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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문 일본 답사 | 6월5일, 6일 도쿄 (신주쿠의 소세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6-06-15 12:18
조회
4747
 

규문 일본 답사  - 6월 5일 도쿄 첫째 날 - 작성자 혜원

신주쿠의 소세키


 

6월 5일

나츠메 자카(나츠메 길)까지

검색을 해보니, 소세키 공원이라고 명명된 나츠메 소세키 기념관은 와세다 대학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나는 막연히 나츠메 소세키 기념관은 와세다 대학 안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포스팅에는 작성자는 소세키의 거취를 찾기 위해 다카다노바바역을 시작으로 소세키 산방에 걸어가는 여행을 했다고 썼다. 뭘 어쩌겠는가, 별다른 가이드도 없는데. 나는 무작정 다카다노바바역을 구글지도에서 검색해 핀을 꽂고 소세키 공원이라고 명명된 장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와세다 대학을 통과하는 루트를 지도에 저장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무모한 계획이었다. 구글지도는 다카다노바바에서부터 소세키 공원까지 걸어서 45분가량이라고 했다. '그럼 역에서 나와서 소세키 공원을 목적지 삼아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면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카다노바바역을 우리 여행의 시작점으로 잡은 것이다.

다카다노바바역은 신주쿠역에에서 몇 정거장 떨어진 곳이었고, 다행이도 우리가 머무는 숙소에서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역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잘못된 선택이었다. 우리는 와세다 대학에 도착하기까지 별다른 수확 없이 걸었다. 물론 일본은 처음이고 거기다 도쿄의 첫 일정이기에 길을 걷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날씨는 더웠고 목적지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지도를 잘못 읽는 바람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왔던 장소로 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아도 그들은  소세키를 기념하는 길이 어디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나도 서울을 다니다 외국인이 한국 근대문인 기념관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친절하게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힘들게 와세다 대학에 도착해도 소세키의 이름을 딴 길이나 소세키를 기념할 동상, 기념비 하나 나오지 않았다. 소세키는 와세다에서 강의를 했지만, 와세다에는 소세키를 기념하는 흔적이 없는 듯 보였다.

와세다 대학은 일요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학생들과 산책 나온 주민들이 있는, 녹음이 우거진 넓은 캠퍼스였다. 창립자 동상 근처에는 종만 안 달았을 뿐이지 유럽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성당 건물 같은 게 있었다. 다른 건물들도 비슷한 연대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이었는데, 벽돌들이 어두운 색이었고, 나무가 우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곳이라는 감상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와세다에 대한 기억은 거기까지다. 왜냐하면 소세키 기념관을 찾아야 하는데 일행은 거의 지쳤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소세키 기념관은 오후 5시에 닫는데 와세다 대학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시 30분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와 락쿤쌤, 그리고 건화는 먼저 대학을 달려 나왔다. 그러다가 지도 하나를 마주한다. 와세다 대학 근방을 보여주는 지도에는 길 하나에 '나츠메 자카'라고 써 있었다. 나츠메 길이라니! 정말 있었구나! 분명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못 찾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지라 일본 한복판에서 본 소세키라는 이름이 정말 눈물 나게 반가웠다.

 


(나츠메 자카 발견!)


(나츠메 소세키 생가 기념비)

 
'나츠메 자카'의 시작점에는 '고쿠라야'라는 음식점이 있었고, 그 코너에 정말 작은 터를 빌려 이곳이 나츠메 소세키의 생가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코너를 돌아 소세키 길에 접어드는 곳에도 음식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소세키 생가 기념비는 음식점들 사이에 있었고 어디서 어떻게 찍어도 음식점들을 프레임 안에 넣지 않고는 사진으로 남길 수도 없었다. 그게 다였다. 나중에 설명을 들어보면, 그 비석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고 글은 제자가 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설명도 비석에는 없었다. 거기다 우리에게는 시간도 없었다. 나중에는 정말 전력질주를 하며 기념관을 향해 돌진했다. 한적하고 아담한 집들이 늘어선 아름다운 길이었지만 꽃 한 송이, 고양이 한 마리 다 지나치고, 일단 홈에 들어가야 하는 야구선수처럼 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드디어 정말 애매하기 짝이 없는 위치에 있는 - 사실 민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작은 소세키 산방에 도착했다.


