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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 수업 정리 및 수업 공지(7.9)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6-07-03 14:46
조회
701

나츠메 소세키 최후의 작품인 <명암>을 읽었습니다. 미완이었음에도 분량이 만만치 않아 완독조차도 쉽지 않은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만해도 매일 출퇴근 지하철에서 읽고 저녁마다 3시간씩 꼬박 읽고도, 토욜 새벽 3시까지 읽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츠다가 온천장에 들어가 미로 같은 복도에서 길을 읽고 헤맬 때쯤에는 저 역시 혼미한 상태에서 몇 번이나 이야기를 놓쳤는지 모른답니다. 어지간히 정나미가 좀 떨어진 면도 없지 않았는데, 토론 시간에 동학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채운 샘의 수업을 듣다보니, 이 역시 소세키의 대단한 역작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디테일한 심리 묘사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소세키의 소설들에 비해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속편하고 안정감있는 인물들 하나 없이 어째 그리 다들 에고로 똘똘 뭉쳐 있는지 그 내적 충동이나 심리 변화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싶은데, 보이지 않는 그것들을 절묘하게 끄집어내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해서 심리 소설의 걸작이라는 평들도 나올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채운 샘께서는, 루쉰의 경우는 인물의 심리보다는 사건이 펼쳐지는 상황이나 분위기 묘사에 능한 것 같다고 하면서, <고독자>처럼 인물의 내면이 부각되어야 할 것 같은 작품도 해당 인물의 심리가 아닌 상황이 빚어내는 아이러니를 통해 인물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네요. <고독자>를 소세키 스타일로 고쳐 쓴다면 아마 어마어마한 장편 심리 소설이 되지 않을지~~~.


<명암>에서도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몇몇 인물들을 통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근대인 특유의 삶의 방식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가령 ‘후지이’이나 ‘고바야시’ 같은 경우 ‘고등유민’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들은 ‘인생의 여행자’나 ‘떠돌이’로서 근대 도시적 제도나 시스템에 안착하지 못하고 그 속도에 휘말리며 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 삶의 원형에 해당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자본주의적 인간 관계 내에서 우리의 노동은 물론이고 결혼이나 연애, 심지어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조차도 고정되지 않고 물질적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흐르고 떠도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니던가요. 무엇보다 돈을 중심으로 한 교환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흔들어대고 있다는 것이지요. 뛰어난 소설가들은 역시, 향후에 대세나 주류가 되어 등장할 것들의 기미나 징후를 예견하는 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 할지.


이뿐이 아닙니다. 츠다 같은 이들을 보면, 자신의 더러운 곳을 남에서 보여주기도, 스스로 확인하는 것도 싫어하는, 소위 ‘위생적 근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 또한 자신의 어두운 면을 감추고 밝은 면만 드러내고자 하는, 다시 말해 남에게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소중히 여기는 근대인의 한 모습이 아닐는지요. 이처럼 타인의 평가나 시선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근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극장 씬인데요, 채운 샘께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리고 있는 사교계의 세계에서 유사한 근대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셨네요. 주인공 마르셀은, 사교계라는 공간에서 적당한 교양과 에티켓을 갖추고 자신보다 영향력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하고 유명해질 것인가를 궁리하며 타인의 시선의 노예로 살아가는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가 얻게 되는 건 결국 허무한 몸짓과 의미 없는 말들로 채워진 근대적 삶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하는 깨달음이었다고 하네요.


츠다 뿐만이 아니라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스스로 자신에 대해 규정하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의 말들이나 시선을 통해 규정을 받는 존재들인 듯합니다. 우리의 여주 노부가 츠다나 요시카와 부인, 오카모토, 히데의 말들과 시선 앞에서 쩔쩔매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환히 떠오르지 않는지요. 해서, 우리 또한 그녀가 부딪치는 주변 사람들에게 반응적으로 드러내는 다양한 감정의 결을 경유해서만 그녀에게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고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또한 어디에도 없는 그녀! 니체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천개쯤 들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 없이는 자신을 알 수 없기에 늘 불안해하고 무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타인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이죠. 이처럼 타인(외부의 것)을 매개해야만 간신히 자신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네 삶은, TV나 인터넷 같은 미디어 없이는 사실상 친교나 대화가 불가능해져버린 현실을 보아도 확연히 알 수 있는 듯합니다.


채운 샘께서는 이런 현상은 근대에 와서 더 심해진 거라고 하셨는데, 전근대에서 적어도 지식인 사회 내에서는 자기 수양(수신)을 통해 자기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았기에 모든 가치 기준을 자기를 중심으로 확고히 세운 뒤에 이를 타자에게로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는데(추기급인), 근대에 와선 그 같은 전통이 무너지면서 오로지 타자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규정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군요. 과연~~~!


그런데, 이처럼 하나의 인간이 자신이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건,  관계의 空성을 여실히 확인시켜 주는 듯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 맺을 때, 그 관계가 제 3자의 개입에 의해 어떻게 미끄러지고 변주되는지를, 그리고 다른 관계를 반복·모방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를 가를 잘 들여다보면, 관계라는 게 얼마나 실체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이 작품은 대단치 않게 던져지는 듯한 대화나 행위들을 통해, 나와 타자, 그리고 관계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니, 지루하게 반복되는 듯한 일상적 사소함을 단순히 사소함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ㅠ.ㅠ), 표면으로 드러난 계열들 속에서 그 사소함을 넘어가는 심연에 대한 통찰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겠지요. 여기서 채운 샘은 프루스트를 빌려 문학이(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덧붙이셨는데요, 우리 삶을 이루는 무수한 마주침의 기록이 그것의 본질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 행위의 의미나 인과를 알 수 없어,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놓치고 지나가버리게 되는 그 무수한 것들, 그 스쳐가는 것들, 스러져버린 것들의 이미지나 이야기들 속에 요동치는 삶의 모든 것, 세계 전체의 움직임이 들어 있을지 모르는다는 것. 다시 말해 아무것도 아니 듯 보이는, 사소한 만남과 마주침들이 어짜면 세계의 전부라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는 게 문학이고 예술이라는 것이지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셨는데, <명암> 또한 거기서 예외가 아닐 터이지요.


