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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문 일본 답사 | 6월 6일 센다이편 2 (청년 루쉰의 흔적을 더듬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6-06-21 17:27
조회
1390
6월 7일 센다이여행기(2) - 작성자 수영

청년 루쉰의 흔적을 더듬다


1. 센다이에 다녀오다

센다이! 아마 루쉰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는 센다이라는 동네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지난 여행기에서도 말했듯이 센다이는 일본 북부 도호쿠지방 미야기 현에 위치해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는 최대 도시라고 한다. 센다이를 안다면 아마도 ‘지진’ 등과 관련하여서일 것이다.

하지만 루쉰을 읽은 이들에게는 다르다. 루쉰은 1902년 청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을 떠난다. 도쿄 고분학원에서 2년간 공부하고 졸업 후 센다이의 의학 전문학교(의전)에 입학한다. 센다이 의전은 지금의 도호쿠 대학의 전신. 이곳에서 그는 이른바 ‘환등기 사건’을 겪는다. 세균학 수업 중 러일 전쟁에 관련한 슬라이드를 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중국인 한명이 러시아의 정탐 노릇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하는 장면이 있었다. 또 그 모습을 구경하는 무리들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환등기 사건’이라 불리는 이 일화는 루쉰이 의학을 그만두고 문학으로 전향하는 지점과 관련하여 결정적 장면처럼 언급된다. 이러하니 루쉰 독자들에게 센다이는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루쉰의 ‘회심의 장소’가 아닌가.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루쉰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장소는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센다이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딱히 꼭 가보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지 않았다. 일단 그곳에서 루쉰이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문인(文人)’으로서 루쉰을 생각한다면 ‘그런 루쉰’은 센다이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슨 인연인지 센다이에 다녀왔다. 뒤늦게 ‘공부를 좀 더 하고 갈 것을…’하면서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잘 다녀왔다. 채운샘과 함께 센다이에서 루쉰 흔적들을 좇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센다이에서 청년 루쉰이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새로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얕고 막연한 궁금증들이지만 이것들이 당분간 루쉰을 좇게 하는 힘이 되면 좋을 것 같다.

2. 도호쿠 대학교

(도호쿠 대학 입구)


이튿날 센다이 팀의 주 행선지는 도호쿠 대학 가타히라 캠퍼스였다. 도호쿠 대학은 총 5개의 캠퍼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에서는 세 번째로 설립된 제국대학이라고 한다. 가타하라 캠퍼스에는 사실 의학부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루쉰이 공부했던 실제 교실이 보존되어 있고, 루쉰 관련 자료가 보관된 아카이브가 있다. 루쉰상 역시 있다. 루쉰이 다녔던 의학전문학교 자리가 바로 이 가타히라 거리의 캠퍼스에 속해있다.

숙소에서 도호쿠 대학까지 이동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전날 꽤 오랜 시간 동안 구글지도를 검색하며 이동경로를 숙지했지만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 신호등을 몇 번 건너니 어느새 대학 안에 들어와 있었다.

대학의 첫 인상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나무와 풀들은 무성했다. 이곳의 관리 스타일인가. 우리나라였다면 진작에 베어졌을 풀들, 나무들이 덥수룩했다. “관리 안하는 거 아니야~”하는 말을 했지만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일본 북쪽에 위치한 산림이 우거진 도시’, 루쉰 평전에서 이 말을 읽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전에 갔던 캐나다처럼 압도감을 주는 나무들이 가득한 것은 아니지만 도쿄나 나중에 간 교토에서는 보기 힘든 울창함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싱그럽고 파이팅 가득한 느낌을 주는 캠퍼스는 아니었다. 아침 시간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대학은 확실히 조용했다. ‘삐까번쩍’하고 높이 솟은 건물들은 잘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꽤 많은 시간을 지나온 건물들이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채 문이 열리지 않은 건물들 사이를 한가롭게 걸었다.