 (소세키 공원)

 
(도초암)


 (친절한 관리인 아저씨)

 
소세키 산방

소세키 산방은 소세키가 1907년부터 눈 감을 때까지 살면서 <산시로>, <그후> 등 우리가 읽었던 책을 지은 장소다. 소세키 기념관은 무척 작았다. 창고 한 개만했다. 지붕 아래에는 소세키의 소설 제목을 따서 ‘도초암(道草庵)’이라고 써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이 기념관은 소세키 산방의 구석 부지에 지은 것으로, 기념관 건물 외 소세키가 살았던 집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념관은 하절기엔 오후 7시까지 연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 관리인 아저씨는 마구 달려 들어와서는 아직 기념관을 열고 있는지 묻는 외국인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어쨌든 한시름 놓은 우리는 건화에게 멀리 떨어져버린 일행을 데리고 오는 일을 맡겼다. 그리고 작은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둘러본다면 열 걸음도 안 되어 끝날만한 작은 공간이 소세키 기념관이었다. 관리인은 우리에게 DVD를 재생시켜주며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우리가 서울에서 왔으며 나츠메 소세키를 읽고 왔다고 대답하자 그는 무척 놀라워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도 소세키가 번역되어 있냐고 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한 번 더 확인하겠다는 생각에 물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념관에는 소세키의 연표가 걸려 있었고, 100년 전 출판된 소세키의 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관리인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최신판이라고 생각할 만큼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노년에 접어든 것 같은 관리인은 우리가 신기했는지 혹은 손바닥 만한 기념관을 떠나지 않고 서성거리는 우리가 신경 쓰였는지,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기념관 밖에 있는 큰 부지의 공사현장은 내년 9월에 완공될 소세키 기념관이라는 것, 도쿄대 근처에 있는 소세키가 살았던 집은 나가노로 옮겨져 지금은 기념비만 남겨져 있다는 것 등. 그리고 이곳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이 적은 방명록을 보여주었는데 역시 소세키 하면 고양이인지, 고양이를 그려 넣은 방명록이 한 가득이었다. 중간중간 한국인이 다녀간 흔적도 있었다. 관리인이 우리에게도 방명록을 써 달라고 해서 규문 이름으로 몇 줄 써 넣었다. 관리인에게 ‘나츠메 소세키’는 한글로 이렇게 쓰는 거라고 우쭐거리면서 알려주기까지 했다.

 
(방명록 : "규문에서 소세키 작품 읽고 왔습니다:)")


 (<고양이로소이다>의 주인공이 아닌 고양이의 묘)


 (소세키와 교감중인 현옥쌤)


(소세키와 함께!)

 
기념관 밖 마당에는 소세키 산방 사진에도 보였던 파초가 자라고 있었다.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서 심어놓은 것은 인상적인 안배였다. 그리고 소세키가 기르던 고양이 묘석이 있었다. 안내문에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 묘는 아니라고 굳이 써 놓은 걸 보면 어지간히 그 고양이의 묘라고 오해받았던 모양이다. 소세키 흉상 앞에서 우리의 단체사진까지 찍어준 관리인은 한국에서 여기까지 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왔다는 게 신기한지 이제는 더 이상 출간하지 않는다는 소세키 관련 책자도 몇 개 더 얹어주며 내년 9월에 완공되는 기념관을 꼭 방문해 달라고 말했다. 관리인의 말대로 작은 소세키 공원 옆에는 내년 9월 완공 예정인 커다란 소세키 기념관이 공사중에 있었다. (우리는 일단 ‘무리데스~’라고 했지만.) 그리고 조시가야 묘원를 방문한다는 말에 거기야말로 오후 5시까지만 운영한다는 정보를 알려주며 조시가야 묘원의 지도와 소세키 묘의 위치까지 표시해 주었다. 결국 그날 예정했던 조시가야 묘원은 다음날로 미루기로 했다.

