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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보는 남자 : ‘필경사 바틀비’, 연극으로 만나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6-08-17 22:11
조회
1183

‘필경사 바틀비’, 연극으로 만나다


- 캐나다에 계시는 오선민 선생님께






'길 위의 생- <바틀비>편'에 대한 답장

 

연구실에서 스치듯 잠깐 뵌 기억밖에 없어, 성함 석자 말고는 선생님에 대한 어떤 것도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네요. 혹 뵙게 되더라도 못 알아볼게 빤하지 싶습니다. 그런 마당에 이런 편지 형식의 글을 올리는 게 감히 실례가 되지 않을지 살짝 떨리고 또 조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펜팔도 아니고~~^^).

안녕하세요. 전 규문에서 여러 해째 공부하고 있는 김태욱이라는 학인입니다. 월간 규문의 한 코너를 통해 연극에 관한 보잘것없는 글을 몇 번 올린, 그 남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올려주시는 글들의 착실한 애독자이기도 하답니다. 제가 쓰는 이 글은 선생님께서 ‘길 위의 생’이란 코너에 쓰신 ‘바틀비’에 대한 감사의 답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글을 읽고 나서, 참을 수 없는 어떤 기분에 사로잡혀 오래 전에 읽은 <필경사 바틀비>를 꺼내 다시 읽고, 저의 공부와 글쓰기가 나아가야 할 지점에 대해 제법 많은 생각들을 해볼 수가 있었거든요.

이 책은 7-8년 전쯤에 토론 동아리 학생들에게 읽힐 토론 도서를 찾다가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필경사 바틀비>가 자본주의 초기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는, 단편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기도 하고, 더구나 최근에는 지젝이나 아감벤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언급되어 꾀나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더군요. 늘상 고만고만한 상식적인 주제나 사회적 이슈를 갖고 토론하는 데 익숙한 요즘 고등학생들에게, 상식을 넘어선 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바틀비’를 두고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의미가 아조 없지는 않았습니다.

여지껏 살면서 어디에서도 만난 적이 없는 ‘바틀비’를 통해 아이들은, 선생님께서 쓰신 대로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가 ‘옳다고 믿기로 한’ 무수한 전례들을 베껴쓰고 또 베껴쓰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저는 저대로, 아무리 ‘진심’을 다해 말을 걸어도 도무지 자신을 꺼내보이지도 않고 변화의 기미를 보여주지 않는 ‘문제아’나 ‘말없는 아이’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까요. 제가 교사라는 이름 앞에 붙이고 싶었던 ‘좋은’, ‘양심적인’, ‘진심어린’ 같은 말들이 얼마나 의미 없고 허위에 찬 자기중심적인 언사들이었나를 깨쳤던 때가 아직도 어젯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를 지경이기도 합니다. 여튼, 그 토론 이후에 그 아이들과 저 사이에서 ‘은밀하게 위대하게’ 떠돌았던 말이 있었죠. “전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절대 자유와 만난 변호사는 달리 뭘 더할 수 있을까요? 계속해서 법을 베껴쓸 수는 없겠지요. 이제 그는 법 너머를 옮겨씁니다. 방향 없는 자유와 철저한 고독을 탐구하는 사람이 되고, 그러고 싶어진 것이죠. 작가 멜빌에게 문학은 이 변호사처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은 세계’에 다가가는 것!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변호사와 바틀비가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가 법과 자유의 대결로 보이게 됩니다.

선생님의 글은 잊고 있던 그 때를 제게 상기시켜, 몇 해째 공부한답시고 연구실을 들락거리면서도 여전히 ‘법을 베껴쓰고’ 살아가고 있는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니체에 스피노자에 혹(한 척)하고, 열심히 루쉰을 읽고 베껴쓰고 암송하면 무얼하겠습니까. ‘법 너머’의 ‘그러고 싶지 않은 세계’를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내 몸이 터하고 있던 상식과 통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닫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공부를 통해 ‘방향 없는 자유와 고독을 탐구하’겠노라 발심을 해보지만, 외려 자유와 고독의 알뜰한 허상에 묶여 그 구속감에 쩔쩔매고 있는 게 지금의 제 꼬라지니 말입니다. 아, 그리고 그동안 저는 문학과 글쓰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 왔던 것이란 말입니까.

