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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후기 및 6.25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06-20 13:26
조회
3667
"금욕적 이상이 인간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는 인간 의지의 근본적인 사실, 즉 그 의지가 공허하다는 공포horror vacui가 표현되어 있다. 인간 의지에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의지는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하려고 한다.” (『도덕의 계보학』, 연암서가, 134p)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의지하지 않기 보다는 차라리 무無를 의지합니다.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신체적 쾌락을 폄하하기 때문에 언뜻 욕망 자체의 결여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신체적 쾌락을 죄악시하고 금지하는 것 자체가 금욕주의의 은밀한 욕망이 발현되는 방식인 것이지요.

이들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보면, 거기엔 현실의 무상함, 고통의 무목적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의 목적 없음과 무상함,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과 쇠락의 무의미함을 견디기보다는 차라리 현실 전체를 부정하고 현실 바깥의 이상을 좇고자 욕망하는 것입니다. 금욕주의는 “다르게 되고 싶고, 다른 곳에 있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이때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현실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이상임과 동시에 무인 것이지요. 견디고 싶지 않은 삶의 수많은 모순들을 현실 바깥에 대한 욕망이라는 커다란 모순으로 대체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루쉰은 이러한 삶의 목적 없음, 무상함을 젊은 나이에 뼈저리게 경험합니다. 청년 루쉰은 의학을 배우고 나름대로 혁명의 꿈을 가지지만, ‘신생’이 망하고, 혁명은 간판교체로 끝나고, 민중들은 여전히 노예적 관성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루쉰은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삶의 무상함을 강하게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자각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루쉰이 싸운 다른 지식인들은 여전히 무너진 이상을 대체할 다른 이상을 생산하고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어떤 이들은 혁명에, 또 다른 이들은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겠지요.

이상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루쉰이 죽고 난 뒤 루쉰도 하나의 이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위화는 자기 세대의 교과서에는 마오의 말 아니면 루쉰의 말 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느 날 친구와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쉽게 결판이 나지 않자, ‘루쉰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는 말로 단박에 끝장을 내버렸다고 합니다.

루쉰이 이러한 과정 속에서 느꼈을 무상함, 또한 그러한 무상함에 대한 자각을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고립감, 이런 것들이 그가 말하는 ‘적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쉰은 이런 적막 가운데서 삶의 무상함을 직시한 채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쉰은 민중들을 계몽의 대상으로도 혁명의 주체로도 간주하지 않습니다.

『루쉰전』에는 루쉰이 그의 할머니를 장례 치르는 대목이 나오는데,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은 루쉰에게 기존의 장례절차를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루쉰은 “뜻대로 하십시오!”하고 짧게 대답합니다. 이것은 책의 저자에 의해 재구성된 이야기지만, 민중에 대한 루쉰에 태도가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결국 그들 뜻대로 하게 두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구습을 버리기를 강요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요. 오히려 루쉰은 자신의 할머니의 삶과 자기 삶이 닮아 있음을 느낍니다. 할머니의 죽음도 ‘별종’인 루쉰 자신도 그저 흥밋거리로 소비될 뿐입니다.

소세키의 지식인의 경우 다른 계급에 대한 관심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소세키, 혹은 소세키의 지식인들의 문제의식은 어떤 어긋남들 이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근대적 속도와 자기 내면의 속도의, 부모세대와 자신의 어긋남들. 이에 비해 루쉰, 혹은 루쉰의 지식인들은 다른 계급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루쉰에게 낮은 계급에 속한 민중들은 동정의 대상도, 숭배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식인이 놓인 현실과 민중이 놓인 현실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감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 지식인들이 느낀 혁명 앞에서의 무기력함과 샹린댁의 운명 앞에서의 무기력함은 닮은꼴입니다. 아Q의 정신승리와 계속해서 이상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의 모습은 닮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쉰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 같은 이상에 결코 동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지식인에 의한  민중의 계몽역시 허위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지식인이든 민중이든 결국 자기 삶의 약자적인 굴레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그것이 혁명의 자리일 것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며>는 사랑 또한, 아니 사랑이야말로 어떤 ‘상’像에 대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쥐안성과 쯔쥔은 동거를 시작하지만 1년도 안되어 그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투영한 이미지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 서로가 변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강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밥 먹는 일이 견딜 수 없이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겠지요. 쥐안성과 쯔쥔처럼 새로운 삶을 창조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들의 시선과의 싸움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과의 싸움이 아닐까요?

“나는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나는 진실을 마음의 상처 속에 깊이 묻어 두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망각과 거짓말을 나의 길잡이로 삼고서…….” (371)

쯔쥔이 죽고 쥐안성은 진실을 묻어 두고 망각과 거짓말을 길잡이 삼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쥐안성이 기억과 진실이 아니라 망각과 거짓말을 말하는 것은, 기억이란 지금 여기를 벗어난 이상을 만들고 무엇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망각은 하나의 적극적인 행위로써 이상을 무너뜨립니다. 또 거짓말은 그 순간 생성되고 소멸하기에 어디에도 붙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이상을 생산하는 방식이 아닌 채로, 삶의 무상함을 직시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요?

이번 세미나를 하고 후기를 쓰려고 정리하면서, 제가 그동안 루쉰한테 엄청나게 무거운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막’, ‘고독’, ‘전사’ 같은 단어의 함정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루쉰을 뭔가 아주 심각하고 거대한 싸움을 하는 고독한 전사로만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루쉰을 이해하는 것은 루쉰을 또 한 명의 ‘금욕주의적 사상가’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체는 “‘모순’이야말로 사람을 생존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쇼펜하우어도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했다”고도 말했습니다. 루쉰의 경우에도 자신이 겪고 있는 모순들과 고통들, 그리고 계속해서 이상을 만들어내는 그의 적들이 항상 그를 불행하게 했으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루쉰은 자신의 적들을 미워하고 민중들의 노예적인 모습에 분노하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더한 심각함으로, 무거움으로 맞서는 방식으로 그것들에 잠식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강자는 삶의 모순들과 고통들을 직시하고, 이상으로 그것들을 가리지 않은 채로 그것들을 생존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루쉰이 자신의 적들을 위해 글을 쓴다고 했던 말은 글자 그대로를 의미했을 것 같습니다.

다음 주 공지 하겠습니다.

읽어오셔야 할 책은 <들풀>과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 .

공통과제 + 암송 해 오시면 되고, 발제는 <들풀> 태욱쌤, 다케우치 요시미는 제가 합니다.

간식은 옥상샘+혜원


그리고 이번 주에는 끝나고 회식 겸 민호 환송식 전야제? 식전행사? 에피타이저?가 있을 예정이니 다들 스케쥴 비워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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