 
소세키와 루쉰의 집

 
(소세키와 루쉰의 집터)


(고양이 만지기를 하청주는 수경언니)


(대략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소세키와 루쉰이 같은 주소지에 기거했다는 사실은 재밌는 사실이나 막상 그 지점에 도착해보니 뭘 느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허무했다. 동경대앞 역에 내려서 거기까지 가는 길이 오히려 더 재밌었다. 민가가 분명한 그 길은 그야말로 적막했고, 누구 하나 지나가지 않았으며 깨끗했다. (재원언니는 그런 생활감 없는 모습이 무서웠다고 한다.) 새삼 관광지와는 영 관계없는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라고는 일요일임에도 연습하러 나왔다가 편의점에서 뭔가를 사먹는 야구소년들이 전부였는데, 그들도 무슨 일본만화를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어딘가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소세키와 루쉰이 살았던 집터는 그런 조용하고 깨끗한 길목에 느닷없이 위치하고 있었다. 소세키 산방은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소세키의 흉상이 여기가 나츠메 소세키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증거 했지만 거기는 그나마도 없었다.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소세키 상 대신 고양이상 한 마리가 담벼락을 걷고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 당시에도 이 주변이 이렇게 조용하고 깨끗한 길목이었을까? 과연 어떤 모습의 집이었을까. 무엇 하나 알아낼만한 것이 없었다. 1907년 전까지 소세키는 이곳에 살면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지었다. 그리고 시기는 다르지만 루쉰 역시 이곳에 있었다.

 
산시로 연못

 
(어둠에 잠긴 회랑)

 

(영화 '곡성'feel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미네코의 실루엣들)

 
해질녘의 도쿄대는 와세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와세다의 건물이 교회같다면 도쿄대는 중세 수도원 같았다. 도쿄대 역시 와세다처럼 녹음이 우거졌는데 전혀 푸릇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어둡고 음산하다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길고 어두운 회랑이 늘어선 모습이며, 십자가와 비슷한 부조가 붙어있는 건물들. 밝을 때 왔으면 산시로가 봤다던 붉은 색 벽돌의 고딕풍 건물이라든가 중세의 성과 같은 모습이 더 잘 보였을까? 내가 도쿄대에 와서 처음 느낀 것은 어둡고 그림자가 져 있다는 것이었다. 해가 아예 진 것도 아닌데, 높이 솟은 건물이나 나무는 빛을 다 가려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회랑들도 하나같이 불이 꺼져 있거나 혹은 불이 켜져 있더라도 주황빛의 전등이 빛났다. 그리고 산시로 연못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흔한 조명 하나 없었고 마치 자연 계곡을 들어갈 때처럼 돌계단을 조심조심 밟아 내려가야 하는 곳이었다. <산시로>에 의하면 산시로는 해가 지는 시간, 우리처럼 도쿄에서의 급박한 속도를 경험하고 연못으로 향한다. 그리고 미네코를 본다.

연못은 놀랍게도 그 흔한 조명 하나 없었다. 들어오는 길목에도 딱히 입구를 막아놓을 만한 수단이 없던데,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 헛디디면 딱 빠져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단 컸다. 대학에 있는 연못이 고만고만하리라는 생각을 했는데 입구에서부터 꽤 걸어야 했고 그 길목에도 수풀이 우거져서 어둠에 잠긴 연못이 보였다. 그리고 끝까지 걸어가자 느닷없이 밝아지면서 둥근 연못의 형상이 보였다. 연못 중앙에는 일부러 심어놓은 것인지 마치 섬과 같은 수풀이 자라고 있었고, 연못을 빙 둘러 마치 처마처럼 나무며 풀이 자라고 있는 와중에 중앙에 아직 지기 전인 햇빛이 들이쳤다.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산시로가 미네코의 실루엣을 본 시간대를 맞닥뜨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때처럼 인공적인 조명도 없고, 있을법한 울타리도 없었다. 그리고 연못 중앙에 들이닥치는 희미한 빛으로 식별한 다른 사람들은 얼굴보다는 그림자가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때 찍은 사진도 어쩔 수 없이 어둡고 실루에만 건진 사진이 많았는데, 얼굴이 나오지 않은 건 아쉬웠지만 그 시간대의 연못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꽤 맞아떨어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6월 6일