덕분에 그렇게 해서 다시 읽게 된 ‘바틀비’는 여전히 불가해한 존재이지만, 불후의 인간 형상의 하나로 제 속에 분명히 자리잡게 된 것 같습니다. 마치 '아Q'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지요. 바틀비가 지나치게 낯설어서 오히려 가깝게 느껴진다면, 아Q는 너무 친숙해서 오히려 멀게 느껴진다는 점이 다르다면 좀 다를는지요. 우리는 어쩌면 바틀비와 아큐, 이 두 형상을 영원히 안고 살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극성을 가진 텍스트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네요(^^). 선생님께선 혹시 무대 위의 ‘바틀비’를 그려보신 적 있으신지요. 독서 과정 자체가 머릿속을 무대화해 그 위에 인물들을 세우는 일이기도 하니 어쩌면 우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만, <필경사 바틀비>는 그 자체로 강렬한 연극성을 가진 텍스트기도 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일단 시공간의 변화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일정하게 펼쳐지고, 동화처럼 단순 반복 구조로 되어 있어 무대 위에 올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경이나 세계관이 다른 두 인물이 만나고, 그 관계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인물의 심리 변화나 관계 양상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틀비도 바틀비려니와 조연급에 해당하는 캐릭터들은 또 얼마나 개성이 넘치는지요. 터키와 니퍼스, 그리고 진저 너트. 그들이 현실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지지 않는지요, 하하~~.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작품까지 다시 읽고 난지 한달여쯤 되었을까요? 연극하는 선배의 추천으로 연극 <필경사 바틀비>(이양구 각색 연출, 극단 두비춤)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우연의 일치인지,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 공연이 우리나라에서 초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간 알게모르게 대학교 극회 같은 데서 공연되었을지 모르지만, 대학로 연극 무대에서는 처음 공연되는 작품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왜 그동안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지 못했을지 살짝 궁금해지기까지 하더라고요. 역시 관객을 끌만한 스펙터클이 없어서거나, 아님 관객들이 ‘바틀비’를 받아들이기 힘들거라 판단해서였던 걸까요. 공연장은 연우 소극장이라고(아실지도 모르겠네요), 규문에서도 그닥 멀지 않은 혜화동 외곽에 있는 비좁고 낡은 소극장이었지요. 거대 자본을 낀 대규모 상업적인 극장들이 대학로 한복판을 점거하는 바람에 대학로에서 소극장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데 그나마 실험적인 창작극을 꾸준히 올리며 나름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곳이랍니다(제가 속한 교사 극단에서도 몇 번 공연을 올리기도 했었지요^^). 낡고 오래된 건물의 외양이 19세기 초반 월가 모퉁이의 법률 사무실의 분위기를 보여주기에 제격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아무래도 화려한 대형 극장 무대 위의 바틀비를 상상하기는 좀 어려운 듯합니다.

소설 원작에도 등장인물은 많지 않은데, 연극에선 그마저도 확 줄였습니다. 변호사와 바틀비 역할의 배우 둘과 터키와 니퍼스, 진저를 오가며 연기하는 배우 한 명(이 배우는 그밖에도 경찰과 급식업자 등 다양한 엑스트라 연기까지 도맡아 합니다), 그리고 원작에는 없는 역할인 변호사의 분신(양심) 역할을 하는 배우 한 명. 이렇게 네 명의 배우가 좁은 무대를 분주히 오가며 한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소규모 극단이라 경제성을 고려해 1인 다역(7역쯤 되나?^^)을 구상하기도 했겠지만, 웃을 일 없는 이 연극에 웃음을 만들어 낸 건 1인 다역 배우의 놀라우리만치 신속한 역할 바꾸기였습니다. 연극 자체가 원래 가면 놀음인데, 이같은 가면 바꾸기 놀이는 리얼리티와 무관하게 관객들의 유희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지요. 해서 1인 다역의 배우(최요한)가 등장할 땐 역시 객석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찰리 채플린을 닮은 배우가 터키와 니퍼스를 숨차게 오가며 연기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연극적 인물이 변호사의 분신 역(양정윤 분)입니다. 소설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인 만큼, 그대로 연극으로 옮기면 작품의 대부분이 변호사의 독백으로 채워지는 끔찍한 공연이 되겠지요. 이 분신은 변호사(문일수 분)와 ‘따로 또 같이’ 움직이면서, 변호사에게 묻고 따지고 또 달래기도 하면서 변호사의 내적 의식을 생생하게 전달하는가 하면, 작가와 연출자의 문제의식을 관객에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이런 역할도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서부터 그 전통이 유구하고 풍요로운 데가 있지요. 연출가가 새로이 창조해 낸 역할인 만큼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긴 했는데, 다소 평면적으로 표현돼 약간의 아쉬움이 남긴 했습니다.

우리의 ‘바틀비’는 어땠을지 궁금하시죠? 파리하고 창백한 얼굴에 말라비틀어진 체구를 지닌 배우를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뚱뚱하고 진중해 보이는 몸과 인상을 지닌 배우(이상홍)였습니다. 주인공이긴 하되 대사가 몇마디 없어 오로지 건조한 얼굴과 단순한 몸짓만으로 투명한 고독과 바닥없는 수동성을 표현해야 하느니 만큼, 배우로선 도전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이었으리라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런 캐릭터를 만나는 걸 좋아하기도 합니다. 좋은 배우는 몸 자체가 아니라 몸이 만들어내는 기운과 에너지로 연기하듯이, 이 배우 역시 몸의 한계(?)를 이겨내고, 변호사와 관객으로 하여금 동정과 연민, 짜증과 분노를 넘어 무력감과 두려움까지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는 듯합니다. 언젠가 또다른 바틀비를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조명 사용법

