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강좌

'대롱대롱 잘 매달려 하늘 즐기기' - 주역수업(05.21)을 듣고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05-27 02:30
조회
596
오늘의 괘는 리괘(離卦)입니다!

소성괘로 이미 모두 잘 아시다시피 리(離)는 문명(文明), 밝음()을 상징하고요. ()는 리()이다’라는 설명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이 글자는 ‘아름다울 려’가 아니라 어딘가에 무언가가 ‘걸려 있다’, ‘매달려 있다’는 뜻을 가지는 ‘리’ 자로 읽어야 해요. 하늘에 별과 달이 하늘에 떠(매달려) 있는 모양을 나타낼 때도 쓰는 글자라고 하죠. 리괘의 모양 자체가 ‘두 양 사이에 음이 걸려 있다’고 볼 수 있겠어요. 리괘는 소개하는 글부터 참 멋진데요. 만물은 모두 어딘가에 걸려 있는 바가 있대요(萬物 莫不皆有所麗).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어딘가에 연결되어(관계망에 속하여) 살고 있다는 것이죠. 형태가 있는 것이라면 걸려 있는 바가 있고(有形則有麗矣), 사람에게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在人則爲所親附之人), 행해야할 도(所由之道)와, 주관해야 할 일(所主之事)이 모두 걸려 있는 바가 있는 것(皆其所麗也)이래요. 그런데 이 사람이 걸려 있는 바(人之所麗), 즉 관계하는 바는 바르게 하는 것이 이롭고(利於貞正), 그 바름을 얻으면 형통할 수 있다(得其正則可以亨通)고 설명하고 있어요.

 

괘사를 보면 ‘리는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 형통하고 암소를 기르면 길하리라(離 利貞 亨 畜牝牛 吉)’고 되어 있는데요. 오잉. 갑자기 웬 암소를 기르라는 말을 한답니까. 가축을 기르며 살라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죠. 주역은 소의 성질을 순종(順)하는 것으로, 특히 암소는 순종의 지극함(順之至)으로 보고 있어요. 무엇을 따라 순종하나요. 물론 여기서는 바름, 도리, 천도를 따르는 것을 말하죠. 그러니까 진짜 암소를 기르라는 말이 아니라, 암소처럼 살라는 거네요. 더 자세히 말하면, 암소의 순종하는 마음을 본받아서 바른 마음으로 천도를 따르는 덕을 기르라는 것(養其順德)이죠.

 