조시가야 묘원

아무래도 아침부터 모두를 깨워 무덤을 데려간다는 것은 이상한 일정이라는 생각을 했나보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을 추려서 조시가야 묘원을 방문한다는 계획을 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마음>을 읽었고 소세키를 보려고 부러 도쿄에 온 만큼, 교토 가는 일정을 늦추더라도 정식으로 일정을 잡아 조시가야 묘원을 가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조시가야 묘원에 가기로 한 사람은 나와 현옥쌤, 수경언니, 은남쌤, 라쿤쌤이 갔다. 조시가야 묘원은 메지로 역에 내려서 또 민가쪽으로 걸어가야 했는데 출근시간이기도 했고 메지로 역에 학교가 3개나 모여 있어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일본 초등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란도셀을 매고 특이하게도 모자를 쓰고 등교했다. 우리나라의 유치원 모자를 연상시키는 그 모자를 초등학생들이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메지로역 바로 앞에 매우 넓은 부지의 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의 담장은 길 하나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학교의 이름은 다름아닌 가쿠슈인, 즉 학습원이었다. 소세키가 나의 개인주의를 강연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일본 귀족이나 황족이 다니는 학교라고 한다. 겉으로만 봐도 엄청난 규모의 학교 문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의 교복은 하나같이 정갈하고 모범적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문을 찍고 그 밖에 있는 지도를 사진으로 찍자 경비원이 걸어와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했다. 소세키가 생각나서 찍은 것인데 돌이켜보면 남의 학교나 등굣길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수상한 사람들로 보일만도 했다.

 
(소세키가 나의 개인주의를 강연한 학습원)


(조시가야 묘원)

 
조시가야 묘원은 노면 전차가 지나는 철로를 건너 또 다시 깨끗하고 조용한 민가의 골목길을 지나면 느닷없이 펼쳐져 있었다. 약 9000명이 묻혀 있다는 그 묘지는 집들 사이에 담장 하나 없이 거기 있었다. 묘비들은 줄을 맞춰 세워져 있었고 그 줄들은 또 구역을 나누어 정렬해 있었다. 아침 시간임에도 주민들이 산책 겸 묘비 사이를 둘러보는 것은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음>의 선생은 이런 곳을 매주 방문했던 것이다. 소설을 보고 연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묘비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여기서 '나'가 선생님 한번 불렀다가는 잘 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이 놀라서 말문이 막힐만 했다는 생각도.

묘비의 안내판에는 주요 인물들이 묻힌 장소를 표시한 것이 보였는데 나츠메 소세키가 제일 첫번째였다. 그 외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관리인이 무사 집안 사람들이 많이 묻힌 곳이라고 알려 주었는데 지금 와서는 그 말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심이 든다. 어쨌든 잘 정도된 비석들 사이에서 가장 크고 울타리도 두른 나츠메 소세키의 묘를 찾아냈다. 일본의 특징인지 아니면 참배객이 많은 것인지 깨끗하고 시들지 않은 꽃이 있었다. 도쿄 민가 한복판에 이렇게 소세키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산방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묻혔다는 사실도 재밌었다. 고향이나 선산에 묻힌다면 도쿄까지 왔더라도 찾아오지 못했으리라.(소세키의 산소를 찾는 등산이라니!) 아마 <마음>의 K도 선생이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이렇게 묻혀 있어서 자꾸 찾아오게 만들고 생각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마루노우치


(마루노우치 역사)

산시로는 도쿄역을 나와 보이는 마루노우치의 광경에 놀란다. 우리도 북쪽 출구로 나와서 마루노우치에 놀랐다. 서울역 옛 역사를 연상시키는 둥근 돔 형의 천장이 보이고 밖으로 나오면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현대적인 빌딩 사이에서 혼자 중세 교회나 성과 같은 모습은 지금에 와서 봐도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산시로가 봤던 도쿄의 모습처럼 마루노우치 역사는 계속해서 보존되는 한편 보수공사중이었다. 도쿄는 그때나 지금이나 늘 공사중이다. 아마 이 주변은 계속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마루젠 서점의 옛날과 현재)

