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706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7-02 17:31
조회
451
공지가 늦어졌습니다. 죄송죄송. 백수 주제에 뭐 그리 바쁘냐고 울 모친 이따금 말씀하시는데, 네… 누구보다 그걸 알고 싶은 게 접니다ㅜ

지난 시간에는 <앙띠 오이디푸스> 2부의 7, 8, 9절 함께 살펴보았지요. 가족을 이용해 정신분석이 해낸 성취(?)를 탄압과 억압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듯합니다.
자, 복습해볼까요.

탄압과 억압. 한국어로는 그게 그거 같지만 맥락을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프로이트가 근친상간적 욕망에 관여하는 것으로서 억압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억압은 정신적,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가두기/누르기 작용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근친상간 욕망이 있고 이에 대한 억압이 있다고 간주하는바, 억압의 작동은 개인 안에서 역사 초월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되지요.
들뢰즈는 바로 이를 문제 삼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억압론은 말하자면 현실의 정치, 경제적 문제를 모두 거세하고 욕망과 인간을 고찰한다는 건데, 이건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모든 무의식은 집단적 무의식이며 모든 욕망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니까요.
인간이 특정 사회체 안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욕망을 생산 및 재생산하는 메커니즘 안에 있는 한 인간의 욕망은 사회적인 것이랍니다.
이 같은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이 갖는 중대한 효과라는 게 채운쌤 말씀.
정신분석학자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근친상간적 욕망을 억압한다고 말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는 이 같은 억압이 선차적이거나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사실은 사회적 탄압이 억압에 투여되어 있다지요.
다시 말해볼까요. 정신분석학은 우리가 가족을 욕망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들뢰즈의 반론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가족을 역사와 무관하게 욕망한다고 말함으로써 정신분석은, 근대사회가 가족을 관리함으로써 실은 사회를 관리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탄압과 억압을 서로 분리할 필요도 없는 것이, 실은 사회적 생산을 위해 작동되는 관리 체계, 즉 탄압을 우리 스스로 욕망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억압이라 부른다고.
우리가 탄압을 스스로 욕망하게 되는 이 메커니즘을 은폐하는 것, 그것이 사적이고 가족적이고 역사 초월적인 억압론이고 정신분석학이라고.
지난 시간과 지지난 시간에 채운 쌤이 슬쩍 언급하신 말씀이 있었죠. 집에서 밤마다 나를 때리는 저 남자는 ‘때리는 아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라는 사실.
정신분석은 바로 이 사실을 은폐합니다. 정신분석에서 문제는 아빠엄마이지 그들의 계급성이 아니랍니다.

채운 쌤께서 경기 버스 안 텔레비전 방송에서 나오는 캠페인을 언급하셨더랬죠? 결혼하면 좋은 열 가지 운운 하는 걸 이야기하더라는. 저도 그걸 봤는데요, 비단 그것뿐 아니라 경기 버스 안에서는 온갖 캠페인들이 아주 열심히 벌어지고 있답니다;
아동은 사랑의 대상이지 학대의 대상이 아니라는 설교도, 아동 학대 신고는 여기로, 또 학교 폭력 신고는 저기로 하라는 정보도 있죠.
채운 쌤 말씀대로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가족 단위에 일임하면서 유지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는 모든 일을 전적으로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가족을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요.
건강 관리, 아동 관리, 청소년 관리, 성 관리, 주택 및 거주 관리, 치안 관리, 금융 관리, 교육 관리 등 온갖 관리체계들이 가족을 둘러싸고 발동되잖아요.
가족단위 안에서 자녀는 있으면서 동시에 사회 일반의 건강/교육 시스템 안에 놓입니다. 가족단위 안에서 부모는 자녀 및 가족 전체를 위해 보다 나은 시스템을 선별해야 합니다. 가족은 ‘다함께’ 더 나은 주거 공간, 교육 공간으로 이동하고, 주거래 은행을 바꾸고, 가야 할 병원과 학원과 어학연수 코스에 대해 의논해야 합니다.
이 같은 시스템 선별 과정과 병행하는 것, 혹은 그보다 선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채운 쌤은 “정서적 소유관계”라 말씀하신 듯합니다.
엄마, 아빠, 나 사이의 이 끈끈한 관계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고 각자의 시스템에 관여하고 그렇게 공동의 목적을 향해 움직입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정신분석학은 바로 이런 점에서 아주 반동적이고 보수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은 가족이 어떤 사회적 생산에 의해 격자화되는지를 보는 게 아니라 가족에 오이디푸스 신화를 덧씌워놓은 뒤 모든 욕망을 사회, 경제, 정치, 역사, 문화와 무관한 것으로 둔갑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곳이 판자촌(요즘도 이런 말을 쓰는지 잘 모르겠네요 ^^;;)이든 타워팰리스든, 우리 아빠가 일용직 노동자든 기업 총수든, 내 무의식이 욕망하고 또 억압하는 것은 엄마나 아빠랑 자는 것이라는 저 억지 주장!
들뢰즈는 이에 대해 오이디푸스는 차라리 잠재적인 것 — 현행 요인에 따라 현실화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는 것보다, 어설픈 영화와 소설들이 떠드는 것보다 훨씬 미소하고 하찮은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목차를 보니 다음 주에 함께 읽을 내용들은 본격적으로 사회체와 욕망 사이의 관계로군요. 프로이트가 믿은 것과 달리 욕망이 어떻게 사회체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함 살펴봅시다.
3장 5절까지 읽어오시고요, 후기는 건화, 간식은 이현정+임길례 선생님입니다.
그럼 다음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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