교화하다)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如是 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甚多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에 쓴다면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을 얻음이 매우 많겠습니다.”

須菩提 若福德有實 如來不說 得福德多 以福德無故 如來說 得福德多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다움이 있을진대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으련만 복덕이 없으므로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느니라.”

20. 離色離相分 (색과 상을 떠나다)

須菩提 於意云何 佛 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見 何以故 如來說 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가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마땅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구족한 색신은 곧 구족한 색신이 아니고 그 이름이 구족한 색신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見 何以故 如來說諸相 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써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모든 상의 구족함이 곧 구족이 아니고 그 이름이 모든 상의 구족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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