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예술톡톡 1강 미술은 질문이다 : 마르셀 뒤샹

작성자
락쿤
작성일
2016-09-05 10:45
조회
608
오늘은 예술톡톡(시즌 2) 첫 시간,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작품들을 봤습니다. 저는 뒤샹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 <샘>, 그 유명한 ‘변기’가 가장 인상적인데요. 기성품인 변기가 어떻게 미술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 당시 뒤샹의 질문은 무엇이었는지.. 사실 저는 뒤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삶이 가장 궁금했어요.

우선, 뒤샹이 <샘>으로 유명해졌으니 이 작품부터 소개합니다. <샘>을 제출할 당시, 미술계에서는 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생긴 모양이 ... 같다. 저속하다. 또 어떤 부류는 그냥 평범한 ‘변기’이지 않나. 배관 설비를 파는 진열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등등. 남자 화장실에서 보는 그것과 무엇이 다른 가였죠. 여기서 뒤샹이 직접 <샘>을 제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페이트나 드로잉으로 멋지게 덧칠 할 이유도 없었죠. 뒤샹은 그냥 그것을 ‘선택’한 것뿐입니다. 그는 가장 일상용품을 고른 후 <샘>이라는 멋진 이름을 달고 새로운 관점으로 본 것이죠. 변기로 보는 맥락에서 분리시켜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일상용품들이 다 예술작품으로 둔갑하지 않을까요? 예술은 우선 아름답고 심오해야 될 텐데요. 채운 쌤에 따르면 뒤샹이 제시한 레디-메이드들은 작가의 붓놀림이나 행위도 일체 개입되지 않는 사물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파격적 선언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질문을 하는 걸까요?

좋든 싫든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어느 정도 권위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하고, 또 거기서 ‘작품’이라는 권위를 획득하게 되죠.

“뒤샹은 무표정하게 그 권위에 침을 한번 뱉는다. 그리고는, ‘진짜 사물’들을 가지고 와 그것을 ‘예술’이라는 문맥 위에 놓음으로써 ‘예술’을 그 의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능에 의해서 작동하도록 만든다. 그의 레디메이드들은 언제든지 복제가능하며,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다. 그것은 그저 ‘게임’이 뿐이다.”(채운샘 강의록)

예술이라는 알 수 없는 심오함과 진지함에 무심한 듯 침을 뱉는.. 뒤샹은 어쩜 이렇게 가볍고 시크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그의 태도가 멋지지만 뭔가 궁금해졌어요. 뒤샹의 삶의 태도는 당시 다다이스트들과 많이 닮아있다고 합니다. 다다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딱히 장르도 없고, 의미 없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지함을 아주 싫어했다고 해요. 그들 작업의 특징은 ‘웃음’. 그들의 웃음은 진지한 권력에 대한 조롱을 의미하죠. 진지함은 권력의 이면이라는 것. 그래서 권력에 포획되지 않으려면 조롱하고, 웃고, 떠들고, 미끄러지고... 말하자면, 현대인들의 삶은 관료적이고 기계적이고 딱딱한데, 이러한 삶의 폭로는 웃음이지 않을까요.

잠시 미술사를 보면, 19c 인상주의 이후, 추상미술이 나오기 시작하는데요. 당시 모든 미술이 이 안에서 시작되었죠. 모든 회화의 이미지들은 지우고 선과 색으로 표현했습니다. 구상화에서 벗어난 거라 뭔가 파격적이죠. 그러나 추상화가 칸딘스키는 미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했고, 다른 예술가들도 새롭고 대단한 것을 찾으려 했었죠. 하지만 다다는 새로운 미술 장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것은 미술이다’라는 전제를 의심합니다. 뭘 새롭게 만들고 그리는 것이 아닌 거였죠.다다와 뒤샹이 공통적으로 통하는 지점은 바로 권위를 없애는, 그것에 대한 조롱입니다. 채운쌤은 청소라고 표현했습니다. 기존에 있는 것을 지우는 작업이죠.

다다는 예술가들이 사회에 기여한다는 생각에 비웃음을 나타내기도 하죠. 이처럼 기존 것을 파괴하는 것이 다다의 작업입니다. 영역화 되는 것을 거부한 거죠. 뒤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새로운 미술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미술이라는 배치 안에서 미술이 미술일 수 있는 근거에 질문을 던진 것이죠.

다다는 좀 더 즉흥적이고 직관적인데 비해, 뒤샹은 아주 지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태도적인 부분에서는 다다와 뒤샹은 닮아있습니다. 다다는 ...이다. 다다는 ...이, ...은 다다가 될 수 있다. 다다는 끝없는 서술적 용법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다다를 하나로 정의할 수 없죠. 뒤샹 또한 어떤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정의되지 않는 예술을 말합니다. 예술을 하나의 태도로서 본 거죠. 예술의 무거움, 겉 멋 등을 꺼렸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뒤샹은 예술이란 생계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직업이었고, 생계와 무관하게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 유희였다고 합니다. 뒤샹은 다다처럼 큰 소리로 웃어제끼는 대신 혼자 미소 짓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해요. 뒤샹의 노년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는데요. 무언가 초연하고 여유 있는 그러면서도 이지적이고 아이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닮아있습니다.

뒤샹에 따르면, 미술에서 가장 큰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회화는 ‘망막적인 것’이 되어 버렸죠. 사실 망막에 비치는 색과 형태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비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 맥락에 담긴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뒤샹은 가시적인 것, 망막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작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뒤샹의 다른 작품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들 수 있는데요. 이 그림에서는 움직임의 동과 정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그린 것. 실제 인물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 필요는 없고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그림은 계단을 내려오는 운동을 연상하기 위해서 ‘관객’이 필요하다는 것!

다른 하나, <큰 유리> 작품 또한 단순히 그림을 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기계적 작동’과 그에 따라 '생산되는 주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유리 위에 제작된 작품 한쪽에는 독신자 기계 9명이 있고, 가운데는 커피를 가는 기계가 있습니다. 여기서의 운동은 작가인 뒤샹이 설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림을 보고 관객이 그 움직임을 연상 작용한다는 것이죠.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와 같은 맥락입니다. 작가에 의해 주어진 이미지를 망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연상한다는 것. 그래서 이 작품은 어떤 관객과 접속하느냐, 어떤 공간에 놓이느냐에 따라 매번 느껴지는 것이 달라집니다. 망막적 이미지를 제공하기보다는 관객의 체험에 의해 작품의 의미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 뒤샹은 이것을 예술로 본 것 같습니다.
전체 2

  • 2016-09-05 12:12
    옷~ 이렇게 빠르고 성실한 후기라닛! 락쿤샘, 멋져요♡
    전 작품도 죽는다는 생각과, 저 유리로 된 작품들에 생긴 균열이나 거기에 쌓인 먼지들까지 같이 작품이 되었던 것, 또 문구멍으로 들여다 본 충격적 장면 등이 특히 기억에 남네요. 요렇게 나날이 유식해지고 있어 진심 기쁩니다^^ 흐흐.

  • 2016-09-05 13:03
    나도 유리 유리!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유식함과는 멀어지는 듯하지만-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