 
건너편에는 (산시로는 보지 못했겠지만) 마루젠 빌딩이 보였다. 마루젠 서점은 1층부터 4층까지 있었다. 4층이 문구류 매장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3층짜리 서점이다. 소세키가 살던 메이지 2년(1859년)부터 있었던 마루젠 서점에서 인상적인 것은 직원들이 엄청 많다는 것이다. 책을 찾아주는 사람도 많았고 거기다 마루젠이라고 쓰여진 커버로 구입한 책을 일일이 포장해 주는 계산대 직원도 많았다. 서점을 둘러보다가 이젠 너무 많이 본 한쪽 손에 곡를 기댄 소세키 얼굴도 볼 수 있었는데 웃기게도 일본 한자능력검정시험 광고 포스터였다. 소세키가 그 삐딱한 얼굴로 "I'm a cat"을 일본어로 어떻게 쓰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I'm a cat...뭔가 틀렸어)


(손바닥만한 소세키 책들)


(마루젠 서점에서 "질러버렸다!")

<그후>가 그나마 히라가나로 입력할 수 있는 제목이다보니 더듬더듬 검색해서 찾은 문학 코너에도 소세키의 책은 누워 있는 책들 중 하나였다. 나름 올해가 소세키 사후 100주년에 탄생 150주년이라고 한다. '지금이야말로 읽어야 할 명작들'이라고 예쁘고 작은 소세키 책이 누워 있는데, 가격도 부담없어서 <산시로>와 <마음>을 들고 계산대로 갔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 계속해서 찾아다닌 것이 이 책들의 흔적이었다. <산시로> 표지의 까맣고 시무룩한 산시로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말이다.

마무리

도쿄 일정은 마루젠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과연 '자유석'이 '자리'가 있는 좌석인지 마음졸이며 탄 신칸센은 빠르게 도쿄와 멀어졌다. (도쿄는 정말 떠날 때까지 종잡을 수도 긴장을 늦출 수도 없었다.) 3박 4일 중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물론 교토이지만 이 여행의 본령이 소세키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면 중심은 역시 도쿄에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자꾸 헤매기만 하고 관광지와는 동떨어진, 비석 하나, 연못 기념관 하나 보기 위해 전혀 낯선 공간을 헤집고 다닌 것은 아무래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길을 알려주는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것과는 달랐다. 그런 의미에서 교토는 정말 좋았다. '긴가쿠지'라는 이름만 대면 아무리 멀리 떨어진 버스 정류장이더라도 누구나 뭘 타면 되는지 어느 방향에서 타면 되는지 죄다 알려주었다. 하지만 도쿄의 여행은, 그 잘 정비되고 거대한 도시에서의 여행은 무슨 어려운 책을 읽는 것처럼 더듬거리기만 했다. 거기다 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연령대도 관심사도 다 다른 인물군이 소세키 하나 같이 읽었다고 타국 한복판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이상하고 낯선 일이었다. 가끔 우리를 삽화로 생각해 보았는데 이 집단 정말 수상하고 웃긴 모습이었다. 소세키 산방을 찾아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무슨 탐정 소설 시작 같았고 학습원 사진을 찍다가 경비원의 눈총을 받는 건 내가 첩보원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거기다 무슨 미션이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막판에는 히비야 공원과 마루젠을 나누어서 방문하기도 하는 등, 목적이 명확한 한편 경로가 희미한 여정은 분명 피곤하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워낙 준비가 시작부터 모호했기에 덩달이 많은 분들이 같이 헤맸다. 거기다 소세키가 목적인 여행이었는데 그 답사가 잘 이루어졌는지는 자신이 없다. (락쿤쌤은 보물찾기 하는 느낌이라고 하셨는데, 비슷한 여행이었다.) 이 점은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하다. 그런데 다음에 이런 여행을 계획한다면 또 비슷하게 헤매지 않을까? 다만 그때는 내가 뭘 하러 왔는지 확실하게 인식하고 다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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