루쉰이 도쿄 고분학원 졸업 후 센다이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한 것은 당시 중국 유학생들의 통상 진로와는 다른 것이었다. 의학을 배운다고 하여도 도쿄 근교에 위치한 치바시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보통. 센다이 쪽에서도 이 이례적인 입학에 반응을 보였다. 그는 무시험으로 학교에 입학했다. 지역 신문들은 꽤 여러 번 루쉰의 입학과 관련한 기사를 냈다. 루쉰은 어째서 홀로 멀리 센다이까지 온 것일까. 평전 등을 읽어보면 당시 루쉰에게는 의학에 대한 꿈 못지않게 중국 유학생들 과 거리를 두는 일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생각 때문인가. 도호쿠 대학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어딘가 “숨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 루쉰상


 

대학에서 처음 찾은 것은 루쉰 흉상이다. 전날 인터넷 검색에서 정확히 그 위치를 잡기가 힘들어 불안했었는데 기우였다. 대학에는 루쉰 관련물들이 있는 자리에 이를 수 있도록 표지판을 잘 설치해 놓았다. 여행을 하다 보니 이런 것들이 참 감사하다. 루쉰상을 찾는 이들이 적어도 지금은 많지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친절한 표지판은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루쉰 흉상은 전날에 이어 두 번째로 본다. 전날 센다이 시립박물관에서 본 것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크기는 조금 더 작았고 표정도 달랐다. 선생님과 조용하게 사진을 찍고 동상을 쳐다보고 만져보고 했다. 동상은 당연히 말이 없었고 우리 역시 동상 앞에서 무엇인가를 더 알아내고 조사해야 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꽤 오래 그 근처에 있었다. 루쉰상 얼굴에 떨어져 있는 나무껍질 비슷한 것들을 털어주기도 했는데, 지나고 나서 매우 뿌듯했다. 탈탈 다 털어주지 못한 것만이 아쉽다. “여기 다니는 학생들이 루쉰을 알까? 우리도 대학에 있는 동상 누군지 모르잖아?”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이 대학 학생들은 알지 못해도 먼 곳에서 이 동상 하나를 보고자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 계단교실


(계단 교실이 있는 건물)


(옛 계단교실 사진)

도호쿠 대학에 있는 루쉰 관련 자료들 중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계단 교실이었다. 루쉰이 실제 공부했던 교실인데 루쉰이 입학한 해인 1904년에 건설 된 것이다. 물리학, 화학 등의 기초 과목 교실로 사용되었고, 세균학 등에서  환등사진을 상영하는 환등기도 놓여져 있다고 한다. 계속 보수를 했고 그 위치도 지금보다 약 30미터 정도 동쪽이었다. 그럼에도 예전 모습이 나름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제로 볼 수는 없었다. 보존 문제인지 화요일에서 목요일, 그것도 1시에서 4시 사이에만 공개되었다.

우리는 교실이 있는 건물 바깥만 보았다. 크지 않은 흰색 건물이었는데 낡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왠지 더욱 그 안이 궁금해졌다. 사진으로 본 교실은 마치 극장이 그러하듯이 계단형이기는 했으나 그 경사가 크지는 않아 보였다. 교회 예배당의 테이블처럼 길게 연결되어 의자와 짝을 이루는 책상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루쉰은 그 어딘가 앉아 해부학 노트를 그리고, 환등기도 보았을 것이다. 그는 대부분 2~3번째 줄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 루쉰 기념관 (도호쿠 대학 사료관)

도호쿠 대학 사료관 2층에는 루쉰 기념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기념관이라기보다는 아카이브라는 명칭이 더 걸맞을 것이다. 입학서, 자퇴서, 성적표, 각종 사진, 노트 등 센다이 시절의 루쉰과 관련된 자료들이 적지 않게 보관되어 있다.



