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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번역기계] 팀 잉골드, <선線> 2. 흔적과 실과 표면 / 2-1. 선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8-26 09:49
조회
1525
오! 번역기계 // 팀 잉골드Tim Ingold의 <선들Lines: A Brief History>(Routledge, Oxon, UK.) 

번역 / 정아






2. 흔적과 실과 표면


점들이 한 줄로 모여서 선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선은 길이로 나눌 수 있지만, 너무 가늘어서 쪼개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 옷감의 실처럼 여러 선들이 단단하게 얽히면 표면이 생겨날 것이다. -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회화론》, 1435 (Alberti 1972: 37-38)

2-1. 선이란 무엇인가?

앞 장에서 나는 더 광범위한 표기의 역사에 글의 역사가 포함될 거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 역사의 과정을 그려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점은 모든 표기 체계가 선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표기의 역사는 선의 역사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양에서 글의 역사, 특히 중세의 필사본에서 현대의 인쇄본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조사하면서, 중요한 것은 선 자체의 특성이나 선의 생성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내가 언급한 선들은 대부분 양피지나 종이에 새겨졌다. 하지만 그 선들이 이해되는 방식은 결정적으로 그 평평한 표면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 표면을 여행할 지역으로 보느냐, 식민화할 공간으로 보느냐, 몸의 피부나 마음의 거울로 보느냐에 따라 선들은 다르게 이해되었다. 따라서 표면을 단순히 선이 새겨지는 배경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글의 역사가 표기의 역사에 포함되고 표기의 역사가 선의 역사에 포함되는 것처럼, 선의 역사는 선과 표면의 관계들, 그리고 그 관계들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그 관계들과 그것들의 변화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먼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선이란 대체 무엇인가? 선이 있으려면 표면이 ‘있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표면 없이도 선은 존재할 수 있는가? <선>이라는 단순한 제목을 붙인 멋진 시에서 맷 도노반(Matt Donovan)은 선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마음에 떠오르는 혼란스럽고도 풍부한 연상들을 완벽하게 담아냈다.



가는 획 하나가 새겨진 표면, 두 점
사이의 상상의 길. 특이한 두께,
입심 좋은 말, 조각, 끝나지 않은 구절.
어떤 모양의 한쪽 가장자리이며 그 모양의
전체적인 윤곽선. 편곡된 멜로디, 낭송,
지평선이 형성되는 방식. 평평하게 고르기,
올가미 놓기, 몸의 자세(움직일 때와 쉴 때 모두)를
떠올려보라. 손바닥과 주름, 누군가의 손에 단단히 감긴 밧줄,
그려진 표시와 비슷한 것들과 관련이 있다. 봉합선 또는 산마루,
절개, 빛줄기. 약을 톡톡 두드려 모으는, 거울에 비치는 면도날,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공회전하는 기계들.
도관, 경계, 까다로운
생각의 과정. 그리고 여기, 텐트 말뚝의
팽팽함, 삽질이 된 땅, 도랑의 깊이.
(Donovan 2003: 333)

2백 50년쯤 전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박사는 ‘선’이라는 단어가 갖는 17가지 의미의 목록을 작성했다. 그가 1755년에 펴낸 《영어 사전(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에 포함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길이의 확장
2 가느다란 줄
3 작업을 지시하기 위해 연장된 가닥
4 낚시 바늘을 잡아주는 줄
5 손이나 얼굴의 윤곽 또는 표시
6 소묘, 스케치
7 외형 윤곽
8 한쪽 가장자리에서 다른 쪽 가장자리로 쓰인 것, 시
9 열(列)
10 서두른 작업; 참호
11 절차, 배치
12 확장, 제한
13 적도, 주야평분선
14 자손, 가족, 올라감 또는 내려감
15 1라인은 1인치의 10분의 1
16 편지; ‘네 편지 읽었어’라고 쓸 때
17 린트(lint) 또는 아마(flax)

그다지 시적이진 않지만,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슨의 목록은 도노반의 목록과 공통점이 많다.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두 목록은 뒤죽박죽이고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 둘을 종합하면 우리 연구의 출발점을 얻게 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진행해야 좋을까? 우선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선들의 종류에 대해 임시 분류 체계를 마련하고 각각의 예를 생각해보면 도움이 될 듯하다. 그렇게 시작해 보겠다.





