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예술톡톡 3강 디덜러스, 생을 편력하는 예술가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작성자
우선
작성일
2016-10-27 14:34
조회
376
‘수업시대’에 비하면 읽는것에는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초반엔 일반 소설처럼 쉽게 읽히는듯 했지만 이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점점 읽을 수록 책과 함께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책의 흐름이 제 손목을 잡고 끌고가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책은 예고도 없이 현실에서 갑자기 교실 밖으로, 기숙사로, 집으로,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의 기억들로 우주로 아무렇지 않게 가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업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내용들을 매치시키고 낯선 단어를 이해하는데 약간 어려움을 느껴서 이전에 배웠던 것들과 함께 이해해 보았습니다.)

책의 저자인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지만 어릴적 부터 유럽 곳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리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세상을 주유하는 이미지, 물리적으로 어떤 세속/세계에 고정되어 있더라도 다른 세계, 사상을 부유하는 이미지로 그립니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난해하고 실험적인 형식의 책을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통적인 장편소설 기법으로 쓴 ‘스티븐 히어로’라는 책을 쓰기도 했지만 수정을 거치면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젊은/예술가의/초상>인지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초상이되, 누군가의 얼굴을 그린 초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스티븐 디덜러스’란 주인공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를 그린 것이 아닌 것 입니다. 얼굴 없는 초상, 주체 없는 초상인 것 입니다. 이야기는 분명 주인공 스티븐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가 몇살인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뭘하고 있는지는 스티븐이 단어를 어떻게 감각하고 계발하는지로 어림잡아 볼 뿐 정확하게/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책 속의 주체가 없는 현상과 주체를 의심하게 되는 현상은 백남준의 이미지의 주체를 없애버리는것, 앤디워홀의 원본과 복제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들었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는 ‘스티븐이 성장한 것’이 아닌 ‘성장’이라는 ‘사건’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장’이 스티븐을 통해, 스티븐과 더불어 펼쳐지는 것 입니다. 즉 초상화가 그려보이는 것은 ‘성장’ ‘자체’ 인 것입니다.

이전 괴테의 <빌헬름 마에스터의 수업시대> 에선 ‘성장’이 공통체에 안착하는 것이었다면, 조이스의 ‘성장’은 어딘가의 귀속이 아닌 ‘길’ 위에 서 있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주변의 변화들로 ‘일시적 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책속의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나를 이루는 말, 기억, 지각 내용의 복합물이다’ 라는 문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수경쌤께선 니체의 ‘탈 주체 철학’과 닮았다며 함께 설명해 주셨습니다. 고유한 ‘자아-나’는 수많은 충돌들이 싸우는 전장이며 카오스의 상태인데, 어떤 힘이 잠시 이겨서 그것이 점령했을 때 일시적으로 나로 발현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니체는 니체의 방식의 글쓰기로 발현 되었지만, 조이스는 조이스의 방식으로 드라마화 한 것 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이것을 이미지화 한다면 뒤샹의 작업<큰 유리>(아래사진참고)일 것 입니다. 배치와 배열에 따라 존재의 양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유리라는 특성 때문에 놓이는 곳에 따라 연상 방식의 이미지는 니체와 조이스의 개념과 아주 유사합니다.

수업때,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형제같은 <율리시스> 을 연결해 함께 설명해 주셨습니다.
율리시스의 경우는 좀 더 희극적 느낌으로 각 장마다 문체, 플롯이 다르다고 합니다. 조이스는 인간이 달라진다면 (성장한다면 혹은 어떤 노출에 의해 반응한다면) 책속의 문체도, 단락도, 세계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조이스의 이야기 방식은 ‘재현’의 방식이 아닌 ‘드라마화’의 방식을 취합니다.
‘드라마화’와 ‘재현의 방식’은 단어의 의미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해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수경쌤의 설명을 되돌려 생각해보면, ‘재현’은 작가가 있을법한 이야기들을 서술해주며 이야기 속의 사건과 주인공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복사해 현장에서 시공간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이스는 ‘일회적인 나’, 생각이 드는 ‘순간의 나’와 시간성을 상실한 파편들의 연속을 잇기 위한 방식으로서 드라마화는 필연적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즉 조이스가 사용한 드라마화는 ‘있을법’한 구상적 사건과는 거리가 멀고 마치 앨리스의 성장처럼 시간성을 잃어버려 시공간의 공유(독자와 책 사이)가 어려운 것을 말합니다.