저는 여기 리괘의 단전이 참 좋았는데요. ‘해와 달은 하늘에 걸려 있고, 백곡과 초목은 땅에 붙어있다(日月 麗乎天 百穀草木 麗乎土)’는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문장이었어요. 그런데 이 평범한 문장에다 정샘의 해설과 우샘의 풀이가 만나니 바로 감동적인 내용을 담은 문장이 되더군요!! 정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만물이란 각자 걸리는 바가 있지 않음이 없습니다. 천지의 가운데에 걸리지 않은(다른 것과 관계하지 않은) 존재란 없지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땅히 그 걸려 있는 바를 잘 살펴야 하는데, 그 걸려 있는 것이 올바름을 얻으면 형통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우샘께서 잘 살핀다는 의미의 ()이라는 글자를 강조하셨는데, 자신이 연결되어 있는 바를 자세히 잘 살피는 것이 포인트라고 하셨어요. 내가 어떤 망(네트워크, 그물망)에 속해서 살고 있는지, 내가 어느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피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요. 조급하게 코앞의 것들만 하면서 마냥 빠르게 달려가기만 해서는 내가 지금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지금 어떤 관계 속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놓치기가 쉽잖아요. 그것을 잘 살피지 않고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는 채로 어떤 것이 바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어떻게 생기겠어요. 올바름을 얻는 것의 필수적인 조건이 관계망을 잘 살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요. 주역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망을 이야기 할 때 하늘과 땅, 백곡초목과 인간, 이렇게 모두 동등하게 나열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말 그대로 천지인’, 하늘과 땅(자연)과 인간을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사유인 것이죠. 이것이야말로 크고 넓은 사유 아닙니까. 천지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자리, 해와 달과 별과 나무와 꽃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산과 강과 고양이와 강아지와 개구리와 참새와 나비와 모기와 물고기와 인간이 맺는 관계, 이 복잡하고 거대한 그물망 속의 내 자리를 생각해 보면 와,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참 작고 특별할 것이 없는, 딱히 잘났다고 함부로 나댈 특권 같은 게 없는, 우리 집 앞의 돌 틈새에서 자라나온 민들레 옆 평범한 자리이고, 난 그냥 1/n의 작은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있을 뿐인 거죠.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아주 잠깐이나마 몇 평, 몇 평하는 인간의 금긋기에 대한 집착이 이 크고 넓은 우주 속에서 너무 바보같이 어리석게 느껴지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에까지 이야기가 어쩌다 흘러버린 김에, 효사에서 나온 비슷한 얘길 하나 더 하면요. 구삼을 보면 해가 기울어 가는데(日昃之離) 늙은이가 탄식을(大耋之嗟) 해요. 늙은이가 늙어감을 탄식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고, 해가 기우는 것을 탄식한다고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두 해석 모두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안타까운 나머지 크게 탄식을 하는 장면인 것이죠. 점점 다해가는 시간에 초조해진 이의 탄식이라니 구슬프지 않나요. 가엾게 보이기도 하죠. 사람이라면 이 안타까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초조한 감정 같은 것을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잖아요. 때로는 시간이 멈춰줬으면, 조금만 느리게 흘러갔으면, 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고요. 하지만 이것을 주역은 ()하다고 단박에 가차 없이 얘기합니다.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흉한 것이라고요. 해가 떠오를 때가 있으면 저물 때가 있는 것이죠. 정샘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생사, 시작과 끝은 시간의 큰 변화(人之終始 時之革易)이고요. 성대해지면 반드시 쇠퇴할 때가 있고, 시작하면 반드시 끝낼 때가 있는 것이 영원하고 항상된 도예요(盛必有衰 始必有終 常道也). 그래서 이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이치를 따르고 그 변화 자체를 즐거움으로 삼아요(達者 順理爲樂). 그래서 낙천할 뿐(樂天而已)이죠. 이 ‘낙천’이라는 말은 단순히 ‘낙천적’이라는 말을 한참 넘어서서, 그의 삶 속에서 천도의 이치를 따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기는() 을 말해요. 이것을 여기서는 ‘질장구를 두드리며 노래한다(鼓缶而歌)’고 표현을 했는데요. 사람이 늙어가는 것이나 죽는 것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니, 대단한 악기를 꺼내서 거창한 연주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밥그릇, 국그릇을 두드리며 노래한다는 거죠.

 

현대인의 가장 큰 두 가지의 집착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단전에서 얘기했던 ‘소유에 대한 집착’과 여기 효사에 등장하는 ‘젊음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인간인 이상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자유로운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이렇게 주역을 읽으면서 아,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문득 깨닫거나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점점 자주 있게 되면, 조금씩 그 초조함과 소유욕에서 편안해 질 수 있는 힘이 생겨날 것 같아요. 힘들다고 허우적대던 작년에서 그다지 좋아지지는 않은 채로, 올해도 이런저런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도 살짝 괜찮아진 제 마음을 봐도 이 공부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니 이번 주도 결론은 ->->->공부입니다! 모든 다양한 내용이 항상 같은 결론으로 소급되는 신기한 현실!!
전체 2

  • 2016-05-27 07:39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흉한 것'. 주역 배우다 보면 이런 데서 뭉클해 집니다.
    진짜 흉한 건 저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들을 거부하는 것. 언니 말대로 진짜 크고 넓은 사유에요. 열심히 공부해봅시당!

    • 2016-05-27 18:40
      오잉. 답글도 기승전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