2-2.
선의 분류 체계

(1) 실(thread)

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실’과 ‘흔적’으로 부를 것이다. 물론 모든 선이 두 범주 안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러하며, 내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할 것도 바로 이 두 종류의 선이다. 실은 가느다란 섬유 같은 것으로, 다른 실들과 얽혀 있거나 3차원 공간의 지점들 사이에 떠 있다. 실은 비교적 미시적인 수준에서 표면을 갖지만 표면 ‘위에’ 그려지는 건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털실 뭉치, 실타래, 목걸이, 실뜨기 패턴, 해먹, 어망, 배의 삭구(索具), 빨랫줄, 다림줄(수평 수직을 헤아릴 때 쓰는, 추가 달린 줄-역자), 전기 회로, 전화선, 바이올린 현, 철조망, 밧줄, 현수교.

이것들은 모두 사람 손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실이 인공적인 것은 아니다. 전원을 산책하면서 잘 둘러보면 실 모양의 선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자연의 선형적 질서는 대부분 뿌리, 뿌리줄기, 균사체(그림 2.1)의 형태로 땅속에 숨겨져 있지만 말이다. 지상에서는 식물들의 싹이 움트고 줄기가 자란다. 모든 낙엽수의 잎에는 선형의 잎맥이 있고, 모든 침엽수의 잎은 그 자체로 실선(thread-line)이다(Kandinsky 1982: 627-8).

그림 2.1  / 균류학자인, 저자의 아버지 C. T. 잉골드가 그린 균사체


털과 깃털, 더듬이와 수염, 혈관과 신경계를 지닌 동물의 몸 역시 복잡하게 연결된 실들의 꾸러미로 이해될 수 있다. 1896년에 쓴 《물질과 기억》에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은 신경계를 “주변부에서 중앙까지, 중앙에서 주변부까지 뻗어있는 엄청난 수의 실로 구성된”(Bergson 1991: 45) 것으로 묘사했다. 동물들이 실로 만들어졌다면, 실을 만드는 동물들도 있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은 거미지만 누에 역시 실을 만든다. 하지만 이런 실들의 재료는 몸에서 흘러나온다. 대부분의 경우 실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특기이다. 인간은 손의 능란한 움직임으로, 때로는 치아의 도움을 받아가며 실을 만든다. 실을 사용할 때도 손으로 정확하게 쥐고 엄지와 검지로 조작한다.

위대한 건축가이자 미술사학자인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는 1860년에 발표된 한 에세이에서, 섬유가닥을 엮고, 꼬고, 매듭을 짓는 행위가 예술의 가장 오래된 형태 가운데 하나이며, 거기서 건축과 직물을 포함한 모든 것이 유래되었다고 주장했다(Semper 1989: 254). 심지어 집을 짓기 전에도 사람들은 나뭇가지로 동물우리나 울타리를 엮어 만들었고, 천을 짜기 전에도 바늘로 엮고 기워서 그물과 갑옷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같은 책 218-19, 231). 이후 주류 미술사학자들의 비난을 받긴 했지만 젬퍼의 주장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실을 만들고 사용한 것이 인간의 특징적인 삶의 형식이 출현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가 된다는 의견에 나 역시 동의한다. 그런 형식이 의복, 그물, 텐트 같은 중요한 혁신을 가져왔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바버(Elizabeth Barber)는 이를 ‘끈 혁명(String Revolution)’이라고까지 부른다(1994: 45). 그럼에도 실이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로부터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실이 보존하기 힘든 유기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버가 시사하듯이, 실을 다루는 일이 여성의 일로 여겨진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대다수의 남성 선사학자들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젬퍼의 주장에 가장 강하게 반대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미술사학자 알로이즈 리글(Alois Riegl)이었다. 1893년에 쓴 《양식의 문제(Problems of Style)》에서 리글은 예술에서의 선이 실에서 비롯되었다는 아이디어를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실을 짜고 직물을 만드는 일을 하기 훨씬 전에도 선을 그렸다고 주장했다(Riegl 1992: 32, 각주9). 선은 직물이나 기술의 발달로 발명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술적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우리에게도 흥미로운데, 어느 쪽이 승자인지를 떠나 이것이 선의 다른 개념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젬퍼에게 선의 표본은 실이었다. 리글에게는 “모든 평면적인 소묘와 표면 장식의 기본 구성요소”(1992: 32)인 ‘흔적’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분류 체계의 두 번째 범주다.