스티븐의 ‘성장’은 클라이막스라 불리는 4장에서의 ‘세례’를 통해 일어납니다. 스티븐은 교회-학교를 다녔고, 그의 꿈은 수도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는 수도사가 하고싶지 않아졌고 그 일을 하면 엄청난 지루함에 몸서리 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가 교장선생님과 대학진학에 대해 논의하는 사이 스티븐은 그곳을 뛰쳐나와 바닷가에서 친구들이 노는 것, 한 여성의 모습을 보고 어떤 각성적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면서 그 스스로 세례 의식(의미적, 개념적)을 진행합니다. 길위에 서 있는 방랑하는(할) 예술가의 모습으로 말이죠.
그는 교회 부속 학교를 다녔으며 어릴적에 이미 하나님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4장에서의 세례는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는 세례를 말합니다. 이상한 세례의식이지만 이러한 일상 속에서 내면의 깨달음에 닿게 되는 것을  에피퍼니(Epiphany) 체험 이라 말합니다. 이는 조이스가 처음 종교적 언어를 문학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주변의 모든것이 낯설어 지는 순간 막연히 느낌으로만 존재 했던 앎이나 사유들이 쏟아나와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고정된 그리고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나’가 아닌 지속적으로 조이스가 말했던 ‘순간’의 나의 연속들을 보는 것 입니다. 이전의 백남준의 '티비부처'에서 찰나의 연속을 보는 것 처럼 말입니다. 조이스는 모든 영토를 떠나 사회를 거부해 버리는 현상으로 젊은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조이스는 세상과 거리감을 두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낯설게 보는것, 낯설게 보기 때문에 어떤 영역에도 안주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젊은 예술가는 늘 떠나기 때문에 부유하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며 성장이지만 젊음인 것입니다. 찰나의 연속성의 성장은 조이스에겐 (위에서도 말했듯) 시간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성장하는 나’또한 없는 것 입니다.

마치 조이스의 이야기는 양쪽에서 끈을 팽팽하게 잡고 미세한 진동들의 연속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것도 진짜 같은 실이 없고 움직이는 순간순간 마다의 진동의 폭이 다른, 팅겔리의 반복적 기계가 아닌 계속 변주하는 생명의 기계처럼 말입니다.

 



 

 

 

 

백남준<티비부처>

 

 

 

뒤샹 <큰유리>
전체 2

  • 2016-10-27 15:05
    애썼네^^ 아무래도 조이스는 넘 어렵고, 그래서 넘 매력적인 것 같아. 한 번 더 언급하자면... <율리시즈>를 잠시 언급한 이유는, 그 작품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인간, 블룸이나 디덜러스라는 캐릭터를 시간순으로/서사적으로 쓴 것이기보다는 지금의 바로 그 모습으로 현상되기까지 그가 어떤 타자들을 거치는지를 그림으로써 우리가 생각하는 주체성 이미지에 균열을 일으킨다고 보기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이 세계에는 재현 가능한 어떤 고정된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재현적 글쓰기와 전혀 다른 방식의 글쓰기가 시도될 수밖에 없다는 것. // 자, 내일 보자-

  • 2016-10-27 15:15
    오올 우선~ 예술톡톡 미술과 문학의 콜라보?! 다방면의 배운 것들을 함께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어서 더 재미있는 듯!!!