정리하다보니, 지난 시간에 참 많은 얘기들을 하신 듯하네요. 장황해보이고 좀 지겨우시더라도 좀 더 가볼게요~~^^.


<명암>에 나타난, ‘자연’과 ‘인위’의 대비도 생각해 볼만한 듯합니다. 이전 작품들에서도 ‘자연’이 자주 언급되었고, 게다가 루쉰과 비교해 접근보라는 당부의 말씀도 있으셔서 읽는 과정에서 눈여겨보기는 했습니다만, 잘 잡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가 암송한 구절에도 나온 것처럼, 인간적 차원의 ‘작은 자연’과, 그보다 훨씬 위에서 작동하는 ‘커다란 자연’이 대비되는데 그 차이도 막연한 것 같고요. ‘우연’의 힘이나 ‘인연’, ‘음양’의 작용이 ‘커다란 자연’이라면, 인간의 뜻이나 의지는 또 어쩔 수 없이 ‘작은 자연’인 걸까요? 그런데, 이 ‘커다란 자연’은 가혹하게 ‘작은 자연’을 짓밟고 가버린다는 것. 츠다가 교코의 변심을 잊지 못해 두고두고 되뇌이고, 노부가 끊임없이 남편의 진실을 알고자 안간힘을 쓰면서 불안해 하는 건, 무정하고 불인하기 그지없는-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도 무너지는- 자연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표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작은 자연’에서 놓여나지 못하기 때문일 테지요. 이에 비해, ‘인위’의 대표는 ‘돈’이라 할 만한데, 이는 제도나 시스템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개인이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겠지요. ‘돈’은 이 작품 내에서 아슬아슬하게 개인들의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매개물이자, 사건을 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는데, 어쩌면 소세키는 ‘커다란 자연’과 더불어'돈'을, 근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좌우하는 두 축으로 설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작품의 제목에 담긴, ‘명’과 ‘암’을 어떻게 볼 건가. <명암> 집필시에 소세키가 읽었다고 하는, <벽암록>에 나타난 ‘명암쌍쌍저’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채운 샘께서 설명해 주신 바에 의하면, ‘명’도 상이고 ‘암’도 상에 불과한 것으로 인연조건 속에서만 그렇게 현상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세우는 모든 것국 실체가 없는 꿈이라는 생각이, <명암>이라는 제목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근대는 우리에게 이것과 저것을 분명하게 나누고 어느 쪽 하나에 속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는데, 무엇도 실체화하지 않아야 소설 속 인물들이 겪고 있는 것 같은 관계의 지옥에서비롯된 번뇌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루쉰에게서 ‘어둠’과 ‘밝음’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들풀>에 실린 ‘그림자의 고별’을 통해 보건데, 그는 어둠도 밝음이라는 양단을 모두 쳐내는 방식으로 매순간이 ‘무’이고 ‘폐허’임을 자각함으로써 ‘어둠(절망)’과 ‘밝음(희망)’이 결국 다를 바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불교관이 비슷한 듯 달라 보이는데, 채운 샘께서는 소세키의 경우엔 당시 일본 불교계의 주류였던 ‘화엄종’적인 사유가, 루쉰의 경우엔 ‘중론’이나 ‘선불교’적인 것이 깊이 반영돼 있는 것 같다고 하시네요.  제 경우엔 넘 어렵고 막연해서 잘 잡히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밖에도, 작품 도입부에 나타난 문제의식-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을 좀 더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고, ‘진실’과 ‘거짓’을 둘러싼 인물들의 심리적인 전쟁이 드러내는 근대적 삶의 본질, 꿈처럼 몽환적인 ‘여행’이 가져다 줄 츠다의 내면적 성찰이나 변화의 지점, 고바야시나 교코라는 인물의 특이성 등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고민들을 이어갈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여튼, 노부-츠다라는 작은 세계가 이토록 어마어마한 세계를 거느리고 있을지, 좀 놀라운 경험을 한 시간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채운샘께서 언급하신 에세이 주제 몇 가지 정리해 봅니다. 1. 루쉰의 자연과 소세키의 자연 2. 루쉰의 불교와 소세키의 불교 3.두 소설가의 작품에 나타난 부부와 자식의 문제 4. 두 사람의 작품에 나타나 근대적 시공간의 차이 5. 루쉰의 적막과 소세키의 불안 의식 6. 루쉰의 구경꾼의 시선 VS 소세끼의 평가하는 시선 등등. 남은 기간 공부하면서 더 찾아보고, 또 구체화시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공지 올립니다. 다음 시간에~~~.


1. 읽을 책 : 소세키 <우미인초>, 고진의 소세키론(프린트),  시간되시는 분은 <풀베개>까지.


2. 발제 : 혜원, 현옥 샘


3. 간식 : 하동, 은남 샘


4. 다함께 : 공통과제, 암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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