글이 길어지는데 이 얘길 안 할 수가 없지요. 바로 조명의 사용법입니다. 이 연극에서 조명은 많이 쓰이는 편이 아닌데도, 제법 큰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연극은 조명의 예술이기도 하지요). 변호사의 공간과 바틀비의 공간은 빛과 어둠으로 구획이 됩니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근대의 세계는 빛으로, 바틀비로 상징되는 그 너머의 세계는 어둠으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바틀비가 그들의 세계로부터 격리되고 결국 ‘툼스’ 구치소에서 스스로 굶어 죽어가는 데 이르면 그의 모습은 밝고 강렬한 빛 속에, 반대로 변호사는 캄캄한 어둠 속에 놓이게 됩니다. 변호사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받아들이는, 자본의 질서와 그에 따른 삶의 코드나 복종의 예의 같은 것들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급기야 스스로를 그 세계에서 추방, 소거시켜 버린 바틀비의 주검 위에 드리워진 빛은 사뭇 숭고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연출가는 분명 바틀비의 삶에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삶의 윤리나 저항의 방법 같은 것을 찾고자 고심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연출가가 이전 작품들을 통해 쌍용 자동차 문제나 세월호, 평택 미군기지 문제 등 우리 사회의 핫한 이슈들을 연극화해 왔기에, 바틀비 같은 인물에게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넘어설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을 보고자 하지 않았냐는 것이지요. 물론, 연출자는 대놓고 희망 따위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지요.



 

책도 읽고 연극까지 보았건만, 바틀비를 생각하면 여전히 벽 앞에 선 것처럼 막막합니다. 어느 날 문득 바틀비가 내 인생으로 들어온다면, 과연 저는 ‘양심’ 있는 인간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저는 어떻게 바틀비를 쓸 수 있는 것일까요. 참 많은 물음들이 제 앞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면서 부딪쳐 나가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듣자하니, 올해 하반기에는 귀국하신다 하니 조만간 바람이 이루어지리라 싶네요. 그때까지 아이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다 돌아오시길 바라겠습니다. 거칠고 부족한 글 읽어 주셔 감사하고, 혹여 결례가 되었다면 용서해 주시길 바라며 그만 줄이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동 올림.
전체 4

  • 2016-08-17 23:25
    ㅋㅋ 우연인가요? 아는쌤 추천으로 "필경사 바틀비"책을 읽을까?말까? 고민 중이었는데요, 하동쌤 글읽고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고로 8/26(오후8시) 8/27(오후4)
    남산국악당에서 무료로 선착순 예매..
    "필경사 바틀비"판소리 공연합니다

  • 2016-08-18 09:17
    드뎌 칼(?) 마감을 해주신 태욱샘,
    담 원고는 9월 21일입니다.
    담 글 기다릴게요-^^

  • 2016-08-18 14:43
    <바틀비>를 다시 읽었습니다.
    (1) 무대 위에 바틀비가 서 있다고 생각하니 작품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투명한 고독"과 "바닥없는 수동성"을 지닌 바틀비의 형상은 잘 그려볼 수가 없었습니다. 터키, 니퍼스, 진저넛과는 달리, 바틀비에게는 성격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상상해보면, 연극의 1인 다역 배우의 신속한 변신과 바틀비의 텅 비어 있음은 잘 대비되었을 것 같습니다. 비굴하지 않고, 초라하지도 않고, 죽음의 문턱을 넘는 그 순간까지 당당한! 절대 자유의 인간적 형상! 상상만해도 짜릿합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바틀비를 다룬 영화 몇 편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과연 바틀비는 육화하기가 진짜 어려운 존재로다!!' ^^;; 참, 이 연극의 바틀비가 '육체의 한계'를 지녔다는 말씀에 빵 터졌습니다. 바틀비는 먹지 않고, 굶어 죽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카프카의 <단식 광대>를 떠올리게도 하는데요. 요전에 <단식 광대>를 다룬 옛날 영화를 보다가, 배우가 우락부락한 근육질로 나와서 화딱 깬 적이 있었거든요.

    (2) 조명 사용법을 설명해 주신 덕분에 작품 속 공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작품 <바틀비>의 도입부에는 월 스트리트의 법률 사무소 안을 묘사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사방이 벽이고, 그나마 난 창문 너머로 또다른 벽이 닥쳐 와 있는 공간. 처음에 책상 위에 앉아 있던 바틀비는 작품 뒤로 갈수록 점점, 더, 벽을 보고 서 있습니다. 툼스 구치소에서도 벽을 보고 앉아 있다가 죽습니다. 연극이라면 이 '벽'은 어떻게 조명 처리 될 수 있을까요? 바틀비는 변호사와 대결했다기 보다는 이 '벽'과 맞섰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의 상상은 이 지점에 이르러, '바틀비가 벽을 보는 장면에서, 그의 얼굴이 관객을 향하고 있다면?' 하는 데까지 비약하기도 했습니다.

    * 이렇게 문득, 태욱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양심'이 후덜덜해졌습니다. 그래도 은밀하게 뻔뻔하게,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하루 정말 즐겁게 <바틀비>와 만났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o^

    • 2016-08-18 21:39
      그의 얼굴이 관객을 향하고 있었다면? 헉! 생각해보진 않았는데~~역시 놀라운~~~! 메인보다 빛나는 부록인 듯요. 감사합니당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