기념관 초입에는 청년 시절 루쉰 사진이 인쇄된 배너가 걸려 있었다.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쓰고 있는 모습인데 눈매가 깊다. 그래도 역시 앳된 모습이다. 지금이야 내게 루쉰은 큰 선생님이지만 센다이 시절의 그는 분명 어리고 젊다. 마냥 무겁게 다가왔던 루쉰의 모습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낸 것일까. 전시물들이 답해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역시 궁금하다.

기념관 안에는 루쉰 사진이 몇 장 있는데 처음에 본 사진과 대비되는 것이 있다. 그 사진 속에서 루쉰은 콧수염을 달고 있다. 나는 여태 그것이 실제 콧수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료를 찾다 보니 하숙집 주인이 각 사람의 10년 후를 상상하고 그려 넣은 것이었다. 어쩐지….


(루쉰을 찾아보셔요!)

채운샘과는 짤막한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기념물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샘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같이 있지만 또 전혀 다른 여행을 하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물들은 시간 순서를 고려하여 배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초입에는 입학서, 성적표 등이 있었다. 환등기 슬라이드, 루쉰의 자필 노트 등을 지나면 루쉰의 퇴학 당시 송별회 사진, 후지노 선생이 루쉰에게 주었던 사진 등이 있다.


(루쉰 입학서)


(루쉰 성적표 - 루쉰의 성적을 찾아보세요!)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는 루쉰이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센다이 시절의 루쉰은 내게 꽤나 고독한 이미지로 있었나보다. 그도 그럴 것이 센다이에서 그는 중국 유학생들을 떠나 일본학생들 사이에 자기를 홀로 둔 것이다. 그 안에서도 잘못된 소문으로 즐겁지 않은 일을 겪기도 했다. 이런 것들만을 읽어서 그러한가. 센다이에서 루쉰은 완전히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루쉰과 함께했던 이들이 있었다. 기념관에는 루쉰이 하숙집 학생들과 찍은 기념 사진 - 물론 퇴학 기념 사진이다 - 등이 남겨져 있었다.

루쉰의 센다이 유학 시절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은 후지노 선생님이다. “후지노 겐쿠로”. <후지노 선생>에는 그(후지노 선생)가 자기소개를 하자 몇몇 학생들이 그의 옷차림을 비웃으며 킥킥거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겨울이면 낡은 외투를 걸치고 다니는데 그 행색이 심히 초라하다. 그래서 언젠가는 기차 차장으로부터 도적이 아닌가 의심받기도 하였다…’. 학생들로부터 이렇게 괄시당했지만 루쉰에게 그는 엄청나게 크고 감사한 존재였다. 아시다시피 후지노 선생은 루쉰의 필기 노트를 직접 첨삭해준다. <후지노 선생>을 읽어보면 루쉰은 분명 그 전에 그가 사람들에게 받았던 것과는 다른 마음을 후지노 선생에게서 받았던 것 같다. 루쉰 입학 당시 후지노 선생은 고작 30세였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어째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기 쉬울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못생긴 것은 확실하고, 어딘가 작고 볼품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생김 덕에 루쉰이 전하는 후지노 선생의 모습이 더 빛나게 다가온다. 또 그런 후지노 선생을 알아볼 줄 아는 루쉰 역시 멋지다.


(후지노 선생님)

전시물 중 우리를 가장 즐겁게 한 것은 루쉰 성적표였다. 루쉰 선생님, 성적이 그리 좋지 않으셨다! 이 사실 하나로 한참 농을 주고 받았다. “루쉰은 의학이 아니었던 것이야…”하면서 말이다. 루쉰은 의학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을까. 루쉰 시간표에는 독일어 시간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선 채운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여기서 독일어 배워서 니체 읽고 문학 작품들 읽고 했겠지….” 루쉰이 결국 의학을 그만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사료관의 많은 물건들은 의학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채운샘은 “루쉰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하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다. 일본 저 북쪽의 외딴 곳으로 유학을 온 까닭은 단순히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의학에 뜻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를 센다이에 오게 한 것은 역시 그렇게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다.