(2) 흔적(trace)

우리가 말하는 흔적이란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단단한 표면에 남겨진 자국을 뜻한다. 대부분의 흔적은 더해졌거나 감소된 것 중에 하나다. 종이에 목탄으로, 혹은 칠판에 분필로 그려진 선은 더해진 흔적이다. 목탄이나 숯이라는 재료가 기본 물질 위에 덧붙여져 추가된 층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표면을 긁거나 자국을 내어 만든 선은 감소된 흔적인데, 이는 표면에서 재료를 제거하는 것으로 형성된다. 실도 그렇지만 흔적들도 비인간 세계에 풍부하다. 가장 흔하게는 동물들의 이동으로 생겨나며, 길이나 통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달팽이는 점액으로 더해진 흔적을 남기지만, 동물들은 보통 감소된 흔적을 남긴다. 목재나 나무껍질을 파들어가고, 부드러운 진흙이나 눈, 모래 표면에 발자국을 남긴다. 단단한 땅에는 무수한 발걸음으로 마모된 흔적을 남긴다. 이런 흔적들은 때로 바위에 화석으로 남아서 지질학자들로 하여금 오래 전에 멸종한 동물들의 움직임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 인간들도 자연 속에 감소된 흔적을 남긴다. 걷는 것으로, 혹은 말이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으로. 하지만 어떤 흔적들은 재료를 더하거나 감하지 않고 생겨나기도 한다. 유명한 작품 ‘도보로 만든 선(A line made by walking)’(1967)에서 리처드 롱(Richard Long)은 잔디 위로 선이 나타날 때까지 들판을 왔다 갔다 했다.(그림 2.2) 이런 행동으로 제거된 것은 거의 없고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았지만, 밟혀서 눌린 수많은 풀줄기에 빛이 반사되어 선이 드러난다.(Fuchs 1986: 43-7).

그림 2.2 / 리처드 롱, ‘도보로 만든 선’, 영국, 1967.

 

인간은 실을 만들고 사용하는 일에 뛰어난 만큼 손으로 흔적을 만드는 일에도 능력을 발휘해왔다. 손으로 하는 두 활동, 즉 실을 다루거나 흔적을 새기는 일을 일컬을 때 모두 ‘draw(당기다, 그리다)’라는 동사를 사용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어떤 도구나 재료의 도움 없이 손가락으로, 이를테면 모래 같은 곳에 감소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조각칼이나 끌과 같은 도구를 이용해서 나무, 뼈, 돌과 같은 더 단단한 재료에도 흔적을 남긴다. ‘쓰기(writing)’라는 단어는 원래 이런 종류의 흔적 만들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고대 영어에서 ‘writan’이라는 말은 “돌에 룬 문자를 새기다”라는 구체적인 의미를 지녔다(Howe 1992: 61). 표면 위로 뾰족한 끝을 끄는 것(drawing)으로 선을 새길(write)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기(drawing)와 쓰기(writing)의 관계는 오늘날 관습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다른 감각과 의미를 지닌 선들(5장 참조)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제스처(기구를 당기거나 끄는)와 그것으로 그려지는 선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더해진 흔적들은 펜이나 붓을 비롯해 표면에 도료를 바르는 다양한 도구들로 만들어질 수 있다. 모래그림의 경우에는 손가락 사이로 재료를 흘릴 수 있어서 아무런 도구도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분필과 목탄, 연필과 크레용은 도구가 도료의 공급원이기도 하다. 흔적의 재료와 그것을 더하는 도구가 하나인 것이다.
전체 2

  • 2021-12-23 18:19
    9e2ftk

  • 2022-01-16 01:17
    rlv9vw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