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0.19 수업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0-24 10:50
조회
326
1.quad, 언어의 소멸 또는 변환

우선 베케트의 ‘quad’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quad를 보면 정체를 알 수 없게 가려진 익명의 인간들이 네모난 틀 안에서 네 귀퉁이와 중심을 이리저리 오갑니다. 정 가운데와 네 귀퉁이를 기점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동하고 익명의 인간은 퇴장합니다. 베케트는 이를 통해 언어가 소멸된 연극을 실험했습니다. 그런데 채운쌤은 행동뿐인 이 연극이 오히려 언어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각의 틀 안에서는 최대 네 사람이 움직이는데, 이들은 절대 정중앙을 밟지 않습니다. 중앙에 다다르면 항상 조금 우회해서 다시 경로에 진입하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이들은 서로 부딪치지 않고 계속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 가닿지 못한 채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언어는 자신이 재현하는 중심을 상정하지만 항상 그 중심에 닿지 못합니다. 또한 지난 시간에 보았던 것처럼 언어학은 순수한 진공상태의 소통을 전제하지만, 언어는 결코 순수한 의미, 순수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quad에서 익명의 인간들은 항상 서로를 비껴나갑니다. quad에는 중심에 닿지 못하고 서로 접촉하지 못한 채로 소멸해가는 신체들이 있을 뿐입니다.

베케트의 극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전혀 모르겠고, 베케트는 언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언어에 대해서 고민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적인 느낌만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것과 같은 언어에 대한 인간주의적 관점을 벗어나기 위한 실험이 바로 말의 제거가 아니었을지. 『천개의 고원』의 3, 4, 5장을 관통하는 문제의식도 바로 이것, 언어에 대한 인간주의적 관점을 가시화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언어를 새롭게 생각하는 일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채운쌤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언급하셨는데,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정보전달이 아니라 정보교란을 통해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거짓을 꾸며낼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들의 의사소통과 구별됩니다. 동물은 물론 의사소통을 하지만 그것은 무언가를 지시하는 행위에 그칩니다(‘사자가 나타났다!’). 그렇지만 인간은 신화를 만들어내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 냅니다.

유발 하라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유한회사’의 설립입니다. 1896년 아르망 푸조는 부모의 작업장을 물려받아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면서 유한회사를 설립하는데, 유한회사란 사원이 회사에 대하여 출자금액을 한도로 책임을 질 뿐, 회사채권자에 대하여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주식회사와 유사한 형태의 회사입니다. 이때 회사에 결여된 것은 몸체입니다. 그런데 회사는 어디에 있나요? 회사가 많은 돈을 빌린 채로 파산한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아르망 푸조에게 있지 않고 ‘푸조’라는 회사에 있습니다.

‘푸조’라는 회사는 그 회사의 사원을 가리키지도, 대표를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회사는 실제로 어떤 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상상적 관념이 법적 제도와 함께 성립될 때,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말하자면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사’라는 관념의 작용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언어가 지시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입’한다는 사실입니다. 언어적 층위에서 행해진 푸조 사의 설립은 실재하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표가 그저 허공을 떠도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 푸조라는 유한회사의 설립은 물체적인 층위에 개입합니다.

이렇게 볼 때 들뢰즈·가타리의 논의는 언어에 대한 비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주의적 전제를 벗어나서 사유할 때 우리는 언어에 대해서 보다 능동적일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들뢰즈·가타리가 ‘언어로 세계에 어떻게 개입할까’를 고민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케트에 대해서 이야기되는 ‘언어의 소멸’은 ‘언어의 변환’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그 자체로 사고를 규정짓는다는 사실입니다. 학교에 가서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언어적 기술의 습득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 그 언어가 규정하고 있는 세계를 습득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정보의 습득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정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전도되어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채운쌤은 정보가 이미 형식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in’form’ation). 우리는 습득한 정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내포하고 있는 형식에 규정됩니다. 채운쌤은 이러한 맥락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습득을 거부하는 것이 능력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기표체제와 주체화

이번 주에 읽은 5 번째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기호체제, 기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들은 소쉬르를 비롯한 기호학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기표-기의가 성립하는 것은 특정한 기호체제에서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공존하는 몇 가지 기호체제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때 핵심적인 것은 바로 주체화,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기호 체제입니다.

