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0.12 수업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0-16 21:08
조회
444
이번 시간에는 4번째 고원을 읽고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던 3번 째 고원 (‘기원전 1만년─도덕의 지질학’)이 인간의 삶의 문제, 배치의 문제를 ‘기계권’이라고 얘기되는 포괄적인 층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였다면, 4번째 고원은 그 연장선상에서 언어와 주체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4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제목에 나타나는 것처럼(‘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언어학이 전제하고 있는 것들을 사정없이 파헤칩니다. 주류 언어학은 기본적으로 실체로서의 언어를 다룹니다(음운·문법, 의미론 등). 그렇기 때문에 언어학은 항상 랑그와 파롤 중 랑그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때의 랑그란 언어에서 발화의 구체성을 완전히 제거한 것입니다. 여기에 작용하고 있는 전제는 언어가 순수한 정보 전달로 기능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또한 언어가 대상을 재현한다는 관념에 기반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발화의 과정에 필연적으로 끼어드는 잡음들(컨텍스트, 몸짓, 표정, 비표준어 등등)은 주류 언어학에 의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들이 잡음, 변수로 여기는 것이 언어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언어는 대상의 지시·재현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정보 전달로 기능할 수도 없습니다. 채운쌤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를 언급하셨습니다. 언어학에서 연구대상으로 삼는 발화상황은 일종의 ‘진공상태’입니다. 마치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들이 중요한 대화를 나눌 때 마치 잡음이 제거되고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는 상황처럼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는 길거리 한 가운데에서도 이 둘의 목소리만 들리죠.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상황은 없죠.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키아로스타미가 보여주는 모든 장소는 잡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클로즈업>은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인데, 모흐센 마흐말바프라는 이란의 감독을 사칭한 혐의로 구속된 어떤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브지안은 특별히 악의를 품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아닙니다. 영화에서 왜 감독을 사칭했느냐는 질문에 사브지안은 “내가 보기에 감독의 영화엔 고통이 담겨 있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흐말바프 감독에 대한 팬심에 의한 사칭이었던 것이죠.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사브지안이 마흐말바프 감독을 직접 만나게 되는 순간을 담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사브지안은 눈물을 흘리고 마흐말바프는 농담을 건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사브지안이 속였던 아한카씨의 집을 찾아 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나는데, 이 감동적인 장면을 키아로스타미는 그 오토바이를 뒤따라가는 차 안에서 찍습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저 주변의 소음들만이 들립니다. (저는 마지막 장면만 찾아서 봤는데 이 영화와 키아로스타미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순수상태의 언어란 없습니다. 모든 언어는 언어 외부적인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그러한 외부적인 것들에 의해 항상 가치평가적인 악센트를 지닙니다. 애초에 타자가 있기 전에는 언어가 성립하지 않죠. 『방드르디-태평양의 끝』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로뱅송은 무인도에 홀로 표류하게 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언어의 자명성을 깊이 의심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언어를 망각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망각이 아니라, 말의 의미를 보증해줄 타인의 부재였습니다. 언어는 항상 타자를 전제하고 외부를, 그 언어행위가 놓인 배치를 전제합니다. 또한 그러한 외부는 항상 발화되는 언어에 내재해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상 언어를 방해하거나 규정하는 외부가 따로 있고 언어라는 범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들뢰즈·가타리는 언어가 기본적으로 명령어라고 말합니다. ‘명령어’라는 표현이 나타내는 것은 언어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독립적인 지위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언어는 재현하지 않고 개입한다는 것이죠. 앞에서 말한 주류 언어학의 전제, 어떤 잡음들 이전에 순수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전제에는 언어가 다른 것들을 지시하거나 재현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언어를 명령어로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순수한 언어라는 전제를 거부합니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과 완전히 다른 지반에 놓이게 됩니다. 정신분석은 꿈을 분석하고 무의식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언어를 문제삼고 있죠. 가령 ‘꿈속에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한다면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늑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즉 늑대라는 언어화된 상징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향으로 접근할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늑대는 늑대 자체도 상징도 아닌, 어떤 강렬함의 정도였죠.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과 같은 지반에서 옳고 그름을 논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언어가 기본적으로 명령어라는 것을 채운쌤은 ‘예언’이 작동하는 방식을 가지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언은 미래를 지시하는 것일까요? 가령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신탁이 이루어지는 것은 라이오스(오이디푸스 아빠)가 그 말에 겁을 집어먹고 오이디푸스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예언이 성립된 것은 라이오스에게 행해진 발화행위(신탁)가 그에게 힘을 가함으로써 입니다. 또 채운쌤은 홈쇼핑 쇼호스트도 예로 드셨는데 그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상품의 원단이 어떻고, 마감처리가 어떻고 하는 것들을 설명할 때 그 발화행위는 정보전달이 아니라 ‘사라!’는 명령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들은 명령어로서의 언어가 명료하게 드러난 사례입니다. 다른 모든 경우에도 언어는 정보의 전달이기 이전에 힘의 작용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명령어로서의 언어를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비물질적인 언표의 층위와 물질적인 층위의 관계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는 언어학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비물질적인 층위인 언어가 물질적 층위를 지시하거나 재현한다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구분 자체를 부정하는 걸까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언표행위가 물질적인 층위에 어떤 변화도 가하지 않고 물체 차원의 것들을 바꾸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비물체적 변형’이라고 부르는데, 가령 누군가의 유죄가 선고될 때, 라이히스마르크가 돈이 아니라고 선포될 때, 이런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물체적 변형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즉각적으로 신체에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물체적인 층위와 비물체적인 언어의 층위의 관계를 내용과 표현으로 이해하는데, 이때 내용과 표현은 항상 서로를 상호전제하고 있습니다. 내용 없는 표현은 없고 표현 없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물체적 변환은 물체적 조건과 항상 결부되어 있고 물체적 층위에 그대로, 곧바로 작용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한편으로는 들뢰즈·가타리가 궁극적으로는 물질적 층위와 비물질적 층위를 구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이러한 언어에 대한 인식은 베케트의 경우처럼 언어의 폐기로 나아갈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방식으로 언어를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언어행위를 통해 우리 자신이 지층화되고 있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는 더 이상 의미로 환원되지 않으며, 배치물 전체와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들뢰즈·가타리는 언어의 다수성과 소수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언어에서의 다수적인 것과 소수적인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많고 적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때의 ‘다수’는 권력의 표지입니다. 소수적인 것과 다수적인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규정되어진 언어의 사용과 변이하는 역량을 포함하고 있는 언어의 사용이 있을 뿐입니다. 명령어로서의 언어는 그자체로 선고이고 규정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항상 변이중인 것이기도 하죠.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언어B가 되고 있는 언어A에 다름 아닌 언어X”를 발명해내는 일입니다. 오늘은 이만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채운쌤이 강의 중에 언급하신 사무엘 베케트의 'quad' 유튜브 링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ZDRfnICq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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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17 09:24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과 서로가 서로에게 내재해 있다고 하는 건 좀 다른 이야기 같은데@.@ / 링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