3. 루쉰 하숙집을 찾아서

‘도호쿠 대학에서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한 장의 지도가 있었으니!’하면 과장이다. 하지만 한 구석에 그려진 루쉰 당시의 대학 일대 지도는 우리에게 ‘루쉰이 살던 곳에 가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편평정(片平丁)’이라 하여 루쉰이 살던 곳이 센다이에 보존되어 있다는 정보를 찾았었다. 하지만 편평은 길 이름이었고 구글 검색으로는 루쉰이 살았던 하숙집이 정확히 어디이고 어떻게 보존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민센터에서 물어보자는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나로서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옛 지도가 우리 마음을 움직였다. “가보자!” 대강의 방향만 잡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가자!)

대학 정문을 나서면 일본의 지방도시에 어울린다 싶게 정갈한 도로가 나 있다. 지도에 표시된 방향을 가늠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여행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사소한 행운이 이번에도 있었다. 가는 길에 일종의 마을 문화센터를 지나게 된 것이다. 기대하지 않고 물었건만 그곳에서 일하는 한 분이 루쉰의 하숙집이 있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루쉰이 살았던 하숙집은 다행히 대로변에 있었고 길을 물었던 문화센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칫 지나칠 뻔 했다. 그럴만한 것이 대단한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화려한 담장으로 기념물 표시를 해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채운샘이 작은 비석명패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루쉰이 하숙했던 집. 도로변에 무심하게 있다.)


(멋지다!)


이 집은 낡아가고 있고 사라질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찾는 이도 없어 보였다. 분명 방치된 것은 아니었지만 ‘날 찾아달라’고 호소하는 모양새는 읽기 어려웠다. 보수를 계속해온 것 같았지만 모양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거미줄들이 사방에 있었고 미생물들이 신나게 번식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어딘가 정갈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집은 2층이었고 나무로 덧대어져 있었다. 또, 주변 나무들 역시 집과 큰 이물감 없이 어우러져 있었다. <마른 잎>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마, 곧 지고 말, 이 벌레 먹고 알록달록한 잎의 색깔을, 잠시라도 보존해두고 싶어서였을 거다” 나도 왠지 이 집을 마음에 좀 더 넣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도쿄, 마루젠

시간이 촉박해 택시를 탔다. 일본에 와서 택시도 타 본 것이 되었다. 채운샘이 연신 칭찬하셨듯이 택시 안은 정말 깔끔했다. 좌석커버는 매일 세탁을 하는 듯 반짝였다. 거스름돈들 역시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아저씨의 옷 매무새 역시 단정했다. 채운샘 말에 따르면 일본 택시 운전은 주로 나이 꽤나 지긋한 아저씨들이 하신다. 우리가 탄 택시의 기사님 역시 손주 몇 명은 있을 것 같은 분이셨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센다이 역으로 이동했다.



다시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이동했다. 그러고보면 일본에서 우리의 이동 경로는 루쉰의 그것과 똑 같다. 도쿄에서 센다이로 그리고 다시 도쿄로. 루쉰은 센다이의전을 중퇴하고 도쿄로 돌아온다. 그리고 《신생》 출간을 준비하는 등 문예활동에 힘쓴다. 루쉰이 처음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센다이를 거쳐 다시 도쿄로 돌아갔을 때 그는 분명 같은 루쉰이 아니다. 그럼에도 도쿄는 그에게 일종의 공부의 공간은 아니었을까. 도쿄의 서점에서 각종 책들을 섭렵했을 루쉰을 생각하며 우리 역시 서점으로 이동한다. 마루젠 서점이다.