‘주체’란 언어가 행하는 비물체적 변형의 하나입니다. 주체란 저 혼자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인식하고 호명하는 주체는 동시에 누군가의 호명과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주체(subject)라는 말 자체에는 신민, 복종, 예속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체화는 인간의 예속되게 하는 지층의 하나입니다(“인간을 구속하는 주된 지층들은 유기체, 의미생성과 해석, 주체화와 예속이다.” 『천개의 고원』, 258 쪽).

들뢰즈·가타리는 기표작용적 기호체제, 전-기표작용적 기호체제, 반-기표작용적 기호체제,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 중 주체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은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물론 이러한 기호체제를 특정한 시대나 민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항상 동시에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들뢰즈·가타리가 이것을 어떠한 역사적 시기와 관련해서 이야기 할 때에도 그것을 그 역사적 순간과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우선 기표작용적 기호체제를 살펴보자면, 그러한 기호계에서 핵심적인 것은 ‘얼굴성’과 ‘해석’입니다. 전제군주 혹은 신의 얼굴과 그것을 해석하는 사제·관료들이 이러한 기호체제를 구성합니다. 기표작용적 체제는 기표 사슬을 만들어 냅니다. 어떤 기표의 기의는 덧붙여진 다른 기표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진 기표의 의미는 또 다른 기표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하겠지요.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아가는 것이 기표의 사슬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체제를 “무한한 빚의 비극적 체제”라고 명명합니다.

이러한 기표의 연쇄에 어떤 실체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바로 ‘얼굴’입니다. 왕의 얼굴, 그러니까 왕의 퍼포먼스는 기표작용적 체제에서 내용의 층위를 이룹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제와 관료의 해석이라는 표현의 층위와 함께 의미가 생성되는 하나의 기호계를 구성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기표작용이라는 언어학의 문제에 ‘얼굴성’이라는 기묘한 개념을 통해 신체적 차원을 덧붙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전제군주의 얼굴성은 항상 죄인의 몸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얼굴을 잃어버린 자입니다(참수형). 그는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모든 “나쁜 것”들을 떠안고 추방당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기표의 엔트로피는 증가합니다. 왕의 퍼포먼스와 마찬가지로 죄인에 대한 처벌이라는 퍼포먼스는 기표작용적 체제의 핵심적 부분입니다. 이때 죄인의 몸체가 만들어내는 도주선에는 의미의 원환들을 이동시키는 무정형적 군중들의 반란을 항상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표작용적 체제만 가지고는 주체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주체는 기표작용적 체제가 구성하는 의미의 원환들 중 어느 점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써 성립됩니다. 주체는 의미생성을 보증해주는 얼굴성과 해석의 원환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정서나 노력, 행동으로 스스로를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이때는 전제군주의 얼굴이 아니라 주체화의 점이 문제가 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민족의 망명이 시작되었을 때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신의 얼굴을 해석하는 사제가 아닌, 신을 배반하며 길을 안내하는 예언자입니다.

이것을 들뢰즈·가타리는 후-기표작용적 체제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해서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사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을 만나야 합니다. 이제 기표를 어떻게 내면화할 것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주체는 부르는 존재인 동시에 불림을 당하는 존재, 예속의 주체이자 예속 당하는 주체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체화의 점’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왜 점일까요? 내면화라는 점에서 그런 걸까요? 솔직히 아직은 전혀 감이 안 오네요(ㅠㅠ). 이 개념은 7번째 고원, ‘얼굴성’에서 반복되며 변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흰 벽, 검은 구멍).

5 번째 고원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언어는 투명하고 순수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자체로 명령어이며, 기호체제를 구성하고 주체화를 결정짓는다는 것. 이번 주에는 또 이렇게 급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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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4 17:59
    잘 나가다 급마무리로... 건화의 후기는 이렇게 지층화되고 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