마루젠 서점에 대한 정보는 혜원의 여행기에서도 읽었으리라. 서점은 4층으로 작지 않은 규모다. 그런데 규모도 규모지만 읽을 수 있는 책들 하나 없는 이 서점은 내게 정말로 커다란 것으로 다가왔다. 또, 그 때만큼은 ‘읽고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던 것도 같다. 도쿄에서 루쉰은 각종 외국 소설 등을 탐독했다고 한다. 소설 뿐이었을까. 유학 시절이 평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배움에 대한 그의 열망을 충족시켜 주는 부분은 분명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책들, 지식들을 섭렵하며 그는 번역에 대해서도 결심하게 된 것 아닐까. 우리는 마루젠 서점을 나와 빌딩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제 교토로 갈 시간이다. 교토에는 다른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다. 센다이에 머무르는 동안 도쿄와 교토를 누볐을 이들이다. 나중에 합류하고 보니 그들의 여행은 내 그것과는 또 완전히 다른 느낌이어서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그 시간 우리는 낯선 여행을 하고 있던 이들을 만나러 가고 있었던 것도 같다. 남은 간식들을 먹으며 채운샘과 나는 신나게 교토로 달렸다. 물론 실제 달린 것은 신칸센이다.

4. 마무리

루쉰이 센다이 대학에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만난 센다이 대학 아니 도호쿠 대학은 계절로 따지자면 가을, 겨울의 느낌이었다. ‘일본 북쪽에 위치한 산림이 우거진 도시’, 이 말처럼 대학 곳곳에 크고 작은 나무들, 풀들이 무성했지만 이들이 주는 것은 봄이나 여름의 싱그러움은 아니었다. 흥청망청한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열의 가득한 학문 탐구의 장으로 다가오는 것도 아니었다. ‘이 대학도 사라지겠구나…’ 괜히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겠느냐마는 분명 이제 막 시작되는 것이 주는 생기는 그런 일들을 잊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질 것들을 만난다는 것이 이번 센다이 여행이 주는 느낌이기도 했다. 우리가 찾은 것은 그야말로 기념물들이다. 동상, 박물관, 보존된 건물, 관련 자료들. 이 모든 것들이 루쉰을 기념했고 센다이를 기념했지만 그것들은 어째 ‘잊혀지고 사라질 것’이라는 느낌을 안겨주기도 했다. 아마 중국에서 루쉰의 행적을 좇았으면 또 달랐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센다이에서는 달랐다. 찾는 이는 드물었고, 말했듯이 어떤 기념관도 ‘그래도 나를 잊지 말아달라’ 호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장소, 갖가지 물건들이 후지게 다가왔던 것은 아니었다. 정갈했고 나름의 멋이 있었다. 찾는 이 드물어 보이는 탓에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루쉰을 읽고 있는 덕에 이 물건들이 그래도 살아있는 무언가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루쉰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찾아왔던 갖가지 상상, 읽은 것들에 관한 기억, 새로 생긴 질문들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 다녀온 답사 - 공부를 하고 온 여행이었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정말로 감사하게 잘 갔다 왔다. 여행을 마치고 또 후기를 쓰면서 든 의문은 이것이다. '적극적으로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갈 수록 마냥 편안하게 따라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처리에 대한 미숙함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분명 더 풍성하게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이 궁금증을 품고 또 세미나를 할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떠나보고 싶다. 이상, 여행기를 마친다.
전체 3

  • 2016-08-09 02:08
    Olá!Estava (mais uma vez) vendo as novidades do site e achei essa promoção sunseiptrreesante!Gostaria de verdade de ganhar esse livro, acho que me proporcionará uma leitura MUITO prazerosa.Obrigada pela oportunidade

  • 2016-06-21 17:38
    수...수영아... 어째서 소제목에 시작과 끝이 들어가는 거냐ㅜ 시간이 필요했던 청년 루쉰 이야기를 좀 더 듣고파~ 0.0

  • 2016-06-22 14:07
    후지노 샘의 첨삭흔적, 루쉰의 손글씨, 요런 건 사진으로만 봐도 기분이 이상하더라. 근데 네가 넘 고생했겠다 생각했는데, 우연히 뭘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쓸모있는 건 진짜로 과장없이 다 채운샘이 하신듯?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